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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7)화 (27/60)

| 27화

신상윤은 안절부절못했다. 창백하게 질려서는 연신 초조하게 주위를 살피는 꼴이 보기 싫어 일부러 눈을 돌렸지만 귀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저, 사모님.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나야말로 괜찮으니 사양 말아요. 상윤 씨 이미지엔 이 모델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시착 가능하죠?”

상윤의 우는소리를 잘라내며 앞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매니저급으로 보이는 직원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미소 지으며 응대했다.

“그럼요. 요즘 젊은 남성분들께 특별히 인기 많은 모델입니다.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스포티하게 세련된 느낌이라 고객님 입고 계신 지금 착장과도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뭐 해요, 상윤 씨.”

나는 여전히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윤에게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차마 거절은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손목을 내어주는 상윤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본부장님 아시면 저 큰일 나요, 사모님.”

“그럴 일 없으니까 상윤 씨는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별로?”

“아니, 별로가 아니라요. 저는 정말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제가 어떻게 감히 사모님께 이런 걸 넙죽넙죽 받습니까.”

“받아도 돼요. 오늘 하루 종일 나 따라다니느라 상윤 씨 고생했잖아.”

그 말에 상윤이 펄쩍 뛰었다.

“그건 원래 제 할 일이고요, 사모님. 정당하게 보수도 받고 있습니다. 정 불쌍하다 싶으시면 아까처럼 커피나 한잔 사주셔도 충분하고요.”

“그 커피는 내가 사준 게 아니라 매장에서 나온 거지.”

그러고 보니 거기가 어느 매장이었더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이제 발바닥에 감각이 없어진 것 같았다.

“어쨌든 사모님 덕분에 저도 마신 거잖습니까. 간식까지요.”

매장에서 서비스로 제공한 커피라거나 수입산 과일 음료, 한눈에 봐도 값이 꽤 나갈 법한 간식들은 어찌나 소비지향적이었는지, 내가 돈을 쓰면 쓸수록 체급을 올리며 뒤따랐다.

처음엔 그저 고객님에 불과하던 내가 지금은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백화점 꼭대기 층, 일반 고객은 존재조차 모르는 이 방에서 편히 쇼핑하는 것도 다 그만큼 돈을 뿌린 결과였다.

그러니까 오늘 쓴 돈이 대략 얼마지. 팔찌를 마지막으로 샀을 땐가, 상윤이 팔찌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다 떼어낸다고 해도 오늘 산 거 다 팔면 지방에 있는 신축 빌라 하나는 매매 가능할 거라고 했는데.

그게 얼마인지는 가늠을 못 하겠다. 어쨌거나 백화점에 있는 꽤 높은 직원이 헐레벌떡 내려와 날 이 방으로 모셔올 만큼은 되었다.

VIP들 중에서도 백화점 내부에서 따로 관리한다는, 멤버십 등급 표기조차 없는 소수의 몇 명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방이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제품을 말하기만 하면 알아서 다 갖다 보였다. 요청한 대로, 요청한 만큼 매장에서 이 방으로 올려보냈기에 브랜드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편한 방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 많은 매장을 굳이 걸어 다닐 필요가 없었는데. 이왕 돈지랄하도록 카드까지 내 손에 쥐여준 거 이런 시스템도 미리 말해 주었으면 좀 좋을까.

지건호를 향한 불만에 속으로 혀를 차는데, 상윤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뱉었다. 손목에 있던 시계는 어느새 매니저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시계는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하기엔…….”

“아, 너무 저렴하구나. 좋아요. 이것보다 비싼 모델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묻자마자 상윤에게서 탄식하는 소리가 흘렀다. 나 같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게 익숙한지, 아니면 이럴 때 매뉴얼이 따로 존재하는 건지, 매니저는 동요 없이 몇 가지 모델을 따로 빼어 내게 내보였다. 그중 하나는 지건호가 차고 다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아, 사모님. 저는 진짜, 진짜 괜찮습니다. 나중에 본부장님 얼굴 어떻게 보라고 이러십니까.”

“뭘 어떻게 봐. 그냥 보면 되지.”

지건호 보는 데 달리 특별한 방법이 있나.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시계를 보는 것에는 요령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봐도 봐도 비슷한, 그게 그거인 것 같은 시계에서 시선을 들었다. 눈이 뻑뻑했다.

“자꾸 재미없게 굴지 말고 하나만 골라요, 상윤 씨.”

“저 말고 사모님 필요하신 거 더 쇼핑하세요.”

“나한테 더 필요한 게 뭐 있어.”

