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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8)화 (28/60)

| 28화

류정혜는 급하게 호출받고 올라오느라 몰랐다며, 응대할 상대가 나일 줄 알았더라면 미리 준비했을 거라고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래도 다행히 타이밍이 맞아 혼자 계시는 사이에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덧붙이며.

내 신상을 밝힌 적도 없는데 류정혜는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다른 직원들은 내 얼굴을 딱히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던데.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내가 방문하자마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환영한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태산이라는 이름을 댔다면 태도가 달라졌을 테지만, 적어도 내 외형만 가지고는 그들은 내가 태산 쪽 며느리라는 걸 알지 못했다.

지건호의 말대로 사고 전 내가 사치가 심한 사람이었다면 내 얼굴 정도는 알 법하지 않나.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곳이니만큼 다양한 변수가 있겠거니 싶었다.

류정혜가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조금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현민과 내통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내가 자신을 찾을 줄 알았다면 내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꿰고 있는 게 당연했다.

어쩌면 내 기억에 구멍 났다는 걸 알 수도 있고.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정보라고는 지현민에게 받은 명함이 전부였기에, 류정혜가 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이게 뭔가요?’

류정혜가 내게 내민 것은 그녀가 일하는 매장의 브랜드 로고가 찍힌 작은 상자였다. 아마도 다른 직원이나 매장에 있는 손님들 눈을 의식한 듯했다.

‘포장은 댁으로 가셔서 열어보시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 아…… 네.’

당연히 지현민이 그랬겠지.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의 끝을 흐리고는 상자를 손에 넣었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의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메시지 같은 건 따로 없었나요?’

‘구매하신 손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건 없었어요. 그래도 분명 취향에 걸맞은 선물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류정혜는 봉투에 한 번 더 담아갈지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상자가 담긴 봉투를 건네받았다. 류정혜와의 만남은 그게 전부였다.

“본부장님께 말씀 좀 드려 주세요.”

“뭘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상윤을 돌아봤다. 지친 기색이 만연한 상윤의 손에는 류정혜로부터 전달받은 그 봉투도 같이 들려 있었다.

다행히 상윤은 제 부재 동안 새로 추가된 봉투에 대해 큰 관심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강제로 제게 안길 뻔한 시계가 아님에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손목 아래로 흘러내린 쇼핑 봉투를 추어올린 상윤이 다시 말했다.

“사모님 휴대폰이요. 제가 불편해서 안 되겠습니다.”

상윤의 말인즉슨, 지건호를 설득하여 나도 휴대폰을 하나 만들라는 소리였다. 퇴원한 지가 언젠데 이제는 만들어도 되지 않냐며, 오늘 같은 비상 상황이 또 오면 연락할 수단이 꼭 있어야겠다면서.

거기엔 나도 일정 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당장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벌써 길들여졌던 건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지건호는 내가 다른 사람과 연락하는 걸 꺼릴 테니…….

나는 상윤의 손을 흘깃거리던 눈을 거두고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 사람이 안 된다는 거 내가 별수 있나. 난 설득할 자신 없어요.”

“에이…….”

그 말에 상윤이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내가 할 법한 말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되레 황당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가 에이야. 나 지건호 못 이겨요.”

“에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틀렸습니다.”

“틀리다니, 그럼 내가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소리예요?”

“제가 볼 때는, 네.”

당연하지 않냐는 듯 자신만만한 상윤의 대답에 헛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상윤은 제 말에 나름대로 확신이 있다는 듯 다부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사모님께서 이기셨다기보다는, 이제껏 본부장님께서 져주시던 거에 가깝긴 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희한한 억측에 눈을 흘기며 발을 옮기자 상윤이 웃으며 따라붙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원래 사모님 외출은 병원 가시는 날밖에 없었는데, 본부장님께서 오늘 사모님을 위해 특별히 쇼핑 허락하셨잖아요. 그것도 기분 전환하시라며 무려 블랙카드까지 딱 쥐여주시고.”

“그거는 상윤 씨가 제대로 몰라서 그런 거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하여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삐죽하게 가시 돋친 눈길에도 상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다 들었거든요. 오늘 아침에 본부장님께서 사모님께 죽까지 떠먹여 드렸다는 거. 아무튼 보기보다 은근 자상하시단 말이죠.”

“아, 됐어요. 두 번 자상했다간 아주 큰일 나겠네.”

