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불은 그대로 둬요. 어두운 건 싫으니까.”
내 말에 지건호는 별걸 다 요구한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는 스탠드 조명을 끄려던 손을 거두었다.
나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코끝에 스치는 그의 낯선 향기에 숨이 눌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향을 쫓아내듯이 몸을 반쯤 돌려 누웠다. 정적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침구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내가 먼저 제안한 잠자리였다. 어쩌면 기억을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명분하에 뻔뻔스럽게 요구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침대를 써 보자는 제안이었지, 당장 오늘 밤에 섹스까지 포함해 말한 건 아니었다.
담당의의 말대로 지건호와의 섹스가 트라우마가 되었다면, 같은 상황에 노출되는 건 되레 독일지도 몰랐으니까.
지건호는 내 생각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고민 후에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 나름대로는 숙고하는 척 보였으나 그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도 없었을 것이다.
저녁 먹기 전 그때처럼, 날 통해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 테니까.
“원래 그래?”
나같이 배려 많은 아내가 어디 있나. 자조하듯 속으로 그 이름을 씹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슬쩍 돌아보자 그는 아직 잘 생각은 없는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상태였다.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뭐가요?”
묻는 말에도 여전히 책에 고정된 지건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는 순간 그가 입을 뗐다. 다분히도 악의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원래라는 말은 이상하네.”
“…… ”
“기억도 없는 네가 원래 어땠는지 알 리가 없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발끈해 목소리를 키우고는 단번에 돌아누웠다. 치뜬 눈에 맞선 그의 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건호는 지금 그냥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이다.
들어 봤자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닐 거라는 생각에 그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려다가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무슨 짓이냐고 묻는 그를 보며 그냥 책을 덮어 보이고는 침대 옆 협탁 위에 고스란히 올려두었다.
“신경 쓰여요. 책장 넘기는 소리. 그냥 자요.”
“예전엔 상관 안 했어. 잘 때 이렇게 불 켜놓는 것도 싫어했고.”
“그건 그때고. 난 싫어요, 당신 책 읽는 소리. 어두운 것도 싫고.”
“언제부터 그랬다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내가 싫다는데.”
“그렇게 싫어할 거면서 왜 같이 자자고 했는지 모르겠네.”
“그건…….”
“아예 올라가줘? 편안하게 자도록?”
당했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웃음기 하나 매달지 않은 얼굴이지만 지건호는 지금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제게 같이 자자고 매달린 이 상황을.
나이를 허투루 먹었나. 제정신은 아니다 싶다. 하나는 기억을 잃고 하나는 지성을 잃고.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나는 바로 팔을 뻗어서 책을 잡아 그의 가슴팍에 던지듯 돌려줬다. 당신 하고픈 대로 많이 읽으라는 투였으나 그새 흥미가 떨어진 건지 그는 책을 다시 펼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반대로 돌아누우려는데 그가 그런 내 어깨를 쥐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대로가 편할 거야.”
“……뭐가요.”
“그쪽으로 눕는 것보다는 지금 이 방향이 더 편할 거라고. 그렇지 않아?”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오래된 습관인 건지 그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누워 있는 게 훨씬 더 편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한편으로는 날 알면 얼마나 아냐고 그에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적어도 지금 나보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지건호였으니까.
그 사소한 습관까지도 기억하는 지건호를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뭐라고 되받아칠 게 없어 괜히 말을 골라내다가 물었다.
“……안 자요?”
“먼저 자.”
“책 더 안 볼 거면 그냥 자지 그래요?”
그러나 그는 내 말에 따를 이유는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머리를 받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앉아서 자겠다는 건가. 불을 켜고 있는 게 그리도 거슬리나. 그냥 불 끄고 제대로 자라고 그럴까. 그래도 나보다는 출근하는 사람이 더 편히 자야 할 텐데. 눈만 굴리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명 위치 탓일까. 음영이 짙어진 그의 얼굴은 조금 더 거칠게 보였다. 높지만 약간 꺾어진 콧대하며 굳게 닫힌 입술 선, 다부진 턱을 보면 지건호가 살아온 궤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도 이전보다 깊으면 깊었지, 얕지는 않을 사람.
그에게 나는 과연 어떤 카드가 될까. 나는 신데렐라 소리까지 들어가며 그를 만나 소위 말하는 신분 상승을 했는데, 지건호는 나로 인해 뭘 더 잃어버리게 될까.
