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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8)화 (8/60)

| 8화

나는 내가 미쳤다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했다. 갖고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공백이었고, 조각난 기억마저 억지로 엮은 상태에서 그렇게 합리화라도 하는 게 마음 편했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면 그 어떠한 행동을 해도 설득력을 얻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거기서부터 잘못됐던 것이다.

왠지 모를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불쑥불쑥 화가 들끓고, 모두를 의심하며 날을 세웠지만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관대했던 것부터가.

곧바로 방을 나선 그를 뒤쫓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이럴 거면 날 왜 데려온 거냐고. 내게 원하는 게 뭐냐고.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만 보면 날을 세우는 건지 묻고 싶었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땐 그는 이미 2층으로 사라진 뒤였다. 상관없었다. 난 주저 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기억을 잃은 나로서는 처음 오르는 계단이었다. 몇몇이 놀란 눈으로 날 지켜봤고, 김수연과도 눈을 마주쳤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내 행동을 묵인했다.

이 집은 층고가 꽤 높은 편이지만 다소 어두운 인테리어 탓인지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계단 쪽 벽면으로는 두 개의 층을 통으로 유리창을 내어 개방감을 주었는데, 계단을 오르내리며 정원을 단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나는 꺾어진 계단을 반쯤 오르다가 잠시 멈춰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계절이라 하늘이 아직 밝았다.

이 시간에는 거의 밖을 내다보지 않았던 탓일까. 늘 보던 시야가 조금 기울었을 뿐인데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꾸 높은 곳을 찾게 되는 건지. 제 발 아래 세상을 둔 지건호의 시선이 늘 삐딱한 것도 다 이 이유인가 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문득 시선을 잡아채는 게 있어 다시 몸을 돌렸다.

‘봤어?’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던 목소리. 정원에 있는 날 보고 순간 놀란 듯했던 그의 표정.

아, 지금 생각해 보니 저거였나 보다. 나무, 솔.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어제 봤던 그 묘목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1층에서 생활할 때는 몰랐는데 이곳에서 보니 한눈에 들어오는 나무였다. 지건호는 매일 새벽 계단을 오르내리며 저 어린 나무를 지켜봤겠지. 이름까지 붙여 줄 정도니 대단한 애정을 가진 게 분명했다.

솔이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그와 어울리진 않는다며 고개를 젓고는 계단을 마저 올랐다. 누군가 아래에서 발목을 잡아채는 느낌이었지만 이왕 올라온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2층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니, 깔끔했다기보단 되레 허전함을 느낄 만큼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다. 마치 내 머릿속처럼.

1층과 중정을 공유하는 거실이 하나 있었으나 그는 방에서만 지내는 듯 방 밖에는 작은 소파조차 두지 않았다. 거실 창은 모두 커튼을 쳐서 어두컴컴했는데, 그 때문에 제법 넓은 공간인데도 숨이 막혔다. 나는 2층을 가볍게 눈으로 훑고는 그가 있을 법한 방을 찾았다.

문은 총 다섯 개. 외부 화장실 위치야 1층과 비슷할 것 테니 나머지 문을 하나씩 열어서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사실 이쯤부터는 그를 찾는 것보다는 2층에 뭐가 있을지 궁금증이 더 앞섰다. 예전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도 들었으니까.

딱히 고민할 것도 없이 거실 오른쪽을 향해서 발을 뗐다. 먼저 보이는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다. 지금 마음으로는 그가 이 방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내는 곳은 아닌 듯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숨을 작게 내뱉고는 방을 훑어봤다. 2층 거실처럼 아무런 짐도, 흔적도 없는 공간. 그럼에도 먼지 한 톨 없는 걸 보면 청소는 꼬박꼬박 하는 모양이었다.

문을 닫고 그 옆방으로 향했다. 지건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나 싶어 문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도 아닌가. 노크를 하려던 손을 그냥 손잡이로 내려 돌렸다.

이번엔 먼저 들어갔던 방보다 조금 더 넓은 공간이었다. 겨울에는 햇빛이 제법 깊숙하게 들 법한 따뜻한 곳. 마찬가지로 텅 빈 방이었으나 나는 뭔가에 이끌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다 정리해 버린 것처럼 아무 짐도 남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냥 비어 있던 공간은 아니었을 거라고.

누가 쓰던 방이었을까. 어딘가 익숙한 걸 보니 나도 예전에는 종종 여기에 머물렀을까.

제대로 앓지도 못할 추억을 되새기는 꼴이었지만, 내 직감이 틀린 것은 아닌 듯했다. 방 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생활감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가령 어딘가에 찍혀 실크 벽지가 작게 뜯긴 자국이라든가.

나는 그 자국을 엄지손톱으로 살짝 밀어내듯 긁으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서자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벌써부터 이런 걸 사면 어떡하자는 거야. 게다가 이리 비싼 걸. 건호 씨 바가지 쓴 거예요, 완전.’

‘지원아. 너 지금 내 돈 걱정 해 주는 거야?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낭비라는 거지. 얘기 들어보니까 얼마 쓰지도 못한다던데.’

‘뭐가 낭비야. 난 너한테 쓰려고 돈 버는 건데.’

‘웃겨. 말은 똑바로 하시죠, 지건호 씨. 나한테 쓰는 거 확실해? 이것도, 저것도 다 내 건 아닌데?’

‘아……. 들켜 버렸네.’

감은 줄도 몰랐던 눈을 번쩍 떴다. 기억 속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여전히 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지건호는 내게 멋대로 추측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 사이가 예전에는 지금만큼 엉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연에게 들은 것만 해도…… 아니,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만 가지고도 알 수 있었다. 그와 나 사이의 애정이 헛된 것은 아니었단 걸. 그것이 비록 현재 진행형은 아닐지언정.

