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당연하게도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김수연이 자기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우월한 미소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내 무지를 비웃으며 날 낮잡아 본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감정은 괜한 사람을 연적 취급 하고 있는 데에 대한 자조에 가까웠다.
원래 그랬을까. 과거의 나는 지건호와 엮인 모든 여자를 의심하고 살았을까. 그래서 지건호를, 그리고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하지만 나로서는 퍽 오해할 만하지 않나. 내 앞에서 굳이 다른 언어를 써 가며 밀어를 나누는 두 사람. 내 침실에서 함께 나온 두 사람.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오던 김수연. 그런 김수연을 의지하는 지건호.
“그때 나눈 대화 말이에요.”
말이 나왔을 때 물어나 보자 싶었다. 어느새 표정을 지운 수연이 나를 쳐다봤다. 딱히 긴장하지도 않은 듯했다.
“뭐라고 한 거예요? 아니, 왜 굳이 다른 나라 말을 쓰지? 갑자기 궁금해서.”
약간의 불쾌함을 담은 어조였다. 이렇게 티를 내고 싶진 않았으나 뜻대로 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사실 대놓고 불만을 표현한대도 합당한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떠나서, 무지한 사람을 앞에 두고 할 행동은 아니었다.
수연은 언젠가는 이 질문을 받을 거라고 예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정원을 감싼 운무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우선 사모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본부장님께서 내리는 지시에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업무상으로 열린 귀가 많은 터라, 상황이 급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했고요.”
“열린 귀가 많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병원에 계시는 동안 뉴스로도 접하셨겠지만, 본부장님께서 맡으신 동남권 복선 전철 사업에 크고 작은 이슈가 있었어요.”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다지만 태산건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복선 전철 BTL(임대형 민자사업) 노선은 최근 몇 달 동안 연일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시끄러웠다.
경남권과 경북권을 잇는 복선 전철 사업은 고시한 실시 계획보다 더 신속한 공정률 달성으로 긍정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누군가 토지수용 보상 절차를 문제 삼으며 터널 공사가 잠정 중단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신축 공사 현장에서 해체 작업 중 사망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는데, 김수연의 말에 따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상당하다는 뉘앙스였다.
그러니까 누군가 지건호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수를 썼고, 그들의 눈과 귀를 막으며 따돌리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란 게 기껏해야…….
“물론 더 이상하다고 느끼시는 거 이해합니다. 실효성이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독일 철도사와 기술 자문 협약 건의 기밀 유지는 제대로 된 걸 보면, 조금 유치하긴 해도 당시 저희로서는 나름 묘책이었어요. 지금은 그냥 업무 차원에서 서로 번거롭지 않게 하려고 쓰고 있는 거고요.”
“그렇군요.”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의심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희귀한 언어도 아닌 데다가 나조차도 알고 있는 외국어인데,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그런데 나는 상관없지 않아요? 업무적으로 뭘 아는 것도 아니고, 빼갈 것도 없는데. 정보를 갖다 바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건.”
아주 잠시간 대답을 못하고 멈칫하던 수연은 마침 걸려온 전화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보나마나 지건호 전화겠지. 슬쩍 시간을 확인했더니 역시나 점심시간이었다.
지건호에게 내 오전 일과를 보고하는 시간.
“수감 생활이 따로 없네.”
차라리 중죄를 지었다면 이해나 갈 텐데. 나는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정원으로 향했다. 거실과 연결된 바깥 데크는 비를 맞아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냥 이대로 나가 볼까 생각하다가 말았다.
충동적으로 뭘 하기엔 나도 이 따분한 감옥살이에 벌써 적응이 된 상태였다.
* * *
잠시 낮잠을 잔다는 게 눈을 뜨니 벌써 저녁이었다. 어쩌면 지건호가 준 약 때문인지도 몰랐다. 진짜 영양제인지 무엇인지 아직 알 턱은 없지만, 확실히 그걸 먹으면 숙면하는 건 사실이었다.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는 꿈을 꾼 적이 별로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땐 하루걸러 사고 당시의 꿈을 꾸곤 했었는데. 약을 문제 삼기에는 내가 몰래 숨겨둔 약이 꽤 되었으니 그 영향은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늦잠에 낮잠까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수면 상태로 보내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게 까라졌다.
