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희한한 소리라니. 뜬금없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곰곰이 되짚어 보다가 뒤늦게 파악했다.
오늘 일이라고 해 봐야 병원에 가느라 외출한 게 전부였고,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다 엿들었을 것이니 결국 상담 내용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내가 그와의 섹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그 내용.
빠르다, 빨라.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애초에 숨길 생각이었다면 담당의에게 털어놓지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지건호에게 금세 들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설마, 나한테 했던 말을 그대로 지건호에게도 권유한 걸까. 아니, 그것보다도 상담 내용은 밖으로 전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협박이라도 당하셨나.
대답은 않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만 보자 그가 수상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데요?”
“그건 네가 제일 잘 알 것 같은데.”
“글쎄요. 난 도무지 모르겠는데.”
“…….”
“뭐, 생각보다 내 머리가 나쁜가 보죠.”
여태 기억도 못 찾는 걸 보면. 중얼거리며 반찬을 입에 넣었다. 뭘 집었는지 맵싸한 맛에 혀가 얼얼했다. 나는 급히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그를 힐끔거렸다. 지건호는 이제 저녁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수저는 내린 채 팔짱을 낀 상태로 날 보고 있었다.
곧 죽어도 내 입으로 말하라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입을 열까.
이미 다 들어 알고 있을 얘기, 굳이 내 입으로 꺼내게 만드는 저의에 스스로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겠지.
‘어쩌면 한번 부딪쳐 보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지원 씨가 찾은 기억이 남편과의 섹스에 국한되어 있다면요.’
나는 담당의의 말을 되새기며 손등으로 입가에 남은 물을 훔쳤다. 한마디로 기억을 더 찾고 싶다면 지건호와 몸을 한번 섞어보라는 뜻이었다.
물론 한 가지 다른 전제를 추가했지만.
‘하지만 지원 씨의 트라우마가 사고가 아니라, 그러니까 만약 섹스로 인한 트라우마로 기억을 지운 거라면 굳이 권하고 싶진 않습니다.’
심인성 혹은 해리성 기억상실. 지건호의 말마따나 나 좋을 대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린 내 병명은 그랬다. 당시 큰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지만 다행인지 뭔지 그건 아니었고, 그저 트라우마에 따른 심리적 충격이라고.
트라우마. 정말 그것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를 정통으로 대면하는 게 내게도 좋은 일일까.
“신지원.”
날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심결에 하던 어긋난 젓가락질에 반찬이 식탁 위로 미끄러졌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손에 든 젓가락을 내렸다.
“그래요. 내키진 않겠지만 사실이에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불행히도 내가 떠올린 게 그런…… 그따위의 기억이라 선생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
“다른 기억이었다면 당연히 그걸 말하셨겠죠. 지금처럼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뭐 클래식 공연을 본다거나…….”
그 순간 불현듯 현악기 선율이 귓가에 스쳤다. 잠시만, 내게 클래식 공연과 연관된 기억이 있었던가. 다급히 음을 쫓았지만 끈을 놓친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잠시, 김 실장!”
내 얼굴이 안 좋아졌는지 곧바로 김수연을 부르려는 듯한 그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만류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매운 걸 먹었더니 속이 아파서.”
최대한 그럴듯하게 둘러댄다고 했으나 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서 대기하고 있던 건지 수연이 부름에 재깍 등장하자 그가 적당히 눈치를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둘이 소통할 땐 아예 다른 나라 언어를 쓰는 걸로 약속하기라도 했는지 한국어는 아니었다.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은 그 외국어였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내 귀에도 조금은 익숙했다는 건데…….
갑자기 뇌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낀 나는 멀어지는 수연에게 눈길을 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수연 씨, 오스트리아 출생인가요?”
“맞아.”
의심 없이 대답하던 그가 눈을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런 거 같았어요. 보통 유학생들이 쓰는 말이랑은 달라서. 당신이 쓰는 독어랑도 다르…….”
“아니, 그러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가 조금은 놀란 듯이 물었다.
“설마 뭔가 기억이 난 거야?”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너 그때는 내 말 하나도 이해 못 한 얼굴이었어. 아니야?”
“맞아요. 그땐 그랬는데.”
