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생각보다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재빨리 휴대폰을 꺼낸 뒤 그의 손가락을 갖다 대어 잠금까지 해제했다. 지문 인식이라 다행이었다.
고작 휴대폰 하나 열었을 뿐인데 심장 뛰는 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듯했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통화 기록부터 살폈다.
제일 최근 기록은 신상윤. 그 밑으로는 김수연, 그 외 회사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태산이라는 이름을 앞에 붙이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언론사 국장, 국회의원 비서실, 병원장 등등이 자리를 차지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액정을 계속해서 쓸어 올렸지만 별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전 기록은 삭제했는지 지난 며칠 동안 기록이 전부다.
이 정도로는, 단순히 통화 기록만으로는 뭘 알아내기가 어렵다. 그럼 사진을 확인할까. 앨범에는 뭐라도 있지 않을까.
잠든 지건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앨범 앱을 열었다. 역시 사진 찍는 걸 혐오하는 지건호다웠다. 그는 제 얼굴이 나오는 사진도 싫지만 직접 찍는 것도 싫어하는 듯했다.
앨범에 있는 사진은 총 26장. 그마저도 모두 업무 관련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다못해 내 사진도 하나 없단 말인가. 앨범 휴지통까지 뒤졌으나 성격답게 깔끔히 비워진 상태였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잠든 사이 뭐라도 찾아내고 싶은데. 애가 탔다. 앨범을 닫고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업무 보고 메시지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확인 부탁드린다는 말에 단답형 메시지가 전부였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나. 업무용 휴대폰일까. 다른 휴대폰이 또 있는 거라면 그건 어디서 찾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대책도 없이 그러길 몇 번. 어떤 메시지에서 직감적으로 눈이 멈췄다.
[제보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보낸 메시지. 지건호는 아무 답장도 하지 않았지만 잘못 보낸 메시지는 아니었다. 그 이전 메시지에는 내 이름이 들어 있었으니까.
[신지원 신원 확인. 상대 남자 것도 확보했습니다.]
시선을 올려 수신 날짜를 확인했다. 이때라면 내 사고가 있던 시기와 맞물린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던 거야. 내 신원을 왜 확인하지. 상대 남자는 누굴 말하는 거고.
남자. 설마 나한테 남자가 있었던가. 그래서 도망을, 그래서 지건호가 내게…….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당치도 않은 생각에 쓰게 웃으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하려는데 조각난 기억이 불쑥,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제대로 말해. 두 번은 안 물어.’
‘보다시피, 보이는 그대로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까짓 사진 몇 장에 속아 넘어갈 등신 아니잖아, 내가.’
‘…….’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너 이러는 이유. 갑자기 이딴 짓까지 벌이는 이유가 뭐야.’
‘왜 갑자기라고 생각해요?’
‘뭐?’
‘갑자기가 아니라고. 이번엔 재수 없게 들켰을 뿐이야. 건호 씨에게도, 또 회장님께도. 지금쯤이면 아마 회장님 귀에도 들어갔을 거예요.’
건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깔린 목소리는 내 것이고, 격앙된 감정을 애써 짓누르는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기억 속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난 회장님 만날 자신 없어. 건호 씨가 알아서 처리해 줘요. 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누가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해, 건호 씨.’
떠오르는 기억을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그 순간 지건호가 크게 뒤척이는 소리에 놀라 주저앉을 뻔했으니까.
나는 행여나 들켰을까 그를 등지고 옆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웅크린 몸 위로 그의 팔이 하나 올라왔다. 잠버릇인지 내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잠시 동안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혹시 깬 걸까. 놀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해 볼까. 제 휴대폰을 몰래 봤다는 걸 알면 화를 낼 텐데.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 지건호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도무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지건호를 깨워서 추궁하고,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취한 상태다. 확인한다고 해도 맨정신에 해야 한다. 증거도 있겠다, 내가 그의 휴대폰을 몰래 본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아야 하는 게 대체 뭘까.
