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지현민. 태산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되면서 석유화학 부문을 물적 분할하며 신설한, 태산화학 CFO 전무. 하지만 남자는 나를 ‘제수씨’라고 부르며 자신을 소개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지건호의 이복형제였다.
“오랜만이에요, 제수씨. 사고 나고 병문안이라도 한번 갔어야 했는데, 내가 좀 경황이 없어서. 이해하죠? 지금 우리 회장님 감방에 들어가니 마니 하고 있는 거.”
지현민은 속이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진중하지 못한 언행은 가볍기 그지없어 태산의 적장자라고 보이진 않았지만, 어딘가 지건호와 닮은 이목구비를 봤을 때 형제가 맞긴 한 것 같았다.
나는 잠시간 그를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와 친하게 교류했을 리가 없을 거라는 동물적인 감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갑자기 왜 기별도 없이 남의 집을 찾은 걸까. 아무리 지건호와 반쪽짜리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무례한 거 아닌가.
상당히 불편했다. 여과 없이 드러낸 내 감정을 기민하게 읽은 그가 다소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뭐야. 설마 삐치기라도 한 거예요? 병원에서 나 기다렸나?”
“……그런 게 아니라.”
“하여간, 제수씨 성격 까탈스러운 거 알아줘야 한다니까. 너무 그러지 말아요. 내가 그럴 줄 알고 특별히 좋은 거 들고 왔으니까. 제수씨도 딱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아마.”
그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웃음 지으며 어서 1층으로 내려가 보자고 재촉했다. 나는 수연을 보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수연 역시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만 가볍게 으쓱일 뿐이었다.
의아함을 미처 거두기도 전에 나는 그에게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지현민이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박스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의 포장을 뜯어 내게 보였다.
“자, 이건 제수씨가 좋아하는 브랜드 신상.”
“…….”
“이거 국내에선 내가 제일 먼저 샀을 거예요. 매니저한테 연락받자마자 구매한 거니까.”
그가 거들먹거리며 내게 건넨 것은 명품 브랜드의 구두였다. 괜찮다면 신어 보라며 눈짓하던 그에게 나는 조금 황당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죠?”
“에이, 왜긴 왜야. 한두 번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나 이 정도로 부담 줄 사람 아닌 거 제수씨도 알지 않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였는데.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질문을 겨우 삼켰다. 생각 없이 물어보기엔 아직 보는 눈이 많았다. 사용인들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여 꾸며낼지도 몰랐고, 지현민도 그걸 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부터 일하던 사람들을 내쫓는 게 아닌데. 괜한 심술이 초래한 불편한 상황에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가 멋대로 받을 선물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예전엔 잘만 받던 건데 갑자기 왜. 사고 후에 뭐, 마음이 바뀐 건가.”
사고 전에 내가 이렇게 과한 선물을 받고 살았단 말인가. 그것도 남편의 이복형제에게? 진짜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남편인 지건호를 생각했을 때 내가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지현민과 지건호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지현민의 입장에서는 지건호가 굴러 들어온 돌이었을 터였다. 용케도 친부인 현 태산 회장 지용현 밑으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명백히 혼외자가 아니던가.
그건 아무리 지용현이 결혼 전에 만든 아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지건호의 친모가 그를 버렸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듯이.
지현민이 날 굳이 제수씨라고 부르는 것도 그 이유일 테다. 나이를 떠나 태산의 적장자는 지건호가 아닌 자신임을 은연중에 강조하려는 태도.
유치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내 과거를 일부 알고 있는 사람이니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떨떠름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는지 지현민이 내 얼굴을 보고는 후우, 휘파람을 불었다. 표정 좀 풀라는 뜻이었다.
“늦었지만 퇴원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요. 나 기껏 제수씨 생각해서 사온 건데, 이리 소박맞으니 마음이 좀 아프네.”
그는 정말이지 상처받았다는 듯 눈썹 사이를 좁히며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지건호는 외탁을 한 건가. 그에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사실 사고 후유증으로 이제 높은 구두는 잘 못 신겠더라고요. 더 어울리는 분께 갖다 주세요.”
“나한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난 제수씨 발에 딱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발에 향했던 지현민의 시선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더듬는 듯한 그 눈길에 나는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다행히 김수연이 나타났다. 손에는 물 한 잔을 든 채였다.