그의 눈이 다급하게 나를 훑었다. 저 표정은 뭘까. 내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얼굴인가. 아니면 뭔가를 숨기고자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표정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집에 들어오니까 점점 기억이 돌아오나 봐요.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기억이 돌아와? 어디까지의 기억이?”
지건호는 내가 기억을 일부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 듯 처음 듣는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차분함을 잃은 그의 모습에 나는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그의 약점 하나를 손에 넣은 기분 같기도 했고.
이상한 고양감에 도취되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열이 일었다. 고작 비밀 하나, 그것도 조만간 어떻게든 터졌을 것을 터뜨렸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흥분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열이 고인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단순한 흥분이라기엔 묵직한 분노에 가까웠다. 과거의 내가 지건호에게 품고 있던 것들. 묵은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인 채로 날 짓누르고만 있었다.
“다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어딘가로 전화를 시도하던 그는 내 말에 휴대폰을 내렸다. 액정 위로는 담당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기억하나 마나 한 것이 전부라.”
“그래도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말한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어요. 수연 씨랑 나눈 그 말도 오늘 갑자기 귀에 들어온 거고.”
“하…….”
허탈하게 내뱉는 웃음에 나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 비딱한 시선을 마주하기엔 그는 너무 컸다.
“그래서 무슨 기억이 더 돌아왔는데.”
“물어봐요. 전화 연결된 것 같은데.”
식탁 위에 던지다시피 둔 휴대폰을 눈짓하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종료를 눌렀다. 화를 억누르는 턱이 단단해졌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지건호 씨는 내가 기억을 찾는 게 싫어요?”
“뭐?”
“그렇잖아요. 내가 기억을 찾을까 전전긍긍해하는 것 같은데.”
그는 내 말에 인상을 구겼다가 이내 틀린 말도 아니라는 식으로 턱을 살짝 당겼다. 치켜든 눈썹을 바로 한 그는 때마침 등장한 김수연에게 뭔가를 전달받았다.
지건호는 수고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건네받은 것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약 봉지였다. 영양제와 함께 들어 있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빈 컵에 물을 따라 같이 건넸다.
“일단 먹어.”
“이건 무슨 약이에요?”
“소화제.”
“나 지금 소화 너무 잘될 것 같은데. 필요하면 당신이 먹어요.”
들이민 약을 그대로 그의 앞으로 돌려주었다. 소화제는 무슨. 알 게 뭐란 말인가. 그가 매일같이 내게 먹이던 게 영양제가 맞는다는 확신도 아직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고 다시 다른 의사에게 물어볼 용의도 있었다.
내 생각이 고이 읽혔는지 지건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사고 나기 전에도 늘 먹던 거야. 왜, 이런 건 아직 기억 못 하나 봐?”
“소화제를 달고 살 정도로 당신이 답답하게 했나 보죠, 그때도?”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되찾지 않아도 알 법한 기억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늘 위태로웠고 언젠가 닥칠 파국을 알게 모르게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건 예정된 수순으로 흘러갔겠지. 우리에게 변수는 내가 도망치던 날 있었던 그 사고였을 뿐이다.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는 게 이 남자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건호는 지금 희원이라는 여자의 품에서 웃고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꼬였다. 혀끝에만 맴돌던 말을 억지로 뱉어냈다.
“잠을 같이 자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섹스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그런 말을 해.”
“…….”
난데없는 욕지거리에 설마 이 상황에 농담이라도 하나 싶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진심인 것 같았다. 그가 들었다는 희한한 말이 대체 무엇인지. 보고는 제대로 받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선생님이요.”
“……뭐?”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남자에게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보고 있자니 희한한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되찾은 기억이 당신이랑 잠자리하는, 그런 거니까. 그래서 당신이랑 섹스를 또 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
“……지어낸 얘기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봐요.”
몇 마디 더 말을 이었더니 입술이 말랐다. 너무 변명 같았나. 괜한 초조감에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그를 쳐다봤다.
“내가 직접 연결해 줘요?”
“…….”
“휴대폰 줘 봐요, 그럼.”
휴대폰을 낚아채려던 손 위로 그의 손이 덮였다.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한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희열이 어린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