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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5)화 (25/60)

| 25화

지건호는 제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가 이내 표정을 흐렸다. 추측일 뿐이지만 내 얼굴에서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정보가 지극히도 얕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다는 것까지 간파한 그는 간략한 답으로 일축했다.

“글쎄.”

참 속 편한 말이었다. 나중에라도 뭔가가 밝혀지면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는 말.

“왜, 뭐가 더 생각났어?”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되묻는 얼굴에 쓰인 다급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어둠으로 가려보려 한들 밝혀져야 할 건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었다.

나는 그에게 잠깐의 여유를 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 이름이 자꾸 맴돌아서요.”

“…….”

“혹시 사고 난 날이랑 관련된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당신 뭐 아는 거 없어요?”

지건호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은근슬쩍 사고 경위를 떠보려던 것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과했다.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었다.

성급한 말에 후회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색한 웃음을 짓누르듯 내 입술로 시선을 던진 그가 천천히 눈을 맞추어왔다. 그제야 내 의도를 알겠다는 눈빛이었다.

“지현민이 헛소리를 제법 했나 본데.”

역시. 말을 잘못 꺼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걱정한 것과 달리 큰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진 않았다.

그는 그냥 나직한 한숨과 함께 목을 옆으로 가볍게 돌렸다. 누워 잤다기보다는 등을 기대어 앉아 잠든 자세였던지라 몸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뚜둑, 하고 맞추어지는 뼈 소리가 자못 섬뜩했다.

뭐라고 변명을 할까, 말을 고르는데 지건호가 더 빨랐다.

“그 새끼 말 들을 거 하나 없어.”

“……별말 하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했는데.”

“그냥…….”

목에 이어 어깨까지 손으로 꾹꾹 누르던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 말을 채근하는 눈동자가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내 밑바닥까지 들추어보는 듯한 눈이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묻고 싶은 기억이 무엇인지.

그렇게 해서 제가 묻어 버려야 하는 진실은 무엇일지. 지건호는 분명 그런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건 내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시 또 원점인 셈이었다. 과거 기억이 일부 돌아왔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아무 실마리도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와 몸을 맞대었던 한낱 추억에 불과할 뿐, 어느 것도 내 사고에 대한 단서가 될 수는 없었다.

사고에 대한 경위부터 제대로 짚어봐야 했다. 나는 왜 도망치고 있었으며, 누구를 피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 사고에 관한 한, 지건호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내 사고에 대해서 숨기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그건 내 어림짐작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었다.

“얼마나 많은 헛소리를 했길래 재깍 대답을 못 해?”

지건호가 기억을 잃은 날 상대로 숨겨야만 하는 것이 도대체 뭘까. 그리고 지현민은 또 어떻게 그날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지현민이 내게 접근한 것도 순수한 의도는 아닐 것이다. 내 사고를 담보로 잡고 뭔가를 요구하려는 것일 테지. 경영권 다툼에서 패배한 자가 노리는 게 무엇일지는 묻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당장 지현민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내가 취해야 할 건 지건호가 아닌 지현민 손에 있었으니까.

“그냥 퇴원 축하한다고 하더라고요. 입원해 있는 동안 못 와 봐서 미안하다고.”

“각별한 우정이네, 아주.”

비꼬는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했다.

“……지현민 씨랑 나, 친했어요?”

그는 내 질문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싸늘하게 훑었다. 먼저 우정을 운운한 건 저였으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기억나는 게 없어서 물어보는 것뿐이니까.”

“…….”

“그리고 지현민 씨 하는 행동만 보면 당신이랑도 아예 안 보고 살던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지건호는 짜증을 삼키듯 되물었다.

“정말 기억을 다 되찾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이제 와서?”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 당연한 걸 몇 개월 동안 거부한 건 바로 너였을 텐데.”

입원해 있을 동안 내가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던 걸 말하는 것이다. 그때는 기억을 찾는 것보다는 몸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척추 손상으로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었고.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난 것에 감사하라는 어쭙잖은 위로를 듣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웠는데. 그런 상황에서 기억을 찾는 심리 치료니 뭐니 하는 게 내게 얼마나 고역이었는데.

