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왔다 한들 의미 없는 말이라 부질없었을 테지만.
팬티 아래로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놓은 그는 내 뺨 위에 스치듯 키스했다. 짧은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감정 없이 붙었다 떨어진 그의 입술에서는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겁먹은 듯한 얼굴이네. 안 어울리게.”
나를 도발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떨고 있냐며 힐난하는 어조에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뺨을 지나 내 턱에 머물던 그의 입술이 그 움직임을 놓치고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귓가에 닿는 그 축축한 소리가 소름 끼치게 서늘했다.
치기 어린 허리짓은 멈추었다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바지 아래, 손바닥만으로 느껴지는 그의 성기는 이미 부풀 대로 부푼 상태였다.
어쩔 셈일까. 여기서 정말 섹스라도 할 작정인가. 그렇다고 해도 우리를 비난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내가 머무는 침실, 그리고 남편. 한때 사랑했다던 부부였으니 의심을 살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흥분을 녹인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좀처럼 움직일 수 없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지건호는 날 두고 욕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고요한 눈동자 속에 이는 바람은 날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통해 다른 상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가 잠결에 외친 ‘희원’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지건호도 그랬을까. 나를 보며 다른 여자를 덧그렸을까. 대놓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내가 갖고 있는 패가 약소했다.
“그만하죠, 이제?”
추잡한 마음을 감추며 그를 밀어냈다. 웬일로 순순히 밀려난 그가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선 약간의 경멸까지 읽혔다.
“역시. 너 좋을 대로 사람 이용하는 건 여전하네.”
“…….”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런 거 안 통하는데 어쩌지.”
그는 의아한 표정의 내 팔을 잡아서는 반대로 돌렸다.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돌아가더니 어깨가, 그리고 가슴이 순서대로 차가운 거울에 짓눌렸다.
“흣, 지금 뭐 하는…….”
내뱉은 헛숨에 얼굴 주위 거울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황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지건호가 곧바로 등 뒤로 제 몸을 붙여왔다.
그에게 짓이겨지다시피 한 몸으로 버둥거려 봤지만 역효과였다. 그럴수록 그의 흥분이 점점 부피를 키우고 있다는 게 맞닿은 몸을 통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착각하나 본데 넌 아직 널 제대로 몰라, 신지원.”
제 품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 중인 나를 비웃던 그는 내 턱을 단단히 고정하며 거울을 눈짓했다. 부릅뜬 눈으로 거울 속 그를 쏘아봤다. 그러자 그저 한때였을 다정을 담은 눈으로 내 얼굴을 잠시 훑던 지건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난 그런 너를 아주 잘 알고.”
“……잘 아는 사람이 날 감시하는 걸로도 모자라 감청까지 해? 뭘 더 알고 싶어서? 대체 그게 무슨 궤변이야.”
“그건 너를 위해서지, 지원아.”
“뭐?”
그는 제 배려를 곡해하지 말라는 양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간에 새겨진 실금이 나를 유린하는 기분이었다.
“네가 아직 신지원이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길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읏…….”
나는 음부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순간 숨을 멈추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다급히 내린 시야 속에 지건호의 팔이 있었다. 내 아랫배를 감싸듯이 받치고 있던 그의 큰 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얄팍한 천 사이를 침투하여 다리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하…….”
“이것 봐. 넌 절대로 다른 남자한테 다리 못 벌려.”
내 뒤로 몸을 바짝 붙인 그는 무릎으로 오므라든 내 허벅지를 벌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수치로 물들어 있었다.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어지는 적나라한 손길에 마땅히 시선을 둘 곳도 없어졌다.
결코 애무는 아니었다. 무성의한 손은 그저 음모를 지나 갈라진 틈을 더듬기만 했을 뿐. 의도가 불명확한 손에 그를 보던 눈매가 좁혀졌다. 그러자 지건호가 친히 설명을 곁들였다.
“애초에 그럴 몸이 아니라는 소리야.”
“…….”
“신지원 몸이 워낙 예민했어야지.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부어올라서는, 곤혹스러웠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
“그런 몸으로 다른 남자를 안았다고.”
지건호는 당치도 않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그는 그렇지 않냐며 내 음부를 툭툭 무신경하게 두드리고는 팬티 안에 넣었던 손을 뺐다. 이제 보니 내게서 흥분을 끌어내려던 게 아니라, 확인하려던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 아래가 남의 걸 받아내느라 부어올랐는지를.
“네가 다른 새끼랑 붙어먹을 거란 그딴, 역겨운 상상 같은 건 굳이 할 필요도 없어. 알아?”
