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아침부터 창원댁이 부산을 떨었다. 내가 지건호의 방에서 밤을 보냈고, 마침 그곳에서 나온 지건호가 내 상태를 언질한 탓이었다.
“사모님. 몸살 나셨다면서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요새 너무 얇게 입고 다닌다 안 합디꺼.”
창원댁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 내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전복내장죽이었다. 옅은 풀색 죽 위로는 다소 과할 정도의 깨소금이 하트 모양으로 뿌려져 있었는데, 그에 내포된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지현민이 휩쓸고 간 지난밤, 그게 되레 약이 되어 나와 지건호 사이가 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니 창원댁은 그것마저 꾀병 취급 하는 게 분명했다.
사실 꾀병이 맞긴 했지.
“뭐 해. 먹어.”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지건호를 노려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태블릿에 둔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너 먹는 거 다 보고 갈 거야.”
그러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빨리 먹기나 하라는 소리였다. 정작 그의 앞에는 죽은커녕 끼니가 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머그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커피인가 했더니 그것마저 그냥 물이었다.
자기는 안 먹으면서 왜 나더러 먹으래.
곱게 생각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일종의 생색내기였다. 동시에 어젯밤 내 제안에 대한 괄시이기도 했다.
어제 내가 그에게 건넨 제안은 진심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객기 부리는 거라고 읽힌 듯했다. 그는 내가 내뱉는 모든 말을 헛소리, 아파서 하는 소리로 치부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아니, 뭐 내가 못 할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사람이 이제 와 웬 난리인가 싶었다.
갑작스러운 박대가 그리 놀랄 일도 아니긴 했지만 소박맞은 조선시대 여인처럼 청승 떨기도 뭐해서 그냥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기억의 조각도 맞출 겸.
내 신상을 읊던 기계음. 사고 당시를 알고 있는 지현민. 지건호와 나 사이의 몇 가지 일들. 그리고 희원…….
“떠먹여 줘야 먹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내가 하고.”
“알았어요. 먹으면 되잖아.”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퇴원한 이후로는 아침 식사는 대부분 걸러왔던 터라 이 시간에 뭘 먹는다는 행위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가 떠먹여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태블릿에 눈을 두고 있는 지건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나 슬쩍 눈을 내렸더니, 두 개로 분할된 화면 위로 각각 다른 뉴스가 띄워져 있었다. 하나는 해외 뉴스인 듯, 외국인 앵커가 나오는 영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김수연이 아침마다 뉴스를 정리하여 보고 올리곤 했었는데, 오늘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수연 씨 오늘 안 와요?”
“지방 출장 보냈어. 앞으로 종종 그럴 거야.”
흠. 어제 지현민 일 때문인가. 괜한 화풀이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내심 불편해졌다.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으로 깨작거리고만 있자 지건호가 태블릿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제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그는 갑자기 웬걸 궁금해하냐는 얼굴로 의자에 등을 붙였다. 아직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왜, 불편해?”
수연이 없어서 불편하냐는 말이었다. 그럼 뭐 편할까. 여태 수연에게 의지해 지내게 해놓고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떼놓으면 수족이 잘리는 느낌이지.
“뭐. 조금.”
“참아.”
그럴 거 묻지나 말든가. 어이가 없어 별 대꾸도 못 하고 있는데 그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왜. 또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있어, 이 집에?”
“그 목소리 좀, 낮추지 그래요?”
다 들리잖아. 나는 거실 쪽을 눈짓하면서 그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지건호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내 태도가 퍽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해 봐. 누가 너 괴롭히고 그래?”
“그런 사람 없, 아……. 하나 있긴 하네.”
“누구?”
단번에 표정을 바꾼 그가 눈썹을 살짝 비틀었다. 고개를 조금 뒤로 빼내어 사용인들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던 그는 편하게 말해 보라며 내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뭐, 굳이 힘들게 거기까지 볼 거 있나. 나는 죽을 한 술 떠 입에 넣으며 말했다.
“지건호 씨요.”
“뭐?”
“나 괴롭히는 사람 당신이라고. 이 집에서 당신 말고 누가 있어.”
깨소금 때문인가. 입 안 가득 고소함이 감돌았다. 아침을 챙겨 먹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나를 노려보듯 하던 지건호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옆에 있던 티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입가에 묻은 거나 잘 닦으라는 투였다. 나는 혀끝으로 입술 근처를 핥고는 그의 손에 들린 티슈를 낚아챘다.
딱히 묻어 나오는 것도 없구만. 깨끗하기 그지없는 티슈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그가 괜한 걸로 시비 걸었다는 걸 깨달았다. 유치하게. 할 말 없으니 저러는 거지.
나는 다시 태블릿을 작동하는 그를 보며 반항하듯 물었다.
