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후. 그가 내쉰 숨이 아랫배를 간질이며 흩어졌다. 술기운을 핑계 삼은 행동일까. 한숨 끝이 축축했다. 머리를 기댈 곳이 있어 편안해졌는지 그가 쓰게 웃었다. 지원아, 지원아. 그의 숨결을 따라 내 이름이 툭, 툭, 어두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찾는 지원이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일의 그가 지금 일을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밀어내려던 손으로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게 닿는 손길이 낯설지만은 않은지 크게 들썩이던 그의 몸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지원아, 지원아. 연신 내 이름을 부르던 그는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시답지 않은 술 투정인가. 괜한 걸 받아주나 싶어 내 허리께에 있는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그가 내 품에 얼굴을 묻으며 더 기대어 왔다.
술 취했을 땐 이런 모습이구나. 어리광도 피우고. 기억은 없지만 왠지 낯설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는 이 정도로 취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술에 취한 지건호를 어르면 뭐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난 기억 속 내 모습을 끄집어내어 그에게 대꾸했다.
“건호 씨.”
“응.”
“술 많이 마셨어요?”
“……미안, 미안.”
“나한테 미안할 건 아니지. 속 버릴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해.”
“솔……. 그래야지. 솔직하게.”
내 말을 따라 되뇌던 지건호는 뭐가 웃긴지 혼자 큭큭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제대로 취한 게 틀림없었다.
“언제…… 였어요?”
“뭐가.”
“우리, 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띄엄띄엄 대답은 곧잘 하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는 여전히 힘에 부치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몸을 뒤로 누이듯 계단에 기대었다. 머리가 뒤로 쿵, 떨어지며 계단을 가볍게 찍었다.
지건호는 턱을 위로 치켜든 채 천장을 향해 후, 한숨을 내쉬었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아래로 거칠게 추락했다.
그렇게 내 질문을 한참 곱씹는 듯했던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바로 했다. 느슨하게 풀린 시선이 비스듬히 내게 향했다. 그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얼굴을 빙글빙글 훑으며 되물었다.
“……우리, 아이?”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투였다. 피식, 자조하며 내뱉은 웃음이 옅게 흩어졌다. 이 반응은 뭘까. 대답하지 않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맥이 뛰는 소리가 커지는 듯했다.
“지원아.”
느릿느릿, 힘겹게 감았다 뜨던 눈꺼풀도 이제는 아예 접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내 이름을 불렀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묘하게 내 신경을 긁으면서 형체 없이 사라졌다.
“지원아.”
“…….”
“부르잖아, 내가.”
“왜.”
짧은 대답에 그의 단정한 입술 끝이 휘었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입술은 술기운 때문인지 유난히 붉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옆으로 길게 늘어났던 입술도 제자리를 찾았다.
이어 눈을 뜬 그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들었다. 뒤로 점점 기울어진 고개는 결국 계단에 또 부딪히고야 말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버석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그의 눈매에도 찬바람이 일었다.
지건호는 내 얼굴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옷 때문에 미처 닿지 못한 손가락은 허공에서 툭 아래로 떨어졌다. 스스로도 웃긴 듯 소리 내어 웃던 그가 할 수 없다는 듯 내 허리를 잡으며 뒤로 기울어진 상체를 바로 일으켰다. 이내 내 배에 제 얼굴을 붙인 그가 말했다.
“지원아.”
“왜 자꾸 불러.”
“우리 지원이. 대답도, 후우, 잘하고…….”
“…….”
“참, 뻔뻔하다. 그렇지?”
나지막이 내뱉는 목소리가 내 몸을 타고 진동했다. 취기 어린 한숨이 빙글빙글 내 배를 감쌌다.
그는 이 대화를 기억할까. 만에 하나 기억하게 된다면, 나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지건호는 또 뭐라고 할까.
모르겠다. 그가 지금 어떤 기억을 헤매고 있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내게 다시 기대어 오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 *
내가 미쳤지. 달밤에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체감으로는 소 한 마리를 끌어다가 침대에 눕힌 것 같았다. 밖에서 뭐 대단한 걸 먹고 다니길래 이렇게 무거워. 간만에 힘을 써 근육이 놀란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무르면서 지건호를 바라봤다.
