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나란히 열 맞추어 있는 사용인들하며 딱딱하게 얼어붙은 분위기까지. 이건 지건호가 벌써 집에 왔다는 소리였다.
웬일로 이 시간에 퇴근인가. 아니면 내가 늦게 들어온 건가 싶어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바깥은 아직 해가 다 지기도 전이었다.
사람 불편하게 갑자기 뭔 일인지. 미리 연락이라도 하든가.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가 헛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따지자면 그의 집에 빌붙어 기생하는 입장은 난데, 그새 주객전도가 된 양 굴고 있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본부장님 퇴근하셨어요, 사모님.”
“네, 그런 것 같네요.”
다소 뻘쭘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지건호는 그래서 지금 어디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그새 어디로 갔는지, 사용인들은 할 말을 끝내자마자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난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았다.
사실상 내 요청에 따라 사용인들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그것이 기존 사람은 물론이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미움까지 샀음을 눈치껏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잘릴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정성에 기인한 반발 심리였을 터였다.
그러면서도 그중 일부는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듯했으나 그것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겠지. 아니면 김수연에게 따로 경고를 받았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들이 날 뒤에서 욕을 할지언정, 내게 잘 보이려고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기에 난 그 뒷담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언젠가 값을 쳐 주어야 하는 사랑을 받느니 이쪽이 더 편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나는 현관부터 거실까지 길게 연결된 복도를 지나며 주위를 살폈다. 마치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돌길 위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돌 사이사이 굽이 끼지 않도록 잔뜩 긴장하면서, 뒤꿈치도 살짝 들고 살금살금.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나 싶게 선명한 감각이었으나 떠오르는 기억은 발바닥만큼이나 무뎠다.
그런데 만약 이대로 지건호를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잘 다녀왔냐고? 나는 잘 다녀왔다고?
뭐가 됐든 그러고 싶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당장은 지건호를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음. 이건 그냥 영양제 같은데요.’
‘……영양제요?’
‘말하자면 종합비타민?’
내가 조심스럽게 내놓은 약을 보며 담당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걸 왜 안 먹고 들고 왔냐며, 딱히 부작용은 없으니 이제라도 잘 챙겨 먹으라는 말과 함께. 혹시나 그녀가 날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의심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건호가 챙겨주던 약인가 보죠? 그런데 지원 씨는 그걸 믿지 못해서 약을 숨겨왔던 거고.’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지건호 성격에 곱게 먹이진 않았을 거예요. 안 봐도 알겠네.’
지건호를 오래도록 봐 왔다는 담당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그녀는 서서히 웃음을 지우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나도 지건호에 대해 웬만큼은 알거든요. 건호 상담도 내가 했으니까.’
‘그 사람을요?’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라 상담까지 받던 사이였단 말인가.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다 이해한다는 듯 그녀가 덧붙인 말은 가관이었다.
‘맞아요. 지원 씨 사고 나고 병원에 있는 동안 건호도 많이 힘들어했었어요. 상담이나 한번 받아보라고 권했는데 생각보다 잘 맞는지 정기적으로 찾아오더라고요. 뭐, 약이 잘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
‘어쨌든 난 건호가 약으로 장난친다거나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설사 장난을 친다고 해도 그간 걔가 했던 걸로 봤을 때 제 몸에다 할 놈이지, 감히 지원 씨에게는…….’
끝을 흐렸지만 담당의의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건 김수연이나 신상윤이 늘 떠드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건호는 날 끔찍이도 사랑했다는, 역겹기 그지없는 그 말.
‘확신하기 어렵다면 지원 씨가 되찾은 기억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떠올린 기억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물론 해석의 방향을 다르게 잡으며 다른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병원에서의 기억을 되짚다 보니 어느새 중정이었다.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끄트머리, 거실과 가까운 중앙 정원 위로 뻥 뚫린 하늘은 발갛게 색을 입은 상태였다.
저녁노을이 예쁘면 다음 날은 맑은 거라고 하던데. 예보처럼 내일 진짜 비가 오긴 하려나.
비가 온들 안 온들, 사실상 병원 갈 때를 제외하고는 갇혀 있는 신세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무심결에 지건호를 탓하다가 문득 그가 집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지건호는 근처에 없는 듯했다. 안도하며 발을 옮겨 침실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아.”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문이 침실 안쪽을 향해 열렸다. 내가 밖에서 민 것이 아니었으니 안에 있던 사람이 먼저 잡아당긴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눈을 키웠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표정을 고쳤다.