습관처럼 김수연을 부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 역시 수연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지건호만 욕할 게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사용인들은 모두 주방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 시간대엔 늘 비슷한 모습이었다. 청소 일과를 끝낸 사용인들의 휴식 시간이자, 창원댁의 수다 시간. 평소 같았으면 내 옆에 있었을 수연도 눈에 안 보이는 걸로 봐서 그들과 같이 있는 것 같았다.
목이 마른데 물이나 한잔 마시러 가볼까.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쪽으로 발을 옮기다가 순간 멈칫했다. 내가 저곳에 끼는 게 저들에게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방해꾼에 불과한 사람이니 눈치껏 빠지는 것도 답이다.
그냥 그대로 발을 돌렸다. 하지만 발끝이 향한 곳은 침실은 아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 건 다소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다행히 내 움직임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이에 대한 기억을 일부 되찾고 나서 나는 의도적으로 2층을 외면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놓아버린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이자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슬퍼할 까닭도 없었다. 누군가 매정하다고 나를 욕할지언정, 기억에서도 지워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주제에 따질 자격이나 있나 싶었다.
다시 찾은 2층은 어쩐지 더 삭막했다. 뚜렷한 목적도 없어서인지 텅 빈 것 같은 공간 속에서 방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쩌자고 이곳으로 올라왔는지 나조차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이끌린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거역할 수가 없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앞서서 문고리를 돌렸다. 차라리 잠긴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문은 이미 열린 상태였다.
조심히 문을 닫고는 빈방을 차근히 훑었다. 텅 빈 머릿속에 밑그림처럼 되살아난 그 기억을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덧그려 보기도 했다. 이제는 아이 물품이 존재했다는 흔적만 남은 벽을 손으로 만지다가 그 아래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막상 뭘 해야 할지를 몰라 시간만 죽였다. 예전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정하게 인사라도 건넸을까.
“……안녕.”
이렇게? 뱉고 나니 괜히 머쓱해졌다. 들어줄 사람도 없건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나는 멋쩍음을 숨기듯 무릎을 끌어안고는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어제 신상윤의 눈을 피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산부인과였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정신의학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등이 모여 있는 곳이라 늘 산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산부인과가 눈에 들어온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냥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고 후 입원해 있던 곳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이 이야기. 내가 임신한 건 맞는지, 유산한 것도 맞는지, 그럼 그건 사고로 인한 것이었는지. 기억의 오류와 은폐된 진실의 교차점에서 내가 취해야 할 건 무엇인지, 나로서는 그 다음 길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쯤 지건호의 귀에 다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신상윤에게서, 따지자면 지건호에게서 벗어났던 한 시간. 그 시간의 책임을 묻기 전에 내가 뭘 했는지, 어딜 방문했는지부터 찾아냈을 사람이다. 건물 내 CCTV만 확인하면 금세 드러날 일이니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나마 대기 환자가 많아 진료를 받지 않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 진료 기록이 남았다면 그에게 숨기지도 못했을 테니까. 혹시나 어제 일을 문제 삼는다면 생리 불순이나 배란통을 핑계로 대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어제 동행한 건 상윤이었고, 그에게 말하기엔 껄끄러운 일이라 혼자 방문한 거라는 적당한 알리바이도 있었다. 지건호가 이를 두고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걸까.
나는 선득함이 감도는 가슴 중앙에 손을 갖다대었다. 목이 말랐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갈증에 몸에 있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건 그때였다.
“사모님.”
언제 왔을까. 아니, 어떻게 알고 올라온 걸까. 나는 날 부르는 수연의 목소리에 조금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수연의 얼굴은 나보다는 밝았을 것이다.
“아, 수연 씨. 그냥……,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변명하듯 중얼거린 말에 수연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저녁 준비가 다 되었으니 그만 내려가자며 부축하듯 손을 건넸고,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자세가 편치 않았는지 아랫배에서 잠시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방문 밖으로 발을 내딛던 찰나,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