떠먹여 주긴 누가 떠먹여 줬다고. 물론 지건호가 내 입에 숟가락을 들이밀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닥치고 죽이나 먹으라는 식의, 입을 틀어막는 행위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말은 듣기 싫다는 뜻으로.

도대체 오늘 아침 그 식탁에서의 대화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와전될 수가 있는 거지? 보는 눈이 그렇게 많았는데 기이할 노릇이었다.

나는 상윤의 과한 아부성 발언이 듣기 싫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돈도 쓸 만큼 다 썼고, 지현민이 내게 남긴 것도 손에 얻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사모님, 조금만 천천히요!”

손에 든 짐이 많아 버거운지 조금씩 뒤처지던 상윤을 기다리며 속도를 늦출 때였다. 문득 시야에 뭔가 걸렸다.

나는 홀린 듯이 발을 옮겼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냥……. 예뻐서.”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손에 들린 것은 자그마한 아이 옷이었다. 잔 꽃무늬가 가득한 원피스. 옆에는 같은 패턴의 성인 옷이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엄마와 아이가 같이 입을 수 있게끔 만든 것 같았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 직원이 웃으며 설명을 곁들였다.

“예쁘죠? 저희가 이번에 팝업 스토어로 백화점에 들어왔는데, 이 옷이 지금 제일 인기 많은 제품이에요. 봄가을 원단이라 지금 입히기에 딱이에요. 입혀 놓으면 더 예쁘고요.”

“…….”

“저희 제품이 명품 브랜드에 납품하는 공장에서 만든 거라 마감 처리가 차원이 달라요. 왜, 세탁기 잘못 돌리거나 건조기 들어갔다 나오면 엉망 되는 거 많거든요. 그런데 이 제품은 아니에요. 그래서 고객님들도 다시 오셔서 다른 색깔로 더 사가고 그러시더라구요.”

상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의 허풍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적당히 흘려들으며 옆에 있는 다른 옷으로 눈을 돌렸다. 원피스와는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의 겉옷이었다. 딱히 성별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

나는 그 소매 끝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이 정도면 얼마나 작은, 아니…… 얼마나 큰 아이가 입는 거예요?”

내 표정이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내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쯤은 말을 이으면서도 알 수 있었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음, 이 사이즈는 보통 돌 전후로 많이 입어요. 그때쯤이면 이제 막 걸어 다닐 때거든요.”

“아아.”

“이 시기면 외출도 잦고 그럴 때라 이런 옷 하나 있으면 아주 요긴하게 입히실 수 있어요.”

“그렇군요.”

이걸 입고 걸어 다닐 걸 상상하니 제법 귀여웠다. 돌 정도 되면 애들은 걷는구나. 만약 내가 아이를 잃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옷을 준비하곤 했겠지.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에서 걸음마 연습도 하고.

가져본 적도 없는 기억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젖어드는 것 같았다. 눅눅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어 자리를 떼려는데 직원이 눈치껏 말을 붙였다.

“저희가 오늘 프로모션으로 당일 한정 세일 진행하거든요. 이 제품도 원래는 가격대가 제법 있는데, 혹시 멤버십 어플 아직 안 받으셨다면 신규 발급 쿠폰도 중복으로 쓰실 수 있어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신상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 용품은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자며 내게 눈짓하는 상윤을 외면하며 나는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이걸로 포장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사이즈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일 작은 걸로 주세요.”

알았다며 새 제품으로 꺼내주겠다는 직원을 따라 간이 계산대로 향했다. 뒤에서 상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이 옷의 사이즈를 내게 확인시켜 준 직원이 종이상자에 옷을 개켜 넣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저희가 사은품으로 아이 양말도 같이 증정하고 있는데요, 혹시 아이 성별이 어떻게 될까요?”

“성별…….”

“네.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거 잘 안 따지고 싫어하시는 분도 많지만, 이건 그래도 구분 짓게 나와서 여쭤봐요. 나름 귀엽게 나왔어요. 보세요, 귀엽죠?”

직원이 두 켤레의 각기 다른 양말을 꺼내 보였다. 하나는 공주, 또 다른 하나는 왕자라고 수가 놓여진 양말이었다.

“아, 귀엽네요.”

나는 그렇게만 대꾸하고는 마땅히 대답을 주지 못했다. 둘러댈 이유가 없어 그냥 양말은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게 좋겠네요, 공주.”

익숙한 손가락이 공주가 수놓인 양말을 툭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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