“수연 씨?”
“아, 사모님 오셨어요.”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김수연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움이 살짝 어렸다. 말갛던 얼굴에 홍조까지 피었지만 컨디션 난조 때문은 아니었을 터였다. 신상윤을 통해 수연이 아픈 게 아님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한쪽 팔에 걸쳐둔 외투를 고쳐 들며 물었다.
“아픈 건 좀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쉬고 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끝까지 아팠다는 핑계를 댈 셈인가. 그럴 거면 상윤과도 입을 맞추지 그랬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참았다. 수연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눈치껏 눈감아주는 미덕도 필요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푹 쉬어요. 생각해 보면 수연 씨 몸살 안 나는 게 이상했어요. 그렇게 아침 밤낮으로 일하는데.”
“아니에요. 내일부터는 복귀 가능해요.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렇다고 나한테 죄송할 것까지야. 어차피 하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내 밑에서 시중들거나 날 감시하는 게 전부일 텐데.
듣기로는 김수연은 태산 안에서도 눈에 띄는 재원이라고 했다. 상윤의 말에 따르면 그가 면접 보고 입사한 채용 절차는 물론이고, 기존 대졸 채용 프로세스와 비교했을 때도 어마어마한 확률을 뚫고 수석으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수연이라고.
그런 사람이 왜 하필 내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이제라도 본사로 들어가서 일하면 안 되나. 내 옆에서 별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채 수연을 바라보는데 방 안쪽에서 누군가 성큼 발을 옮기며 나왔다.
“아, 김 실장. 아까 말한…….”
나는 제법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아니, 어쩌면 목소리를 인지한 건 나중이었는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세운 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향이 먼저였으니까. 향수보다는 샤워오일 같은 향. 섬유유연제, 아니, 침구 시트에서 나는 냄새인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체취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연속적으로 빠르게 일어난 그 반응에 수연을 붙잡고 뭔가를 말하려던 지건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수연을 향해 이만 가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에 수연이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는 등을 돌렸다. 인사말은 따로 없었다. 그건 지건호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방해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화감이 감돌았다. 내가 내 방에 들어가려 했을 뿐인데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지. 두 사람은 주인도 없는 방 안에서 뭘 하고 있었기에 날 보며 놀라는지.
설마하니 보는 눈 많고 듣는 귀 많은 이곳에서 둘 사이에 별일이야 있었겠냐만. 괜한 의심을 살 행동을 하는 두 사람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쓸데없이 상황을 곡해하는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싹만 틔운 모멸감은 뿌리만 썩게 만들었다.
날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비집으며 그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열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이대로 쉬고 싶었다.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래?”
나는 원피스를 벗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가면서 문을 닫은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놀란 눈으로 쳐다봤으나 드레스룸 벽에 어깨를 살짝 기댄 지건호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황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힘든 요구를 했나, 내가?”
움칠거리는 어깨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이어 원피스 지퍼가 주욱,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더니 허리께에서 멈추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그의 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쳐다보는 날 선 시선에 그는 그저 지퍼를 내려주려 했을 뿐이라는 듯 눈으로 대답하며 팔짱을 꼈다.
나는 순식간에 내보이고만 맨살에 주춤거리다가 별수 없다 싶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 내외할 사이도 아니고. 거울 속 지건호를 무심히 응시하며 옷에서 팔을 하나씩 빼내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벗은 원피스는 피다 만 꽃송이처럼 발치에 떨어졌다.
지건호 역시 거울 속의 내게서 눈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입은 거라고는 속옷과 스타킹이 전부인 몸 위로 덕지덕지 달라붙는 시선이 다소 불편해 몸을 돌렸다. 곧장 눈이 닿은 곳은 그의 가슴팍이었다. 얇은 니트 아래로 적잖이 팽창된 상태였다. 나는 순간 배회하던 눈길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다소 비딱하게 마주친 시선에 그는 그냥 눈썹만 살짝 들어 올렸다.
“안 먹었으면, 네가 어쩌게.”
시답잖은 짓이나 할 거면 비켜달라고 그를 살짝 밀치는데 덥석 손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