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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7)화 (7/60)

| 7화

밤새 앓았다. 급체였다. 소화제라도 찾고 싶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울려 침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차가운 손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벽 내내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사람들은 아플 때 보통 누굴 떠올릴까. 아마도 사랑에 기반한 누군가를 찾겠지. 연인, 부모님, 가족, 혹은 친구일 수도.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생각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탓하기엔, 애초에 내게 머문 애정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있었다면 호출 버튼을 눌렀을 텐데. 수연에게 연락을 할까 생각했다가 그만뒀다. 지건호 귀에 들어갈 게 뻔했으니까. 자존심 때문인지 그에게 내가 아픈 걸 알리기는 싫었다. 사실은 그냥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마치 돌덩이를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꾸역꾸역 삼킨 돌덩이는 잘게 부서져 피를 타고 도는 듯했다. 괴로워. 아파. 너무 싫어. 다 게워내고 싶었다. 먹은 것은 물론이고 억지로 채워 넣은 기억까지 모조리 다.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눈을 감았다. 어떤 기억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일단은, 내 말대로 하세요.’

‘하지만 본부장님. 혹시라도 나중에 다 알게 되면요.’

‘그건 그때 생각하고.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하잖아.’

‘그래도 이건…….’

‘책임은 다 내가 질 테니까 김 실장은 계획대로 처리만 해 주세요. 필요한 서류는 알아서 준비해두고. 아, 지원이 가족들은…….’

내가 아는 한, 이 집에서 지건호와 김수연이 누워 있는 날 두고 몰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병원에 있을 때의 기억인가.

지건호가 날 찾긴 했던 걸까. 그는 뭘 계획 중인 거였지? 내 가족 얘기는 뭐야.

아,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지끈거렸다. 그의 말을 되짚기엔 혼몽한 상태였다.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돌아누웠다. 아니, 누군가 날 돌려 눕힌 것도 같다. 열이 들끓는 이마 위로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눈을 뜨고 확인하려다가 그것마저 귀찮아 그만두었다.

하아, 열기 어린 숨에 진득한 것이 겹쳐졌다. 불쾌한 냄새에 얼굴을 돌리자 입가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러자 이마를 짚었던 것이 뺨을 감싸며 내 아래턱을 지그시 눌렀다. 이윽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것이 닿았다. 열 때문에 목이 말랐는지 약간의 물기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쯥, 쯥, 물기를 빨다가 입 안에 고인 것을 삼켰다.

옳지. 누군가가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꿈인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반복되는 그날, 그 사고 당시의 기억만 아니라면.

나는 조금 전 입술에 닿았던 물컹한 것을 다시 물었다. 주름진 미간도 차츰 느슨하게 풀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수연이 내 손등에 꽂혀 있는 링거 바늘을 제거하던 중이었다. 내 몸 상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니, 아픈 것도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오랜 병원 생활 덕분에 익숙한 상황이지만 이제는 너무 지겨웠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를 훨씬 넘긴 시간. 아프다는 핑계로 늦잠을 과하게 잤나 보다.

“수연 씨. 나 물 좀…….”

수연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수액 덕분일까. 체기는 사라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수연에게 건네받은 물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이제 열도 내린 것 같고. 간밤에 식은땀도 많이 흘렸을 테니 좀 씻고 싶었다.

침대 옆에 서 있던 수연을 보고 뭐라 말하려다, 문득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어제 입고 잤던 옷이 아니었다.

“……옷은 내가 갈아입어도 되는데.”

새삼 멋쩍어 내뱉은 말에 수연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가 갈아입힌 게 아닌가. 다른 도우미가 그런 걸까. 그렇다기엔 침실까지 들어와 손수 내 옷을 갈아입혀 줄 사람은 수연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딱히 중요한 논점은 아니었다. 모르는 척 입을 다물자 수연이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네. 한결 낫네요.”

“다행이에요.”

“어제 저녁 먹은 게 잘못됐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이랑 둘이서 먹었거든요. 그것도 마주 앉아서. 안 아픈 게 이상하지.”

책임을 지건호에게 지우자 수연이 살짝 웃었다. 일부 공감한다는 미소였다. 수연도 지건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그 답답함을 모르는 건 아닐 터였다. 물론 어제 저녁은 그와 마주 앉았다는 사실보다 그와 나눈 대화가 더 문제였다마는.

“많이 걱정하셨어요, 본부장님께서.”

“그럴 리가. 그 사람은 나 아픈 줄도 몰랐을 텐데요.”

아니지. 수연이 출근 후 내 상태를 보고했다면 알 수도 있겠네. 간단한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드렁한 내 태도가 이상했던지 침구를 정리하던 수연이 말을 덧붙였다.

“밤새 간호하신 것 같던데요. 본부장님께서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머리를 묶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팔을 내리자 머리카락이 가슴께를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수연에게 되물었다.

“지건호 씨가 나를?”

“네. 잠도 여기서 주무신 것 같아요.”

“설마요.”

그러나 수연은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냐는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아. 뜻하지 않은 소식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리 살가운 부부는 아니라지만, 남편과 동침했다는 이야기에 정색을 해도 이상할 것 같았다.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자 수연이 알 만하다는 듯 말을 더했다.

“저한테 일찍 출근해서 사모님 살펴보라고 당부한 것도 본부장님이신걸요.”

“……자기 때문에 아픈 건 용케 알았나 보네요.”

“본부장님, 겉으로는 내색 잘 안 하셔도 사모님 많이 위하세요.”

“…….”

“다정하고 섬세한 분이세요. 사모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요.”