“오늘은 어때요?”
“뭐가.”
“왜. 우리 어제 못 한 거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에 웃음을 실어 보냈다. 지건호가 대체 무슨 수작이냐는 듯 제 볼 안쪽을 혀로 둥글렸다. 답도 없다는 그 표정에 나는 되레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의사 선생님도 어쩌면 그게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
“욕구불만이야?”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 향한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제 뺨에 닿는 날 선 시선에도 끄떡없다는 양, 태연한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어 식탁 위로 내려놓는 머그컵 소리에는 약간의 화가 실린 것도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날 가만히 응시했다. 구긴 미간은 펼 생각도 없는 듯했다. 꾹 눌러 다문 내 입이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다 느꼈는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욕구불만이냐고 묻잖아.”
툭, 툭. 짧게 깎은 손톱이 성의 없이 대리석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거슬렸다. 소리를 따라 내린 시야 속, 그가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 또한 그리 유쾌한 감상을 주진 않았다.
나는 이어지는 재촉에 발끈해 눈을 치떴다.
“그런 게 아니란 거 당신도 잘 알지 않아요? 내가 말했잖아. 직접 확인도 했을 테고.”
“아, 확인.”
지건호는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올리면서 입술 끝을 당겼다. 그러고는 마치 반지를 숨기기라도 하듯 왼손을 내리고는 제 오른손으로 주의를 돌렸다. 손바닥은 천장을 향한 채였다.
“확인했지, 그래. 좋아서 덜덜 떠는 거.”
느릿하게 쥐었다 펴는 손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어젯밤 내 안을 실컷 헤집던 동작이었으므로.
욕구불만을 토로하기엔, 저 손 위로 얼마나 많은 불만을 쏟아냈던가. 좀처럼 흐려질 것 같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만족감을 논할 거라면 잃어버린 기억 속 밤을 모두 합쳐도 어젯밤과 견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직접 병원에 확인했다는 걸 말하는 거잖아.”
“뭐, 그러긴 했지만.”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요. 지건호 씨도.”
나는 헛숨을 작게 들이마셨다. 발끝부터 모멸감이 밀려들었으나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마쯤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숟가락을 힘주어 쥐었다 놓으면서 애원하듯 말을 덧붙였다.
“나, 정말로 기억을 찾고 싶어요.”
“…….”
“마침 기억도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답답한 것도 이제 조금 풀리는 거 같아. 살 것 같아. 그래서 기억만 다 찾을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써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는 식탁 주위를 배회하던 시선을 서둘러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까지는 내가 싫지 않다면.”
“핑계야.”
단칼에 내 제안을 거절한 것치고 납득할 만한 답은 아니었다. 그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내 눈을 보며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너 좋을 대로 갖다 붙이는 핑계라고.”
“…….”
“쉽게 말해 줘? 넌 지금 그냥 남자를 구걸하고 있는 거야, 지원아. 그 남자는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거고.”
그리 말하고는 건조한 웃음을 내뱉었다. 비틀린 입매 사이로 흐르는 자조적인 한숨은 짐짓 상처받은 저를 위로한다는 투였다. 꼴같잖은 자기연민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꼭 그가 아니어도 된다니. 어불성설이었다. 지건호는 내가 원한 섹스의 의미를 완벽하게 곡해하고 있었다. 어젯밤도 그저 몸이 달아 발정한 날 위해 제 한 몸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욕구불만이면 차라리 돈을 쓰는 건 어때.”
그는 제법 합리적인 제안을 한다는 어조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꾸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줄줄 설명이 늘어졌다.
“너 좋아하는 가방, 구두, 옷……. 뭐 그런 걸로 채워 봐. 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풀지 않았나 싶은데.”
“…….”
“아, 그런 건 아직 기억이 안 나나? 신지원 기억은 오직 섹스에만 한정된 거라.”
“두려운가 보네, 지건호 씨는.”
난데없이 내뱉은 내 말에 그는 갑자기 무슨 뜻이냐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뻣뻣하게 다물린 입술은 긍정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을 듯했다.
나는 그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를 보였다.
“이제 알겠어. 당신은 내 기억이 돌아올까 봐 그게 두려워서 이러는 거 맞죠?”
입술만 끌어올린 내 얼굴이 얼마나 기괴한 모습이었을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정말이지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비꼬아서 말한들 내게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걸 직감한 것 같았다. 제 속이 그대로 읽혀 불안한 것일 수도.
지건호는 분명 내가 예전의 신지원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알아들었어요. 당신 뜻대로 내 기억은 알아서 스스로 찾아볼게요.”
“…….”
“하긴, 섹스로 기억을 찾는다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죠?”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한 채 산뜻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카드나 줘 봐요. 욕구나 제대로 풀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