그렇다면 그가 날 굳이 품고 갈 이유가 있을까. 사랑을 이유로 대기엔 우리 사이는 이미 어긋나지 않았나. 기억을 되찾은 내가 또 그에게서 달아나려 하진 않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확답할 수 없는 밝은 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에 빚지며 잠에 빠졌다.
* * *
예보됐던 대로 온종일 비가 내렸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인지 나는 평소보다 더 늦게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내가 눈을 떴을 때 지건호는 이미 출근한 상태였다.
제대로 누워서 자긴 했을까. 제 침대로 올라가진 않았을까. 괜한 생각을 했다가 지워 버렸다. 설사 그랬다고 한들 나도 뭐라 할 구실은 없었다.
어차피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일이었고, 거기에 거래가 오갔던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럴 걸 그랬나 싶었지만, 내 기억이라는 좋은 담보가 있었기에 굳이 명시화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기억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으니까. 물론 하룻밤 같이 잔다고 기억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간만에 푹 잔 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에 기분이 좋아진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옆에 앉은 수연이 나를 돌아봤다. 조금은 놀랍다는 눈이었다.
“왜요, 수연 씨?”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뭔데요, 말해 봐요.”
“……사실 사모님 노래 부르시는 건 처음 봐서요.”
겨우 털어놓은 수연의 말에 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진짜 그랬나.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싶어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수연도 같이 웃었다.
“미안해요. 듣기 거북했죠.”
“아니에요. 좋았어요. 저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라.”
“아, 수연 씨도 아는 노래예요? 사실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떠다니는 곡이었는데. 알잖아요, 내 상태.”
나는 이마를 두어 번 두드렸다. 기억이 없다는 핑계를 잘 써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굳이 뭔가를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된달까.
그래도 노래 가사라도 알았다면 검색이라도 해 보는 건데, 딱 몇 구절만 떠오르는 노래는 가사도 생각나지 않는 터라 검색도 시원찮았다.
어제는 상윤을 통해 허밍만으로 노래를 찾아준다는 앱으로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죄다 이상한 노래만 알려주는 통에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상윤은 내게 조심스럽게 음치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는데, 수연이 알아들은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저 어릴 때 많이 듣던 동요 같은 거예요.”
“아, 그럼 혹시 오스트리아 노랜가?”
어찌 아냐고 눈을 살짝 키우며 묻는 수연에게 나는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 사람이 말해 줬어요. 내가 먼저 확신하긴 했지만.”
“아…….”
“기억이 일부 돌아왔거든요.”
지건호가 아직 그런 얘기까지 해 준 건 아닌가. 처음 듣는 소식인지 당황해 얼굴을 굳혔던 수연은 이내 단정한 입매에 웃음을 내걸어 보였다.
“축하드려요, 사모님. 기억 찾으신 거.”
“뭐, 고마워요.”
진짜 축하받을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다가 문득 드는 의구점에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수연 씨는 내 뒷조사 다 했죠?”
“……사모님에 대한 신상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죠.”
“그럼 혹시 내가 유학 생활을 한 적이 있을까요? 그 얘기는 없었던 것 같아서.”
“유학, 생활이요?”
수연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조금 답답해져 말이 두서없이 빨라졌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어서. 내가 유학을 갔다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이상하게 그때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도 같고.”
“기억이 나세요?”
“아니요. 그냥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는 거예요. 나 사실 어제 수연 씨랑 그 사람 주고받는 말 듣고 떠오른 거거든.”
“아…….”
“대충 알 것 같더라고요. 근데 내가 독일 말을 알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서.”
혹시 뭔가 더 아는 게 있냐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수연의 표정은 예의 그 얼굴이었다. 감정의 고조 없이 침착한. 수연에게서 나올 답이 무엇인지 몰라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수연은 덤덤한 목소리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고등학교 때 배우거나 하신 거 아닐까요?”
“아, 학교 다닐 때.”
“네. 독어나 불어 정도는 제2 외국어로 많이 배우곤 했으니까요.”
“아아.”
“사모님께서 만약 진짜 유학 생활을 하셨다면 이미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도 다 나타났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나친 상상이었나 보다.
“그리고 저랑 본부장님이 나누는 대화를 못 알아듣는 일도 없지 않으셨을까요.”
수연은 작게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