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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9)화 (9/60)

| 9화

지건호가 날 찾은 건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방을 찾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2층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며, 들어오긴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일 때문이라기엔 의도가 다분했다. 지건호는 가급적이면 나와 더 이상 얼굴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내 말을 또 무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기분이 썩 나쁜 건 아니었다. 나 역시 그가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시간을 빼앗을 생각으로 저질러버린 말이었지만, 막상 그가 날 찾아올까 두려워 며칠 동안은 깊게 잠들지도 못했다.

나는 일부러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다. 그가 설정한 행동반경 안에서 움직이며, 특별히 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지건호의 계획이 무엇인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건 아직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대체로 내 하루는 김수연의 출근과 함께 시작되고, 내 하루가 끝나야 그녀가 퇴근한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이 수연과 함께였는데, 말하자면 그녀는 내게 족쇄와도 같은 셈이었다. 어디 수연만 그럴까. 지건호는 내 곁에 없었지만 그의 눈과 귀를 대신할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뭐라도 찾아내려면 어떻게든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외출은 물론이고 휴대폰을 빌려 사용하는 것마저 수연의 감시하에 있었다. 인터넷 검색 기록도 확인할 게 뻔했다. 지건호에 대해 검색했던 것도 나중에 수연에게 들키지 않았던가.

달리 묘수가 없었다. 사고가 정지한 기분이다. 기억이 일부 돌아왔음에도 이제는 나도 뭣 때문에 화가 났고, 어딜 향해 분노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집어삼키는 약 때문일까. 들끓었던 감정도 나날이 희미해졌다.

내게 아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이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수연이 내 손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나 보다. 난 무기력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무슨 걱정거리라도.”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좀…… 입이 심심해서.”

되지도 않는 변명에 수연이 작게 웃었다. 간식이라도 드릴까요, 하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하려다가 문득 생각이 스쳤다.

“먹고 싶은 게 있긴 한데.”

“말씀하세요.”

“왜, 병원에 있을 때 수연 씨가 한 번씩 파니니 사 왔잖아요.”

“연락해서 사 오라고 할게요.”

수연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리고는 누군가에게 바로 연락하려는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 이 시간엔 너무 늦었지. 가게 문도 닫았을 것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직접 가서 먹는 건 어때요?”

급히 그 손을 막으며 묻자, 수연이 눈을 살짝 키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의도인지 살펴보려는 눈빛이었다.

“내일요?”

“당장 내일 먹으러 나가자는 게 아니라, 언제든요. 바깥바람도 쐬고 싶고, 사람 구경도 하고 싶고. 또 나간 김에 병원도…….”

아니다. 지금 병원에 가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게 뻔하다. 산부인과 진료 기록이 그 병원에 있을는지도 모르겠고, 또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 제대로 알려줄지 미지수였다. 이미 그가 손을 써 버린 뒤라면…….

“내 말은, 병원 검진도 미리 받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때 언제 또 오라고 했었죠?”

“3개월에 한 번씩이니 아직 많이 남았어요.”

아. 3개월. 까마득하다.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검사가 필요하다거나. 아니면 혹시 무슨 기억이라도…….”

“그런 건 아니에요.”

수연의 말을 재빨리 끊었다가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인사는 제가 다 드렸어요.”

“……그냥 병원에 있을 때가 한 번씩 생각나네요. 그, 가지 파니니도 그렇고…….”

“사모님. 꼭 파니니가 아니라 어디든 외출, 하시고 싶은 거죠?”

그래도 그동안 헛되이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아닌 듯, 수연은 내 의중을 정확히 짚었다. 역시 눈치도 빠르고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건호도 수연을 신뢰하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입술을 다물었다. 일단 어디로든 집 밖으로 나가야 내 행동반경도 넓어진다. 그럼 이 답답한 사고의 제약도 풀릴 테고.

“대표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요.”

지건호가 과연 허락해 줄까. 그는 날 가둬놓은 건 아니라고 했지만 막상 외출한다고 하면 어찌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도 내 외출까지 막을 정당한 핑곗거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를 붙인다면 그걸 빌미로 병원에 가 보겠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도 많이 늦을 건가 봐요, 그 사람은.”

나는 소파에 몸을 묻다시피 기댄 채로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벌써 어둠이 짙게 내린 시간,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데 지건호는 아직이다.

“오늘 길우회 참석으로 늦으실 거라는 보고 받았습니다, 사모님.”

길우회든 일우회든. 그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연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어느새 제 손에 든 서류에 다시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다른 고용인들은 이미 한참 전에 퇴근하고 없었다. 그러니 수연만 없다면, 지건호가 퇴근하기 전까지 2층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지내는 방이라도 잠깐 둘러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그가 단서를 뻔한 곳에 남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수연을 일찍 보내려면 자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나 오늘따라 눈이 말똥말똥했다. 평소 같았으면 잠이 슬슬 쏟아질 시간인데. 역시 약이 문제였다. 오늘 저녁은 수연이 건넨 약을 혀 아래에 두고 삼키는 척만 했기에 약효가 들지 않는 것이다.