나는 방 안을 가득 메운 그의 목소리를 좇다가 벽에 남은 흔적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가구에 부딪혀 긁힌 듯한 흔적이다. 때마침 떠오른 기억에 의하면, 아마 이 자리에 그가 준비했던 게 있었던 것 같고.

……그래, 있었지. 맞아. 이쯤에 두었던 게 있었다. 몸에 좋은 수입산 원목이니 하는 말에 꼬여서 그가 제값보다 비싸게 주고 사 왔던, 주책이란 소리에도 그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서 자랑하던 게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타박하면서도 그가 없는 시간에는 이곳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고. 때때로 우리는 이 방에서 몸을 섞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던 아기 침대를 보면서.

“여기서 뭐 해.”

나는 놀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도 못 느꼈는데, 옷을 갈아입은 지건호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새 샤워라도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상태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덜컥 겁부터 먹고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뭐 하냐니까. 빈방에서.”

그는 마치 제 공간을 침범했다는 양 내 얼굴을 차갑게 훑었다. 사실상 자신을 키운 거나 다름없던 창원댁마저 자기 공간에 들이기 싫어하던 지건호가 아니던가. 나 역시 그에게는 남과 다름없는 존재일 터였다.

좋게 말하면 불청객, 나쁘게 말하면 침입자, 그 정도겠지. 내가 기억을 잃은 이상은.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말.”

“…….”

“무슨 말인데 여기까지 올라와.”

대답을 재촉하는 듯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 할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밖이 제법 어두워졌는지 창문 사이로 들어오던 빛도 조금씩 색을 잃기 시작했다.

“물었잖아, 지원아.”

말없이 입술을 다물고 있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아. 어떡하지. 머리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른 걸 떠올릴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어.

아니, 아무도 내게 이런 말은 해 주지 않았잖아. 김수연도, 창원댁도.

아니, 아니. 병원에서도 그런 말은 없었어. 바보같이 나는 여태 아무것도 몰랐어. 아기가 있었는데. 내가 품은 내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 침대를 허공에서 매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그를 보고 물었다.

“이 방, 누가 쓰던 방이에요?”

목소리가 떨릴까 걱정됐지만 그러진 않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창문을 등지고 있어 그런지 다행히 지건호는 내 어색한 표정을 눈치채진 못한 듯했다.

그는 뜻밖의 질문이라는 것처럼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을 쓸었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피하면 내 머릿속을 다 들켜버릴 것 같았다.

“그런 게 갑자기 왜 궁금해?”

뼈가 있는 질문이었다. 난 별거 아닌 이유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갖다 붙였다. 그냥, 볕이 잘 들 것 같은 방인데 이대로 비워두긴 아쉬워서 그렇다고. 변명이 통했는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보다시피.”

“…….”

“빈방이잖아.”

“…….”

“쓴 적 없어, 아무도.”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엄지손톱으로 다른 손을 꾹 누르며 의문을 삼켰다. 굳이 확인하지 알아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제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가 이 세상에 한때나마 존재했다는 사실까지 지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지건호뿐만 아니라 이 집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작정하고 숨기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꼭 날 위한 건 아닐 것 같지만. 지금 와서 내가 일부 기억이 떠올랐다는 걸 밝힌다고 해도, 그들은 그런 일 없었다며 발뺌할지도 모른다. 그날 그 사고 운전자가 따로 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할 말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방을 흘깃 둘러본 그가 내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마치 제가 더 이상 들어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처럼, 일부러 경계선을 만들고 넘어오지 않는 듯했다.

나는 방 안으로 겨우 끝만 들이민 그의 슬리퍼에서 시선을 끌어올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단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척.

“혹시 내가…….”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입은 따로 놀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뒷말을 끊었다. 지금 그에게 물어본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또 약이나 먹으라고 하겠지.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내 기억이 전부가 아닌. 산부인과를 가서, 진료받은 기록이라도 확인한 후에…….

아니, 아니야. 내가 정말 잘못 기억할 수도 있잖아. 그의 말대로 나는 아직 정상이 아니고, 나는, 나는. 그러니까 나는.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하잖아.’

……어째서 그런 걸 하나 기억 못 해. 어째서! 아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나 좋자고 그걸 잊어.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나만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뻔뻔하게. 어떻게!

“왜 말을 하다 말아.”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으나 속으로 눌렀다. 지건호가 내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게 아이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그의 얼굴 위로 다시금 기억 속 목소리가 겹쳐졌다.

‘일단은, 내 말대로 하세요.’

‘김 실장은 계획대로 처리만 해 주세요.’

‘아, 지원이 가족들은.’

일단은 지건호가 수연에게 지시한 계획이 뭔지 알아야 했다. 내 가족에 대한 것도.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시간을 최대한 빼앗아야 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는 애써 호흡을 다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제 내가, 별로예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2층에서 혼자 지내는 거 지루하지 않나 해서요.”

그는 여전히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심심하면 내려오라고요. 어젯밤처럼.”

“…….”

“아예 내려와서 지내도 좋고.”

“너 무슨 수작이야, 갑자기.”

“그냥. 간만에 당신 혼자 재미 좀 본 것 같은데 나는 기억이 끊긴 게 좀 억울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다 보니 적응도 되는가 보다. 그가 날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꽤 태연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생각 있으면 내려와요. 그래도 명색이…… 부부잖아. 한때나마 사랑했던.”

나는 과거의 지건호를 모른다. 그리고 지건호 역시 지금의 나를 모를 것이다. 그가 감춘 진실을 알게 되는 날까지 우리는 서로를 속이면서 살겠지.

그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난 어차피 정상이 아니었다. 아기를 잃고, 뻔뻔하게 그 기억마저 잃어버린 미친 여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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