“…….”
“그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고, 예전에도 없었으니까.”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는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까불 거면 뭘 잘 알고나 까불어. 기억 안 난다는 같잖은 핑계로 사람 우습게 만들지 말고.”
“…….”
“네가 지금 누구인지 잘 판단하고 행동해.”
그는 내 처지를 똑바로 직시하라는 듯이 거울 속 나를 응시했다. 난 반항하듯 그의 시선을 비키며 거울에 비친 내게로 눈을 돌렸다.
신지원. 그의 과거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보다는 더 밝고 건강한 얼굴이었겠지.
사고가 있기 전에도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지만, 적어도 오늘처럼 천박하게 그를 희롱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내게 향한 멸시 섞인 눈빛은 내가 간헐적으로 떠올린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나 좋을 대로 사람을 이용했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
“아…….”
생각이 뒤엉키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 내가 비틀거리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지건호가 재빠르게 날 붙들었다. 괜찮냐고 묻는 눈에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값싼 동정은 싫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면피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으니까 그만 나가요.”
지건호가 얼굴을 굳혔다. 나는 느슨해진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알아들었다고. 당신이 아는 신지원처럼 똑바로 처신할 테니까, 그만 나가요.”
말을 마치고는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에 몇 번 물을 끼얹고 멍하니 거울 속을 들여다봤다. 파리한 안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지도 벌써 몇 개월. 그러나 기억을 되찾기는커녕 매일같이 하나씩 더 잃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조하듯 내뱉는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은 그냥 좀 쉬고 싶었다. 그러나 똑똑, 두 번의 노크와 함께 전해온 김수연의 말. 저녁 준비 다 되었으니 나와서 들라는 그 말에 나는 그러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내가 쉴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 * *
좀처럼 집에서 뭘 먹지 않던 사람이라 이때다 싶었는지 식탁 위에는 그동안 못 보던 음식들이 가득했다. 모두 지건호를 위해 창원댁이 부랴부랴 준비한 것들이었다.
나는 때아닌 진수성찬에 속으로 탄복하며 식탁에 앉았다. 마주 앉은 지건호에게서는 좀 전 같은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또 같이 식사하니까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르겠네. 오늘은 제가 특별히 더 맛있는 걸로 신경 썼어요. 들깨장어탕!”
창원댁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뚝배기를 마지막으로 상 가운데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비단 장어탕뿐만이 아니라, 상에 놓인 모든 것이 죄다 몸보신을 위한 반찬들이었다. 정확하게는 정력에 좋다던 것들.
병원에 있을 때 볼 게 없어 틀어놨던 어느 방송에서 남자에게 좋다며 그리도 극찬하던 것들이 식탁 위에 다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 이제 와 신혼 생활이라도 하라는 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수저를 드는데 눈앞에 대뜸 그의 손이 나타났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그가 내 앞에 놓인 국그릇을 들고 가서는 뚝배기에 담긴 것을 떠주었다. 들깨가 들어간 장어탕은 냄새부터 구수했다.
예전에도 좋아하던 건가. 습관처럼 텅 빈 머릿속을 더듬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 먹고 뭐 하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썩 귀찮다는 듯이 숟가락을 들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그 진한 맛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몇 번 더 떠먹는데 이번에는 밥 그릇 위로 반찬이 놓였다. 지건호의 짓이었다. 어이없는 행동에 흠칫하며 가만히 의도를 읽고만 있자, 근처에서 지켜보던 창원댁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이고, 우리 본부장님. 참 다정도 하시다, 그죠?”
다정이 다 얼어 죽었나. 고작 반찬 좀 챙겨줬다고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알아서 안 먹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애초에 내가 알아서 잘했으면 그가 날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는 투였다.
“지건호 씨나 많이 드시죠. 당신 위해서 여사님께서 특별히 신경 쓰신 것 같은데.”
그에 창원댁이 호호 웃고는 편히 식사하라며 서둘러 물러갔다. 지건호는 그제야 식탁을 훑어보더니 내 말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
“언제든 쓸 일이 있겠지. 먹어 둬요.”
정말이지 별 의도는 없었다. 나름 순진한 조언이기도 했다. 지건호가 다른 여자를 결벽적으로 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거니와,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상대할 여자쯤은 얼마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 아니던가.
기억 잃은 나를 상대로 했던 행동을 돌이켜봐도 그랬다. 그는 언제든 발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 말이 다소 불쾌한 듯 그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를요.”
지건호는 묵묵히 나를 응시하던 눈을 거두는 듯하다가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멀어진 시선이 더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가 희한한 소리를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