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지건호는 단번에 목소리를 키웠다. 사용인들의 눈치를 봐서 미처 못 내뱉었다 뿐이지, 욕설을 짓씹는 턱이 분노로 움찔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건호의 화가 내가 아닌 김수연에게 향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안도하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김 실장. 요즘 왜 일 처리가 자꾸 이따위지?”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며칠 휴가 더 필요해요?”
“아닙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요. 남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수연이 피해를 준 건 딱히 없지 않나. 지현민 하나 집에 들였다고 저리 화가 날 정도면 그와 말 섞고 비밀 약속까지 잡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함에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수연을 한참을 나무라던 지건호는 이제야 할 말이 다 끝났는지 거칠게 셔츠 단추를 끌러내고는 발을 옮겼다.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그냥 모르는 척하세요, 사모님.”
그를 피해 숨듯이 주방에 들어와 있던 나는 창원댁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저렇게 화내는 거.”
“아니, 본부장님이 그럴 분은 아니지요. 원래 전무님이랑 얽히면 좀……. 옛날부터, 어릴 때부터 둘이 사이가 워낙 안 좋아서.”
그런 지현민이랑 나는 사고 전에 종종 교류를 했다는 거지. 대체 무엇 때문에? 뭐를 얻기 위해서?
“가끔 집에도 찾아왔던 모양이던데요.”
“뭐, 그건 그러긴 했습니다마는…….”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는 창원댁이 수상했다. 제대로 말해 달라며 그녀를 재촉했지만 어지간해서 쉽게 열릴 입 같지는 않았다. 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여사님. 따님 이번에 결혼한다고 하셨죠? 제가 좋은 건 못 해드려도 냉장고 하나는 해 드릴게요.”
“아이고, 아니에요. 그런 거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고. 그리고 혼수는 이미 우리 본부장님이 다 도움 줘서 진작에 장만 다 했는데, 뭘.”
뇌물도 안 통하는 건가. 어떻게 창원댁의 입을 열게 하지. 분명 지현민과 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아는 듯한데. 고민하던 그때 창원댁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모님이 가끔 부르시곤 했지요.”
“제가요? 지현민을?”
“네. 보통 본부장님 안 계실 때, 멀리 해외 출장 가셨을 때나 뭐 그럴 때…….”
“불러서 제가 뭘 했던가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나는 간곡한 얼굴로 창원댁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절대로 듣지 못할 정보였다. 김수연이 말해 줄 리는 없고, 신상윤은 뭘 제대로 알 것 같지도 않았다.
“진짜예요. 두 분 말씀 나누실 때는 늘 2층에서 따로 하셔서 옳게 들리지도 않았고.”
“2층이요…….”
굳이 거기까지 올라갈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 아까 2층 그 방에서 나와 지현민을 마주친 것도 그 때문이었나. 대체 무슨 이유로.
나는 공백과도 같은 과거를 떠올리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중정을 빙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위층은 이리 보니 제법 개방감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까 2층에 올랐던 것도 잘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곳에서 지현민과 둘이 있었다고.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생각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되레 이명이 들리는 듯 두통이 일었다.
“아, 본부장님. 얼른 앉으세요. 식사 준비는 아까 다 됐는데, 국만 새로 뜨면 되니까.”
“아니요, 여사님. 오늘 저녁은 조금 미루겠습니다. 먼저 퇴근하세요.”
언제 왔는지 주방으로 들어온 지건호가 창원댁을 향해 인사하고는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짓했다. 입은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내뱉을지 몰라 저도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그저 눈으로 날 부른 지건호는 먼저 발을 옮겼다. 구태여 뒤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내가 저를 따를 거라 생각하는 듯이.
조금 긴장하여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있던 나는 내 손을 가만히 쥐어 주는 창원댁의 응원에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하니 날 죽이기야 하겠어.
당치도 않은 헛된 자신감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당연히 침실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지건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2층이었다.
* * *
“저기.”
“들어가.”
지건호가 방문을 붙잡고는 먼저 들어가라는 듯 턱짓했다. 그는 내게는 좀처럼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사과라도 할 텐데, 그가 지키는 침묵에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친히 문을 열어준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한 차례 와본 적 있던 방이라 익숙했다. 이곳은 지건호의 침실이었으니까. 보이는 것 족족 그의 취향에 맞추어진, 그의 체향이 가득한 곳.
“앉아.”
그는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냐는 눈으로 내 뒤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마땅히 앉을 의자도 없는 곳이기에 그가 시키는 대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지금은 고분고분 말을 따르는 게 그를 위해서도 옳은 선택 같았다.
커프링크스를 뺀 뒤 소매를 걷은 지건호는 이어 시계를 풀어내며 날 마주 보고 섰다. 거리는 대략 2미터 정도 됐으려나. 하지만 날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무엇보다 뚜렷한 함의를 띠고 있었다.
“소감이 어때?”