신지원 신원 확보. 상대 남자. 제보자.
눈앞에 새겨놓은 것 같은 활자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지금 추측하는 게 맞을까.
원인 모를 불안함은 끝도 모르고 몸집을 부풀렸다. 나는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할 때까지 숨죽인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휴대폰도 이젠 액정이 꺼진 상태였다.
정적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의 숨결이 만들어내는 바람이 이따금 내 귓바퀴를 간질이자 나까지 취한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긴장한 나머지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인위적인 고요 속에서 오히려 내 숨소리만 커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일단은 나가야 했다. 나가서, 메시지를 천천히 다시 살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허리께에 있던 그의 손을 조심히 치웠다. 다행히 그는 아직 깨지 않았는지 매트리스 위로 팔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에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그대로 몸이 반대로 돌려졌다. 너무 놀라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꼼짝없이 지건호와 마주 보고 누운 상태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잠에서는 깬 듯했다.
인상을 구기며 마른침을 삼킨 그가 물었다.
“몇 시야.”
잔뜩 잠긴 목소리는 화난 기색도 없어 보였다. 다행히도 제 휴대폰을 봤다는 건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들키기는커녕 내가 제 옆에 누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되레 지금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나를 제 품에 당겨 안으며 물었다.
“응? 몇 시야.”
“아직…… 밤이야. 더 자도 돼요.”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의 품에 갇힌 채로 대답했다. 숨죽여 가늘어진 목소리는 채 퍼지지도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그러자 낮디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귓가에 흩어졌다.
“너는.”
“……나?”
“넌 왜 깼냐고.”
“아, 나는…….”
“왜. 또 속이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무어라 대꾸해야 하지.
나지막한 말투는 따지는 것도 뭣도 아니었다. 그 다정함이 낯설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술기운 가득한 입술이 내 대답을 갈구하듯 느릿느릿 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점을 찍듯이 얼굴에 닿는 입술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내 콧등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이듯 말했다.
“큰일이네.”
“……뭐가.”
“입덧이, 오래가서.”
“…….”
“누굴 닮아서 벌써부터 엄마를 고생시켜.”
“……지건호 씨, 지금.”
그는 아직도 과거의 단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이를 사리물며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왜 저 혼자 다른 기억 속에 빠져서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 고작 술에 취했다는 핑계밖에 없으면서. 정작 나는, 난 지난 기억을 찾을 때마다 이리도 괴로운데 어째서!
그가 우리의 과거를 행복하게 반추할수록 내게 남는 건 절망뿐이었다. 억울해. 왜 나만.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뒤엉킨 기억은 감정까지 교란시켰다. 분노는 불안으로, 불안은 어쭙잖은 희망이 되어 기억을 좀먹었다.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잘못 기억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내가 내 멋대로 추측해서…….
‘우리, 아이?’
‘지원아.’
‘참 뻔뻔하다, 그렇지?’
아니야. 꿈이다. 다 내가 잘못 본 거야. 다르게 기억하는 거야. 전부 다 내 헛된 추측이고 망상이야. 미쳐버린 내가 만들어낸 피해망상.
나는 불안에 취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알코올 냄새와 뒤섞인 그의 향기가 코끝을 적셨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자 머리 위로 그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그는 내 등허리를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어서 자.”
“…….”
“꿈도 꾸지 말고.”
술에 취한 듯 혹은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에 복잡했던 머리가 텅 비워졌다. 모든 건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찰나의 악몽일 것이다. 그가 이 밤을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만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최면과도 같은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들렸다.
“……희원아.”
그래서 그의 입술이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찾았을 때는, 어쩌면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건호가 꾸지도 말라던 그 꿈. 그러나 정작 그는 그 무의식 속에서 내가 아닌 희원을 찾고 있었다.
희원아, 희원아.
그럼에도 나는 감히 눈을 뜨지도 못했다. 눈을 뜨면 그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
그야말로 모든 것이 엉망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