퍽 시건방진 말이었으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신상윤도 그건 맞는 말이라고 느꼈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다소 피로한 눈을 한 번 끔벅이고는 소파 위며 아래에 줄지어 놓인 쇼핑 봉투를 쳐다봤다. 일부는 한 차례 차에 싣고, 또 액세서리를 제외한 일부 옷이나 구두는 배송을 맡기고 남은 게 저 정도였다.

지금 내게 물질적으로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없었으니 욕심나는 것도 더는 없었다.

새삼 지건호라는 사람의 위치를 실감한 터였다. 마음만 먹으면 백화점 하나를 통째로 살 수도 있을 듯했다. 겨우 그의 카드 하나 빌려서 쓴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갈되지 않는 이 욕망은 대체 무엇인지. 잃어버린 기억을 탓하기에는 머리가 아닌 몸속 깊은 곳부터가 메말라가는 느낌이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그냥 물러가라는 식으로 매니저를 향해 눈짓하며 상윤에게 말했다.

“하기 싫으면 말아요.”

“역시, 사모님 막상 저한테 큰돈 쓰시려니 아닌 것 같다 싶으셨죠?”

천만다행이라며 상윤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고도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길래 나는 눈치껏 화장실이나 다녀오라며 옅게 웃었다.

상윤은 또 그날 병원에서처럼 사라지지는 않을까 나를 못 미더워하는 눈이었지만, 나는 이 많은 짐을 들고 혼자 어딜 가겠냐고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지건호의 것과 동일한 모델의 시계를 물끄러미 보던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명함을 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지현민이 남기고 간 구두 속, 그 명함이었다. 저와 연락이 닿을 거라던, 내 사고 당일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 연락하라던 바로 그 명함.

지현민은 매장으로 찾아가서 매니저 이름을 대면 될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신상윤이 계속 따라다니는 한 요원한 일이었다. 마땅히 그를 따돌릴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매장을 돌아다니기를 한참. 별로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괜히 사들이면서 상윤에게 커피며 주스, 차 등을 양보하듯 건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상윤도 사람인 이상 생리현상을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까. 언젠가는 그가 자리를 비울 때가 올 것이고, 그럼 그때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지건호의 돈을 쓴다는 것에 별 거부감이나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함마저 일었다.

욕구불만?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고. 공허한 머릿속도 어떻게 하면 혼자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겨우 신상윤을 따돌리긴 했는데…… 지금 눈앞의 이 직원에게 해당 매니저를 요청해 봐야 하나. 원하는 건 다 불러다 주는 곳에서 매니저 하나 부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 입술만 달싹이던 때였다.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연락 주세요, 사모님.”

시계를 정리하여 다른 직원에게 들려 보낸 매니저가 먼저 말을 꺼내며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 방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제작한 명함인 듯, 고급 용지에는 매니저의 이름과 전화번호만이 금박으로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어 명함을 받아 이름을 훑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류정혜입니다.”

류정혜. 내가 갖고 있던, 지현민이 주고 간 그 명함 속 이름이었다.

* * *

“아, 사모님. 저는 정말 큰일 난 줄 알았어요.”

“큰일이 나긴 했지. 상윤 씨에게.”

나는 화장실에 불이라도 난 줄 알았다며 상윤을 향해 심드렁히 대꾸했다.

“사모님,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고요. 제가 원래는 굉장하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냥 평소에 안 먹던 걸 먹어서 속이 놀랐을 뿐이라고요.”

상윤이 날 찾아온 건 그가 화장실에 간 지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시간. 얼마든지 핑계를 만들 수 있는 시간.

“앞으로 비싼 거 자주 먹여야겠네요. 상윤 씨 안 놀라게 하려면.”

“사모님, 저는 그런 거 일체 필요 없으니까 단독 행동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내가 또 없어진 줄 알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던 그는 이 넓은 백화점에서 날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앞날이 막막했다며, 그냥 사직서 제출할 생각도 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농담이 아니라 조금만 더 놀리면 진짜 울 것 같은 그 얼굴에 나는 그냥 웃어 버렸다.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요. 네? 그 위층에 계신 보안 담당만 아니었으면 저 진짜 뛰어내릴까 고민도 했습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그 직원한테 나 아래에 내려간다고 미리 말도 해뒀잖아요. 그래서 상윤 씨도 바로 나 찾은 거고. 대체 뭐가 문제야?”

“바로 찾, 이게 어떻게 바로 찾은 겁니까, 사모니임. 제가 여기 이 층만 해도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여기는 왜 내려오신 건데요?”

“미안해요. 따분해서 그랬어.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지 좀 걷고 싶기도 했고.”

조금 전, 매니저인 류정혜를 따라 내려간 곳은 그녀가 일하는 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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