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여전히 특별한 꿈을 꾼다거나 하는 건 없고요?”
“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담당의의 시선은 어딘가 권태로워 보였다. 배운 것이 많은 눈이지만 내게서 배울 것은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눈.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 이 심리 치료도 의미 없는 소모전이라는 뜻이었다.
그건 내가 몇 차례 행한 치료에서 답을 뭉뚱그려 말하거나 일부 회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나는 담당의에게 내 상태를 완전히 오픈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신지원 씨.”
“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모래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파랗게 색을 입힌 모래는 어느새 아래로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은 담당의가 똑똑 노크하듯 책상을 두드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난 신지원 씨 담당 의사예요.”
이제 와 새삼스럽게 소속을 밝히는 것이 수상해 한쪽 눈썹을 세웠다. 다 아는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으로 묻자 담당의가 제 안경 아래로 피로 섞인 눈가를 비비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지원 씨가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는데.”
“…….”
“기억을 정말로 찾고 싶다면 말이에요.”
나는 그녀가 붙인 전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담보로 잡고 일하고 있으면서, 기억을 찾을 생각이 없는 날 되레 나무라는 태도 같았으니까.
내게 솔직함을 바라는 것도 과분한 요구 아닌가. 여기서 털어놓은 말이 그대로 지건호에게 전달될 것이 뻔한데, 뭘 믿고 입을 열 수 있을까.
여태 그렇게 생각해 왔기에 입을 연 건 조금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사실은 몇 가지 떠오른 기억이 있어요.”
그러자 담당의의 얼굴 위로 색다른 표정이 씌어졌다. 뭐랄까. 경탄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며 마주 앉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편히 말해 보라는 듯, 다정한 미소를 곁들인 상태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게 조금 부담스러워 책상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새로 뒤집은 모래시계는 천천히 모래를 떨구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담당의의 아이 사진을 끼워 넣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뒤에서 안고 있는 담당의의 표정은 내가 본 중 최고로 밝은 얼굴이었다.
그 낯선 얼굴을 무람없이 더듬다가, 책상 위로 올려둔 그녀의 깍지 낀 손으로 눈길을 옮겼다. 왼손에는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는데, 모양으로 봤을 때 결혼반지인 것 같았다.
나는 무심결에 허벅지 위로 움켜쥐고 있던 내 손가락을 매만졌다.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이 괜스레 허전했다. 그걸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선을 내 무릎 위로 내렸던 담당의가 담백한 어조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쉽게 입을 뗄 거라고 생각지 않은 듯했다.
“건호에 대한 기억인가요?”
그녀가 지건호와 친분이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사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기억 잃은 제 아내를 아무나에게 맡기고 싶진 않았겠지. 무슨 이야기가 새어 나올 줄 알고.
비단 이 정신과 담당의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었다. 사고 후 재활하는 동안 내게 붙였던 교수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입단속하라는 암묵적인 지시. 모든 것은 태산으로 먼저 흘러야 했기에 행해졌던 과도한 친절.
나는 그 뻔하디뻔한 사실에 자칫 감동할 뻔했던 과거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웃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 속을 읽은 건지 뭔지, 다시 눈을 맞춘 담당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김수연에게 전해 듣기로, 지건호의 고교 선배라고 했던가. 그런 걸 보면 김수연이 내게 건네는 정보는 상당히 객관적인 편이었다. 사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담은 정보. 그것이나마 알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만.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늘어지자 그녀는 깍지 낀 손가락을 반대로 교차했다. 굳이 둘러댈 것도 없다 싶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그 사람이랑 부부였긴 했나 보다 싶은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부부였긴 했나 보다…….”
두루뭉술한 대답에 의아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였지만, 그녀도 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입에서 먼저 터뜨려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예를 들자면, 섹스했던 기억 같은 거요.”
“아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담당의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이어 뭔가를 기록해두는 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나는 그 손가락을 유심히 읽어보려다가 말았다. 열심히 보기만 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사고 전 기억이라는 건 확실하고요?”
“당연히요. 사고 후엔 그런 적이 없으…….”
