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나는 그의 손을 그냥 확 물어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대로 혀를 깨물어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할 수 없었던 건 이 순간 떠오른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이었다.
‘핑계를 댈 거면 좀 그럴듯한 걸 갖다 붙여, 지원아.’
‘핑계가 아니라 진짜라니까.’
‘서운하네. 내가 그렇게까지 너 괴롭힌 적은 없지 않아?’
지건호는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툴툴 털어냈다. 반듯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탓일까. 그날 태산건설 정기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된 사람치고는 앳된 얼굴이었다.
‘어쨌든 정말로 축하해요. 드디어 태산에서 당신 지지층이 생겼네.’
나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그가 받아 온 꽃바구니로 눈길을 주었다.
이사 선임을 축하하며 그의 직원들이 선물한 꽃은 어쩐지 그들이 모시는 상사가 아닌 날 위한 맞춤인 것 같았다. 연애 시절부터 결혼해서까지, 갖가지 이유를 붙이며 그가 늘 똑같이 주문하던 그 꽃이었으니까.
아마 지건호의 입김이 들어간 주문이었을 것이다. 꽃은 아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준비 바란다고, 태연한 얼굴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을지도.
설마 사내이사가 되었다고 ‘이런 꽃 같은 건 하등 필요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건 각자 포지션에서 맡은 일만 잘하는 겁니다’라며 건방 떨지는 않았겠지.
나와 만나기 전 전략기획 총괄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제 직원들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잘해내는 것이라며, 당신들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늘 생각하고 일하라는 퍽 재수 없는 소리를 떠들었다고 했었다.
그때 직원들이 준비한 축하 꽃바구니를 두고도 대놓고 달갑지 않아 했다고. 저런 건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까지 해서 뒤에서 얼굴값을 왜 그따위로 하냐는 욕까지 먹었단다.
그러던 사람이 먼저 나서서 꽃을 찾는 걸 보고, 연애하더니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평을 들었다지.
‘괜히 말 돌리지 말고.’
그는 내가 건네는 축하 인사에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싱겁게 웃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은 내 어깨에 키스했다. 동시에 가슴을 움켜쥐는 손에 입고 있던 슬립 끈이 흘러내렸다.
‘병원에서 진짜 그랬다니까. 관계는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순 돌팔이 새끼네. 다른 곳 가서 다시 검사받아 봐.’
‘잊었어요? 당신이 나서서 알아봐 준 교수님이잖, 아, 흐…….’
나는 매트리스 위로 완전히 등을 붙이고는 내 위로 올라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익숙한 흐름이었다. 짧은 연애 끝에 바로 시작한 신혼 생활이라 그런지, 아니면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들러붙는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와 몸을 맞대고 있으면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으니까.
벌린 허벅지 사이를 더듬는 그의 손길에 벌써부터 몸속 깊은 곳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굵다란 손가락으로 젖은 팬티 위를 둥글리던 그는 내 코끝을 가볍게 물었다 놓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분이 노망이 나셨나 보네. 별 희한한 말씀을 다 하시고.’
곧바로 삽입할 생각이기라도 했는지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제가 걸치고 있던 배스 가운을 벗어 던졌다. 아직 대화가 끝난 건 아니라고, 팔꿈치로 기어가듯 뒤로 몸을 물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내 양쪽 발목을 하나씩 쥐고 제게로 당긴 탓에 나는 반항 한 번 못하고 그에게 쭉 끌려갔다.
배꼽 근처, 약간 휜 상태로 올라붙은 그의 성기는 이미 젖어 있는 상태였다. 샤워 후 미처 닦지 못한 물기는 아니었다. 가슴팍이며 허벅지에는 물기가 없는 걸로 봐서 그가 흘린 것임이 자명했다. 그는 끝이 번들거리는 페니스를 한 손으로 무심히 훑으며 내 허벅지를 잡았다.
‘그게 아니라, 아, 건호 씨, 잠시만요.’
다급히 다리를 오므려봤으나 그는 여전히 내 말을 믿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같잖은 농담이라고 치부한 그는 내 한쪽 허벅지를 단단히 휘감았다. 남은 다리로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반대쪽마저 손에 잡혀서는 꼼짝없이 그에게 아래를 벌려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
‘잠시는 무슨. 시간 얼마 없어, 지원아.’
‘아, 흣. 얼마나?’
‘샤워만 하고 바로 나가겠다 했으니까. 그래도 한 30분?’