나는 수연의 말을 등진 채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말이 길어지면 또 나를 탓할 게 뻔했다. 이 집 사람들 특징이 그렇다. 내가 기억을 잃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원인은 나한테 있지 않냐는 식이었다. 그들에게 지건호는 인품도 훌륭한 고용주고, 난 스스로 가시만 세운 고슴도치 같은 존재였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세수부터 했다. 찬물을 끼얹자 어질러진 기억도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지난 새벽 내 이마에 닿았던 게 진짜 지건호의 손이었나. 아픈 건 어떻게 알았지. 내 옷도 그럼 그가 갈아입혔던 걸까.

무시로 일관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짓까지 한단 말인가. 수연의 말대로 지건호는 다정하고 섬세한 인간이니까?

허, 거울을 보며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다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적어도 지금 나에게 지건호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냥 내 몸을 원했던 건지도.

나는 내 쇄골 언저리에 그가 새겨넣은 붉은 흔적을 감추며 이를 악물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사모님.”

“사모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인사를 받는 대신 그들 옆에 선 지건호를 쏘아봤다.

어제보다 더 빨리 퇴근한 그는 새로운 얼굴과 함께 집에 들어섰다. 새로운 도우미였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짓일까. 날 대놓고 곤란하게 만들 셈인가. 기존에 일하던 도우미들도 아직 내 옆에 있었기에 민망함이 얼굴을 홧홧하게 데웠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도우미 두 명이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내려다보던 지건호가 내게 눈짓했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냐며, 어서 인사하라는 뜻이다.

섬세 같은 소리 하네. 웃기고 있어. 섬세한 놈은 다 얼어 죽은 모양이지.

“표정이 왜 그래? 네 부탁대로 너 모르는 새로운 사람 들인 건데.”

“…….”

“왜, 이 사람들도 별로야? 또 바꿔 줘?”

“그런 게 아니……. 당신 잠깐 나 좀 봐요.”

나는 내게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 속에서 눈치를 보다가 그의 손목을 낚아채어 침실로 이끌었다. 사람들 보는 데서 뭐라고 말해 봤자 내 손해일 게 뻔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걸어 잠그고는 행여 바깥으로 소리가 샐까 침실 구석, 드레스룸으로 그를 몰았다.

“지금 무슨 속셈이에요?”

“아프다더니 이제 살 만한가 보네.”

“저 사람들은 뭐야, 갑자기?”

“오늘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어?”

“저기요. 지건호 씨.”

따로 놀던 대화가 그제야 멈췄다. 그는 상당히 피곤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 바꿔 달라면서. 그래서 바꿔 줬잖아, 당장.”

“그쪽이 불편해서 싫다면서요.”

“네가 싫다며. 생각해 보니까 같이 시간 보내는 건 넌데, 너무 내 입장만 고수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생색내는 법도 가지가지였다. 아니 이건 생색이 아니라 보란 듯이 날 엿 먹이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눈앞에서 대놓고 바꿔버리면 전에 있던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재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아마?”

“이봐요, 지건호 씨.”

“너무 신경 쓰진 마. 이미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오늘도 사모님이 또 사모님 같은 짓 했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구는 태도가 마뜩잖았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 손목을 잡고 있던 내 손을 가볍게 움켜쥐며 손목을 빼내었다.

“도대체 왜요? 내가 그 사람들한테 뭘 어떻게 했길래요.”

“글쎄.”

마치 불결한 것이 닿기라도 한 듯 손목을 가볍게 털어낸 지건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기에는 이미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몰라 나는 좀 두려웠다. 과거의 내가 정말 고용인들을 상대로 패악질을 부렸다면 어떡하지. 기억도 안 나는 일을 가지고 이제 와 사과를 해야 하나. 그러긴 싫은데.

나는 언젠가부터 기억을 잃기 전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기억을 찾은 나의 몫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껍데기뿐인 책임을 지고 싶진 않았다. 그건 지건호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다소 무거운 눈길이 내 코끝에 걸렸다. 나는 그의 시선에 눌려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삼킨 건지 그의 목울대도 한 차례 크게 꿀렁였다. 그렇게 제법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 얼굴을 느릿하게 훑던 그가 말했다.

“그냥 시샘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남편 잘 만나 호강한다고.”

썩 재밌다는 어조였다. 이 와중에 제 자랑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나랑 장난을 치고 싶은 건가. 그러나 그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가진 거라고는 그나마, 봐줄 만한 외모밖에 없으면서.”

그래 놓고는 본인도 그 외모에 홀리기라도 했다는 양, 그는 내 목을 따라 제 시선을 주르륵 미끄러뜨렸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순간 그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무슨 짓인지 물어볼 여유도 없이 한쪽 어깨 언저리가 훤히 다 드러났다.

그는 내 쇄골께에 그려넣은 제 흔적을 엄지로 툭툭 두드리고는 살짝 쓸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건호는 이미 간파한 것이었다. 내가 지난밤 일을 온전히 기억을 하든 못 하든,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을.

침묵 속에서 시간만 흘렀다. 내 얼굴로 흘깃 시선을 준 그가 옅은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제가 끌어내린 내 옷을 추어올린 뒤 나와 눈을 맞췄다. 애초에 내가 먼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는 뒤늦게 내게 응답한 것이었다.

지금 날 떠본 건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지건호는 어떤 반응을 원하는 걸까.

우리는 가만히 눈을 맞춘 상태로 서로의 의중을 살폈다. 정적을 먼저 깨뜨린 건 그였다.

“쉬어.”

지건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저녁은 따로 먹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드레스룸을 지나 침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바보같이 입만 다물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에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내뱉었다. 그가 남기고 간 쌉싸름한 향이 그제야 코끝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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