서랍장 옆, 벽에 등을 붙인 그가 침대 위로 손목시계를 던지며 말했다. 묵직한 무게감에 나는 옆에 떨어진 시계에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무슨 소감이요.”
“오랜만에 봤을 거 아니야. 지현민.”
“지금 내 상태로는 처음 보는 거예요.”
“아, 그래. 그랬지 참.”
그는 빈정거리듯 웃음을 흘렸다. 단정한 입매를 빠져나온 웃음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색이 있다면 푸른색이었을 것이다. 열을 모두 빼앗기고 냉기만 남은 색. 그러나 두 눈만은 여전히 붉게 느껴졌다. 분노로 똘똘 뭉쳐 화를 내뿜지도 못한 눈이었다.
그를 달래주어야 할까. 아니다.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냥 조용히,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처음은 맞고?”
“당연히. 당신도 보고받아서 다 알 거 아니에요.”
할 수만 있다면 내 숨소리 하나까지 컨트롤할 사람이 그걸 묻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전혀 거리낄 것도 없다는 내 얼굴을 꽤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는 양손을 뒤로 보내 서랍장을 짚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단추 사이로 가슴팍이 은근히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그곳에 두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쩐지 나도 같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부정하고 싶은 과거를 마주한 기분이었달까.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는데 죄를 지은 양 심장이 떨렸다.
“어제 말이야.”
그의 말에 겨우 끌어올린 시선은 채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의 허벅지쯤에서 멈추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후 입을 뗀 그는 역시나 예상했던 그 말을 꺼내었다.
“산부인과에 갔던데.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왜.”
“생리 불순이 좀 신경 쓰여서요.”
“고작 그런 이유로?”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여자들한테는 중요한 문제예요.”
“그렇다고 굳이 신상윤을 따돌릴 것까진 없었지.”
“상윤 씨는 남자니까 말하기 불편했을 뿐이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김수연 붙였잖아. 너 편하게 지내라고. 얼마든지 다른 날 갈 수도 있는 일이었어.”
“나 위하는 척하지 말아요. 하루 종일 감시하듯 붙어 있는데 그게 대체 어떻게 나 편한…….”
순간 욱해서 내뱉은 말을 미처 다 끝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삼켰다. 지금 그런 걸 따져봤자였다. 김수연은 핑계에 불과할 뿐 지건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을 테니까.
“뭐가 의심스러운 건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지원.”
“네.”
“그게 의심스럽지, 나는.”
“…….”
“네 모든 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의심스러워. 속에 숨긴 게 도대체 뭔지. 할 수만 있다면 발가벗겨서 탈탈 털어보고 싶을 정도야.”
모욕적인 발언에 발가락 끝부터 열이 올랐다. 내가 지건호에게 어떤 사람이었길래,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랑을 했길래 이리도 믿음이 바래졌을까.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려는 지건호를 나는 신뢰할 수 있을까.
사고 당일, 다 잃어버렸지만 절대 놓지 않았던 그 기억만 해도 지건호의 말과 확연히 다른 것을.
지금 내가 믿어야 할 상대는 누구일까.
“그렇게 의심스러워하면서 굳이 날 끼고 사는 이유는 뭐예요.”
“뭐?”
“놓으면 그만이잖아. 기억도 온전치 않은 여자, 아니, 당신에게 난 여자도 아니지 않나. 여자로 상대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데리고 사는 이유가 뭔데요.”
까놓고 말해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 내가 그에게 든든한 뒷배경을 만들어 줄 것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내 기억처럼 실체도 없는 사랑을 핑계로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게 문제였어?”
지건호는 고작 그런 이유였냐는 듯 피식 웃었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느리게 내 몸을 훑었다.
“널 여자로 상대 안 해 줘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 그래서 섹스하던 기억이 돌아왔다는 둥 헛소리도 했던 거야?”
“아니, 그건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너 여자 취급 하던 지현민을 집까지 들인 것도 그 이유였나 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들을 말도 없었다.
“앉아.”
밖으로 나가려는 내 팔을 낚아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어깨를 돌리며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놔요.”
“앉으라고.”
“놔, 이거! 소리 질러서 사람 부르기 전에.”
“질러봐. 네 말 들어줄 사람 여기 어디 있나.”
내 말이 퍽 같잖다는 듯 그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치기 어린 반항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내어 봤자 이곳이 그의 공간인 이상 알은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확신이기도 했다. 그것이 살려달라는 외침일지라도.
어쩌면 나는 사고 전에도 몇 번이나 이렇게 객기를 부렸을지도 모르겠다.
보란 듯이 내지른 고함은 곧바로 그의 손에 먹혀들었다. 내 입을 틀어막은 그가 제 무게로 나를 밀쳤다.
그대로 뒤로 쓰러지며 등이 매트리스에 닿았다. 시야가 온통 지건호로 가득 찼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내가 죽도록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