“수연 씨도 이제 퇴근해요. 나도 그만 자러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약을 먹지 않았다는 걸 내색하면 안 되었다. 나는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내가 잠든 것만 확인하면 수연도 퇴근할 테니 잠시 자는 척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계획은 보기 좋게 첫 단추부터 틀어졌다. 마침 지건호의 차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려온 것이다.

“본부장님 들어오시네요.”

아, 왜 하필. 이렇게 마음먹은 날 일찍 들어오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지건호의 이른 등장에 화가 불쑥 솟구쳤다.

짜증을 삼키며 그를 피해 먼저 방으로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일단 멈추어 섰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가 수연과 뭔가 얘기를 나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를 환대하는 것도, 박대하는 것도 아닌 자세로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어, 김 실장님 아직 퇴근 안, 아! 사모님도 계셨…… 본부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지건호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 참, 별꼴을 다 본다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꼴을 지켜보다가 그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퇴원하던 날 마지막으로 봤던 신상윤이었다. 상윤이 괜히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오늘 좀 과음하셨거든요. 길우회만 가셨다 하면 항상 이러세요. 멀쩡한 사람도 고주망태로 만들어서는. 아무튼 그놈의 국회의원들이 문제…….”

“상윤 씨.”

상윤 딴에는 변명을 해 주는 것이었지만 수연이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입단속을 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얘기인가 싶었으나 신경 쓰진 않았다. 지금은 저 커다란 인간을 어떻게 방으로 들일지가 더 문제였다.

“사모님, 어떻게 할까요?”

난 뭘 묻는 건지 몰라 수연을 돌아봤다. 그러자 수연이 내게 대답하는 대신 상윤에게 물었다.

“상윤 씨, 본부장님 2층까지 업을 수 있겠어요?”

“네에? 제가 본부장님을 2층까지요? 그냥도 힘든데 술 취한 사람을, 제가 무슨 수로, 제가 어떻게. 저는, 저는 아무리 야구 선수 출신이라지만 본부장님처럼 몸이 좋지도 않고 또…….”

하늘이 무너져도 이 같은 표정은 안 나올 것 같았다. 곧 죽어도 못 하겠다는 상윤에게 그럼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렇게 말하면 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한숨을 작게 내쉬며 그들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그냥 1층 침실로…….”

그러나 찰나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지건호가 상윤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됐다는 듯, 알아서 하겠다는 식으로 손을 들어 보인 그는 술 냄새에 전 몸을 이끌고 계단으로 향했다.

비틀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보니 저대로 계단을 오르는 건 무리일 듯싶었다. 복도를 지나는 벽마다 그 큰 몸을 쿵쿵 부딪치는 꼴이 나름 안쓰럽기도 하고. 이대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간 제 직원들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수연과 상윤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퇴근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둘만 남은 공간.

내게는 지금이 기회라고 봐야 했을까. 침을 꼴깍 삼키며 그가 남긴 술 냄새를 뒤따랐다.

지건호는 와중에도 날 피하고 싶었던 건지, 기어이 계단을 오를 생각인 듯했다. 그래, 뭐. 올라가고 싶으면 가라지. 다치든 말든.

그러나 잔뜩 날을 세운 마음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를 비호하며 같이 계단을 올랐다.

“더 올라갈 수 있겠어요?”

지건호는 겨우 몇 계단을 오르고는 주저앉았다. 도대체 무슨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후우, 내뱉는 숨에 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따라 그의 어깨 위로 납덩이를 올려놓은 듯 힘이 없어 보였다.

“지건호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리 1층으로 가서 자요.”

“……야지.”

“뭐라고?”

“씻어야지…….”

그는 남은 정신을 쥐어짜듯이 인상을 구기며 입술을 뗐다.

“더러운, 새끼들 만났으니까.”

“……누구더러 더럽다는 거야.”

“있어. 전에 내가, 말했잖아……. 채영환 그 새끼. 하…… 그 새끼가 이번……, 고도 제한 풀겠다고, 좆같이 아주, 후우…….”

뭐라는 거야 정말. 웅얼거리는 통에 무슨 소린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 지건호도 술에 취해 제가 무슨 소리를 내뱉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대로 그를 재우기만 한다면 나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이 제대로 된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 꺼진 2층을 흘깃 쳐다보고는 그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일단 그를 침대에 눕히고 볼 심산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1층으로 가서 자요.”

“……씻고, 씻어야지……. 더럽잖아, 지원아.”

“그래요. 가서 원하는 대로 씻고 자요. 그러니까 일단 일어나 봐요, 얼른.”

그를 일으키려고 팔뚝을 잡았다. 하지만 고집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리 무거운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개 역시 추를 매단 것처럼 자꾸만 아래로 기울었다.

“지건호 씨. 일어나 봐. 응?”

내 타박에도 그는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투정을 부리듯 내게 고개를 붙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몸을 떼자 그가 내 허리를 잡아서는 제게로 바투 당겼다.

“지금 무슨 짓을…….”

“……지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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