그러나 그는 내게 적응할 시간만큼은 양보하겠다는 것처럼 곧바로 아래를 맞추는 대신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렸다. 젖은 팬티 위로 갖다 붙인 입술은 익숙하게 제가 머무를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생경한 감각에 등허리가 찌릿찌릿했다. 축축한 혀가 노닐던 자리에는 어김없이 흥분감이 번졌다. 대책 없이 젖어드는 그 황홀감에 그의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하, 준비하고 나가요.’
‘뭘 했다고 여기까지만이야. 넌 이걸로 충분…….’
‘응, 응. 나는 충분히 만족하니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음부를 간질였다. 젖은 상태라 그런지 더운 숨이 닿자 축축한 곳에 서늘함이 번졌다.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는 순간 조여든 질구에 혀를 날렵히 세워 꽂아 넣은 그가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물었다.
‘만족했다기엔 아직 너무 마른 거 아닌가.’
‘으, 응. 아니야.’
‘자신감을 좀 가져 봐. 너 더 젖을 수 있잖아.’
하지만 그의 말이 장난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젖은 상태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으니까. 의지와 다르게 왈칵 쏟아지는 것만 해도……. 다만 그를 받아내기에는 조금 버거웠다 뿐이지.
실은 그래서 찾은 병원이었다. 서로 눈만 맞았다 하면 몸부터 맞추고 보는데 그러다간 금방이라도 아이가 들어설 것만 같아서.
나는 짐짓 심각하다는 투로 그의 뺨을 감쌌다.
‘사실은 교수님이 당분간 아이 계획도 미루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제야 털어놓은 사실에 고개를 든 지건호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물었다.
‘아이 가질 거라면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약, 복용 중단하는 게 좋대요. 그런데 당신도 알다시피 난 아직 그럴 자신은 없어서……. 계속 관계할 거라면 피임하는 게 최선인데.’
‘그럼 해야지, 피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곧 죽어도 섹스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그 다짐에 눈을 흘기자 그는 사실 제 인생에서 아이는 선택의 문제였다며 고백해 왔다. 당장 자기가 정관수술이라도 받겠다는 걸 겨우 만류하기도 했다.
어차피 약속한 시간, 복용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그리 오래 끌 일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사고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병원을 몇 군데를 더 찾아갔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아이를 선택했던 건, 오로지 내 의지였다. 지건호는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존재를 인정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속에서 문득 내 배에 손을 얹고 저답지 않게 쑥스러운 인사를 건네던 지건호가 떠올랐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행복한 앞날을 그리기도 했었는데.
나는 선명하게 떠오른 그 기억을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며 귀에 고였다. 예기치 못한 감정에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그러나 이건 그때 그 지건호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지난날의 우리를 위한 추모의 눈물이었지.
애석하게도 그 마음을 달리 해석했는지 그는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하아, 작게 토해낸 숨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부서졌다. 다듬지 못한 호흡으로 들썩이는 가슴에 그 손가락이 스치며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 내 어깨를 잡아 밀치고 침대를 짚은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바투 붙은 두 얼굴 사이로 한숨 섞인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같은 곳에 머물렀다. 괜히 마른침을 삼키자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눈을 맞춘 그가 내 콧잔등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가 살짝 벌린 입술 위로 제 엄지를 붙였다.
내게 닿은 그의 손은 차가웠고 동시에 뜨거웠다. 내 얼굴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어떠한 의미도 없을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완전히 벌릴 수도 없었지만 다물 수도 없었다. 벌리나마나 한 입술 사이로 그의 엄지를 어정쩡히 물고 있는 꼴이었다.
이건 지건호의 버릇이기도 했던 것 같다. 섹스할 때 내 허락을 구하던. 그의 말마따나 날 배려한 행동이었다.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그는 내 입술을 더듬으며 괜찮은지 물었고, 내가 암묵적 동의로 그 손끝을 살짝 물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행위가 시작되었다.
“하고 싶으면 해요.”
하필이면 왜 그 기억인가 하는 의문은 나를 또 한 번 초라하게 만들었다. 남자를 못 안아 환장한 것도 아니고. 담당의가 말했던 섹스 트라우마라는 것도 어쩌면 내게 해당되는 소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가 내 위로 올라타듯 몸을 겹치던 순간에도 나는 이미 젖어 있었으니까.
그게 자기 연민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냥 하자고요.”
그리고 지건호는 결국 이런 나를 기다렸던 것 아닐까.
“하고 싶잖아, 당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입술을 겹쳤다. 버석한 입술은 금세 축축해지며 그의 남은 말을 모두 감싸 안았다.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