“그렇게 잘 알면서 당신은 왜 그랬어요?”

비뚤게 날아간 말은 과거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묻는 얼굴을 보며 따지듯이 말을 이었다.

“나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 제대로 신경 쓴 적은 있어? 기껏해야 아래 직원들에게 보고받는 게 전부였잖아.”

“…….”

“적어도 한 번쯤은 와서 확인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상태가 어떤지 당신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없잖아.”

“…….”

“그런 주제에 아직 기억 못 찾았다고 날 비난할 자격이 돼요? 당신 형제마저 못 와 봐서 미안하다고 축하해 주는 퇴원을 당신은 제대로 챙기기나 했냐고.”

“형제는 씨발, 누가?”

작게 내뱉은 욕지거리에 지건호가 내내 지켜온 평온이 깨졌다. 나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지금으로서는 그와 더 나눌 말이 없었다.

이제 와 괜한 걸 따지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병원 일을 들춘 건 내 억지였다. 그가 병원을 찾지 않은 것에 되레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비록 지건호의 의도가 날 향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지난 몇 개월 동안의 나는 그의 부재에 서운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순한 의문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의문에는 근원적인 것도 포함이었다. 지건호라는 남자가 신지원이라는 여자를 과연 사랑한 것은 맞는지 하는.

‘신지원이라고 해요.’

나는 순간 떠오른 기억에 잠시 휘청거렸다. 내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뭔가를 건네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으윽. 두통이 일었다. 골이 쪼개지는 듯한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발에 걸린 스탠드 조명이 쿵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기억하기로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지건호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별로 신뢰가 가진 않았는지 그가 내 이마를 감쌌다. 딱히 열이 오른 건 아니었지만 이마와 뺨에 닿은 그 큼지막한 손이 차가워서 좋았다.

열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며 손을 떼려는 걸 내가 다시 붙잡았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얼떨떨한 얼굴로 날 보던 그는 마지못해 제 손을 내어주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얼굴 절반을 묻으며 머릿속을 다시 더듬었다. 차가운 감각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신지원. 나이는 대충 서른? 조실부모했고, 그 때문인지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이게 대체 무슨 기억일까. 내 신상을 읊는 목소리는 어딘가 꾸며낸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여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 신지원에 대한 정보는 전부 김수연에 의해 학습된 것이었다. 이름, 나이, 학력, 가족 관계. 심지어는 내 취향까지도 모두 다.

내가 내 신상에 대한 정보를 남의 입으로 들어야 했던 거라면, 김수연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이 목소리는 결코 수연의 것이 아니다. 어딘가 조작된…….

그래. 이건 기계로 변조된 목소리였다. 범죄 수사 프로그램에서나 들어봤음 직한 기계음. 이런 게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더 생각나는 건 없는지 눈을 감고 집중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전부였다.

작게 내뱉은 한숨이 그의 손목을 타고 흩어졌다. 나는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는 뺨에 붙이고 있던 그의 손을 뗐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에 속옷을 입지 않은 아래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고 가지 그래?”

그는 여전히 내가 미덥지 않다는 눈으로 내 이마며 뺨, 그리고 목덜미로 손을 내렸다.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그 낮은 체온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진짜 괜찮다고 말하려다 문득 다른 생각이 일었다.

“그냥 자고 가라는 말이에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말이에요?”

“……뭐?”

그는 제가 잘못 들었냐는 듯 잠시 틈을 주었다가 이내 목소리를 키워 되물었다. 내 말 뜻을 제대로 받아들인 건지 단번에 좁아진 그의 미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끝까지 못 했잖아. 섹스하고 가라는 말 아닌가 싶어서.”

“너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당연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앉은 지건호에게서는 드문드문 떠오른 과거의 그의 모습을 겹쳐볼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은 건 단지,

“하고 싶으면 해요. 난 괜찮으니까.”

“넌 이 와중에 그게 하고 싶어?”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확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사랑했던 신지원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확실하다는 것을.

그것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그와의 잠자리가 수단이 되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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