“이야, 역시. 내 입맛 맞추는 건 우리 김 실장밖에 없다니까? 지금이 딱 생수 마시기 좋은 시간이긴 하지.”
“더 시키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사모님.”
그의 반어적인 칭찬에 말없이 묵례만 가볍게 한 수연은 날 향해 대답을 붙이고는 물러갔다. 아마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저를 호출하라는 뜻인 듯했다.
“하여간 김 실장, 볼수록 아쉽다니까.”
“…….”
“제수씨도 알죠? 김 실장이 원래 내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거든. 내 일이라면 굳이 말을 안 해도 척척이었는데. 태산이 그 지랄만 안 났으면 지건호 그 새끼한테 빼앗기지도 않았을 건데, 쯧.”
소파 등받이에 한 팔을 올린 채로 수연의 뒷모습을 흘깃거리던 지현민은 보란 듯이 물을 한 번에 모두 들이켜고는 빈 컵을 내려놓았다. 물기 묻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이 집 물맛은 좀 비려. 그렇지 않아요, 제수씨?”
“글쎄요.”
“터가 안 좋아서 그러나. 왜, 이 집을 거쳐간 사람들 다 말로가 안 좋았잖아. 지건호 결혼하기 전에 여기 살던, 그 누구야, 그 사장님네도 쫓겨나다시피 이사했고. 당장 제수씨만 해도 그 사고…….”
“저기.”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싶어 지현민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저도 실수한 건 줄은 아는지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아무튼 제수씨,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봐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거의 죽을 뻔했다죠? 그 정도로 다친 것도 천만다행이었지.”
“…….”
“그러게 왜 위험하게 비 오는 날 운전을 하고 그랬어요. 제수씨 운전 잘 못하잖아. 예전에 제수씨 타던 차였으면 즉사였어요, 즉사. 차가 좋아 다행이었지.”
“네?”
“응? 왜?”
나는 순간 드는 의문에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긴장했으나 그건 아닌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주방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는 수연을 힐끔대며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방금 그 말, 다시 해 주실 수 있나요?”
“무슨 말. 좋은 차라 다행이었다고요?”
“그 전에요.”
“아, 그만하길 다행이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지현민은 소파에 묻었던 몸을 떼어 날 향해 기울였다.
“제수씨가 왜 운전했냐고요?”
그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렸다. 능글맞게 휘어진 눈매에 가려졌지만 그의 눈동자 역시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한껏 낮춘 목소리는 음산하기까지 했다.
분명 그날의 사고에 대해 뭘 알고 하는 소리였다. 지레짐작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운전자는 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수연도, 신상윤도. 모두들 하나같이 그날 사고는 내가 동승자였을 뿐이라고 그랬는데…….
“어때요. 이제 내 선물을 받을 생각이 들지 않나요?”
지현민은 마치 내 반응을 모두 예상했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는 약간의 희열도 감도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걸 다 알고서는, 어그러진 것들이 적당히 제자리로 돌아간 듯하자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나 봐요?”
내가 묻는 말에 지현민이 양쪽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들로 눈을 내렸다.
“전부 다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하나만 골라도 괜찮나요.”
“이왕이면 그 구두가 나을 거예요. 내가 신경 써서 고른 거니까.”
“좋아요.”
“역시 우리 제수씨 화끈해서 마음에 들어. 지건호한테는 너무 아깝지.”
나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라는 식으로 구두가 든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현민도 제 볼일은 다 끝난 듯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 참, 제수씨, 사이즈 교환은 일주일 안에 해야 하는 거 알죠? 안에 매니저 명함 있으니 그쪽으로 연락하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매니저를 통해서 지현민과 연락해야 하는 이유는 지건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럼 제수씨, 난 그만 가볼게요. 부디 좋은 선물이 됐길 바라며. 아, 내가 갖고 온 나머지는 그냥 버려요. 저 사람들한테 버리든가.”
지현민은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하고는 저는 더 이상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떠나는 그에게 적당히 예의만 차리고는 등을 돌릴 때였다.
“저 새끼가 왜 내 집에서 나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긴 지건호가 현관에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