지건호는 뻔뻔하다느니 하는 말로 날 어이없게 만들고는, 또 웬 불만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긴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대답을 들을 수 있었겠냐마는.
마음 같아서는 계단에서 쓰러져 자든 말든 그냥 두고 싶었는데, 그래도 내가 마음이 영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그를 부축해 어찌저찌 침실까지 끌고 오긴 했다.
괜히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나. 뻐근한 어깨를 뒤로 두어 번 돌린 후에 그를 흔들었다.
“지건호 씨. 일어나 봐요.”
“…….”
“씻겠다며. 바로 누워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그대로 엎어진 상태였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뻔뻔하다는 거야. 침대 한중간에 뻗어버린 지건호를 다시 툭툭 건드려봤으나 그는 벌써 곯아떨어진 듯 미동도 없다.
일어나 씻으라고 깨울까. 아니다. 그냥 이대로 자게 두는 게 낫겠지. 그래야 내가 편히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던 엉덩이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막상 누군가의 통제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탈출을 시도한 것도 아닌데 고작 이런 일로 맘 졸일 것까진 없진 않나.
……아, 탈출. 탈출을 할 수도 있겠구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렇게 무방비한 상황이라면 도망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사고 당시 그날처럼 말이다. 나는 생각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당장 갈 곳도 없을뿐더러 아직은 도망칠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기억을 찾는다면, 과거를 전부 되찾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면. 내가 감당 못할 비밀이 있는 거라면 그때는.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떠나야 하나. 어떻게. 어디로. 애초에 도망치는 게 가능은 할까.
‘지원아.’
기약 없는 계획을 끊은 건 그의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러나 잘못 들은 모양인지 지건호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상태였다.
설마 깬 건 아니겠지.
굳은 상태로 몇 초 동안 그를 지켜봤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며 발을 떼려는데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등 뒤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무시하기엔 제법 큰 소리였다. 어떡하지. 그냥 나갈까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지건호 씨. 괜찮아요? 속 안 좋아?”
그를 돌려 눕히자 술 냄새가 확 번졌다. 스스로도 불쾌하다는 양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는 목이 갑갑한 듯 넥타이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힘이 빠진 손은 자꾸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의 손을 치우고는 넥타이를 대신 풀었다. 느슨해진 넥타이 아래로 셔츠 단추까지 몇 개 풀어주자 그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어우, 술 냄새. 왜 이렇게까지 마신 거야.”
그는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불편할 텐데 옷이라도 갈아입지. 양말이라도 벗겨줄까. 그의 발을 보자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머리에 스쳤다.
‘발,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가 따로 있나. 사고 후유증을 묻는 거라면 불편한 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날 과하게 보호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내가 봤던 환영, 그 피투성이 발과 관련된 걸까. 기억의 단서라도 찾으면 좋으련만, 그 환영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건 그게 전부라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그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지만 그는 꽤 깊게 잠든 듯,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뭐가 불만이라 잘 때도 늘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자는 건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어 주름 잡힌 미간을 검지로 쓸었다. 손가락 옆으로 짙은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더니 뜨거운 숨이 손바닥에 닿았다가 금세 흩어졌다.
나는 그 숨을 그러모으듯이 손을 오므리며 잠든 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어떻게 봐도 참 보기 좋은 얼굴이었지만 눈을 감고 있으니 지건호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이목구비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는데, 잠든 걸 보니 제 아버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래서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 말이 있는 건가.
……우리 아이도 그랬을까, 그럼.
만약 온전히 태어났다면, 우리 아이는 누굴 닮았을까. 이왕이면 그를 닮은 아들이면 좋았겠다 싶다. 아니, 딸이었대도 제 아빠를 닮았다면 시원시원한 인상이어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고 전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겠지. 깨진 미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허상 같은 생명을 붙들고.
‘우리, 아이?’
지건호는 왜 그렇게 되물었을까. 술에 취한 와중에도 감히 제게 그런 걸 묻냐는, 오만한 뉘앙스였다. 어쩐지 재수 없어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자존심도 없이 그의 얼굴을 탐하던 손가락은 그냥 등 뒤로 감춰버렸다.
이제 그만 계획대로 해 볼까 싶어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그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