문득 어떤 밤이 떠올라 말끝을 얼버무리자 담당의가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언젠가는 지건호가 자고 있는 나를 강제로 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전적도 있는 남자였다. 자고 일어났을 때, 목덜미부터 가슴까지 마구 짓씹어 놓았던 흔적을 떠올리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날 하루에 불과했을 뿐, 잠에서 깨고 나면 혹시나 싶어 매일같이 아래를 더듬었지만 그의 흔적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확답했다.
“사고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네.”
남의 섹스 얘기나 듣고 기록해야 하는 담당의가 내심 안타깝긴 했으나 그에 따른 분석이 궁금하긴 했다. 나는 이왕 털어놓은 거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설마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당연히 별거 아닐 거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구심을 갖고 쳐다보자 키보드에서 손을 뗀 담당의가 다시 손깍지를 끼며 눈을 맞추었다.
“지원 씨의 마음이 궁금해지는데. 혹시 불쾌했어요? 아니면 좋았어요?”
“…….”
“말하기 싫으면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이것도 상담의 일환이라는 건 기억해둬요. 그게 어떤 행위든 지원 씨가 찾은 기억의 일부라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
“다른 기억을 찾는 데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리는 있었다.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을 뿐이지. 섹스에 대한 기억으로 소환할 게 뭐가 더 있을까. 고작해야 임신이 전부일…….
아이. 그래, 우리에게도 아이가 있었지.
나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덤덤히 되짚어 봤다. 이 몸에, 지건호의 씨를. 갑자기 속이 메슥거렸다. 한때 생명을 품었던 몸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라도 한 양 죄책감이 솟구쳤다. 정상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이참에 아이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낼까 하다가 이번에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조금 더 유보한 뒤, 감정이 확실해졌을 때 털어놓는 게 내게도 좋을 것 같았다.
“지원 씨.”
“……네.”
울컥 솟아오른 감정을 겨우 짓누르고 고개를 들려던 순간, 눈앞에 불쑥 무언가가 나타났다. 담당의가 건넨 티슈였다. 갑자기 이게 뭐냐고 물으려다가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턱을 적시고 있었다.
“아…….”
예기치 못한 눈물에 더 당황하여 가만히 행동을 멈추고 있자 담당의가 날 향해 조금 더 손을 뻗어 흔들었다. 나부끼는 티슈를 어쩔 수 없이 건네받고는 얼굴을 닦았다.
“놀랄 필요 없어요. 상담하다 보면 많이들 있는 일이니까.”
그녀는 내게 원한다면 더 써도 된다며 티슈 갑을 내 앞으로 옮겨 주었다. 이제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그게 더 이상해 보였을까, 말을 건네는 태도가 사뭇 진중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대체로 심인성 기억상실증은 트라우마에 기인해요. 지원 씨의 경우 워낙 큰 사고를 겪은 터라 사고에 대한 걸 배제할 수는 없었는데, 이제 보니 다른 원인을 더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그럼 그동안 약물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던 이유가 그거였나…….”
쯧, 혀를 차며 마우스를 잡은 그녀는 미간을 한껏 좁힌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마도 그녀는 내 눈물이 지건호와의 섹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기억을 빨리 못 찾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촌극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약물. 나는 그녀가 무심결에 중얼거린 그 말에 그동안 몰래 모아두고 있던 약을 떠올렸다. 지건호가 매일같이 내게 들이밀던 약. 기억을 찾기 위한 치료용이었다면 그가 그렇게 강박적으로 복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감히 판단하건대 지건호는 내가 기억을 찾는 걸 그리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지건호나 김수연의 눈을 피해 약을 먹지 않은 날엔 되레 정신이 맑아지기까지 했으니, 내 예상이 틀린 방향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담당의가 내뱉은 말은 그와는 조금 다르지 않나.
“선생님.”
나는 긴장감을 감추고는 다소 숨을 죽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내 부름에 모니터로부터 고개를 돌린 그녀가 또 생각난 말이 있냐는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알 수 없는 희망이 비친 것도 같았다.
그 실낱같은 희망을 무시할 수는 없어 나는 주머니에 내내 넣고 있던 것을 꺼내 책상 위로 올렸다.
그동안 몰래 약을 모아왔던 약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