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9)화 (29/60)

| 29화

지건호였다.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선 그는 저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직원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내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관계인지 의아해하던 직원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말을 챙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얼어붙었다. 지건호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을까. 혹시 신상윤이 무슨 얘기를 흘렸나. 등 뒤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상윤 역시도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지건호는 제게 봉투를 건네는 직원을 향해 예의 가식적인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그 손놀림에 나는 별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누가 신나게 알려주던데.”

“누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말에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싼 손을 풀고는 내 손에 든 제 카드를 빼앗아갔다. 지갑에 카드를 다시 넣은 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결제 문자를 지우며 말했다.

“종류별로 아주 열심히도 털었네. 신나셨겠어.”

“……아직 다 사려면 멀었어요. 카드 다시 줘요.”

“또 뭘 사려고.”

그는 다행히도 내가 산 아이 옷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기분껏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사는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뻥 뚫린 공간 아래,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매장을 가리키자 지건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긴 왜 또?”

“우리 집에 개소리를 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사료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저곳에 네가 필요한 게 뭐가 있냐고 묻던 눈이 가늘게 좁아 들더니 이내 끝을 휘었다. 그 얄궂은 눈웃음에 되레 멋쩍어져 가만히 있었더니 지건호가 상윤을 돌아보고는 오늘 수고했다며, 먼저 들어가 보라는 말과 함께 지갑에 든 5만 원권 몇 장을 건넸다.

내가 주는 건 그렇게 마다하더니 지건호가 주는 돈은 그냥 받겠다는 건지, 별 투정도 없이 현금을 넙죽 받아 든 상윤이 그것도 마저 달라며 지건호의 손에 들린 봉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건 됐으니 지금 손에 든 거나 잘 들고 가세요. 그나저나 차에 다 실을 수는 있나 모르겠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잠시 시선을 내렸다 올렸다. 이렇게까지 많이 살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자기가 다 사라고 해놓고서는. 그러나 나도 조금은 찔리긴 했기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다 못 싣겠으면 내 차에도 싣고. 차 키 줘?”

“아, 아닙니다. 본부장님 차에 어떻게 감히.”

“감히는 무슨. 신상윤 씨가 운전하는 그건 내 차 아닌가. 받아요.”

피식 웃은 지건호는 상윤을 향해 제 차 키를 가볍게 던졌다. 팔에 봉투를 잔뜩 걸친 상윤이 어어, 거리며 손을 벌려 차 키를 겨우 받았다.

“고등학교 때 야구 했다더니.”

“저는 투수였지 말입니다.”

“투수는 공 안 받아?”

지건호의 핀잔에 자못 억울하다는 듯 눈썹 끝을 늘어뜨린 상윤이 그만 가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려던 때였다.

“아, 차 키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상윤은 가만히 선 채로 지건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그에게 상윤이 제가 빨리 짐을 갖다두고 차도 로비 앞으로 가지고 오겠다고 했지만 지건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셔츠 소매를 당겨 시계를 확인한 그가 옆에 있는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상윤에게 말했다.

“그냥 프런트에 맡겨요.”

“프런트요?”

“여기 옆에 호텔 프런트. 그러면 되겠네.”

나름 현명한 묘안이라는 얼굴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나밖에 없었다. 잠시간 머리를 굴리던 상윤이 “아,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두어 번 내뱉었다. 그러고는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실현 불가능한 말을 덧붙이고는 먼저 가시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속셈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신상윤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다 싶어 지건호와 같이 발을 떼는데, 문득 상윤의 손에 들린 봉투가 생각났다. 류정혜, 그러니까 지현민이 그녀를 통해 내게 전달한 그것.

저걸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갑자기 상윤에게서 저 봉투만 달랑 가져오면 지건호가 수상하다고 여길 게 분명했다. 보나 마나 뭐냐고 묻겠지. 뭐 중요한 게 들었길래 그것만 챙기냐고 의심부터 할 것이다. 나는 딱히 대답할 수도 없을 거고.

당연했다. 나도 아직 내용물이 뭔지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저렇게 그냥 보내는 게 맞는 걸까. 잃어버릴 걱정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봉투와 같이 차에 두는 이상 오늘 중으로는 내 손에 들어올 테니까. 아니, 그의 차에 싣게 된다면 내일이 되려나…….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의 눈을 피해 내게 잘 전달되기만 하면 되겠지만.

나는 조급하게 솟아오른 불안함을 감추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여긴 진짜 왜 왔어요? 설마 카드값 걱정되어서 온 건 아닐 테고.”

“걱정될 만큼 썼다는 걸 알긴 아나 보네.”

“그거야……. 진짜 그 정도예요?”

주위를 쓱 훑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러자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얄밉게 올라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비죽 삐져나왔다. 내가 농담이라도 한다는 투였다.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맹탕이네.”

“그거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예요?”

“그럼 여기 신지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누가 있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쳐 지나간 사람만 해도 얼만데.

유치하게 반박하려다가 그 스쳐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에게 어깨를 살짝 부딪혔다. 아, 작게 신음하며 웅크린 몸에 지건호의 손이 닿았다.

“괜찮아?”

“……응.”

별것도 아닌데 과잉보호한다 싶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어깨를 비틀었지만 그는 되레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왔다. 이제 와 보호자 행세라도 하려는 건지, 벌써 저만큼은 멀어진 상대를 노려보는 얼굴이 제법 웃겼다.

“됐으니까 놔요.”

“이래서 네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거야. 알아?”

또 웬 남 탓인지. 자기가 싫어하는 거겠지. 기억 못 한다고 날 맹탕 취급 하는 사람은 바로 지건호 본인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어깨에 붙은 그의 손을 떼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치 제 손이 군장이라도 된다는 양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손과 씨름하기엔 오늘 쌓인 피로감이 어마어마했다.

“피곤하니까 어서 가요.”

“어디를 갈 줄 알고.”

“호텔로 간다며.”

아니냐고 쏘아보는 눈에 지건호가 건조한 웃음을 날렸다.

“아, 그걸 기대하고 있었나 보네. 내 아내가 욕구불만이라.”

“뭔 소리야. 먼저 호텔 얘기한 건 당신이에요.”

“그래. 나는 시간도 이렇게 된 거 호텔에서 저녁이나 먹을까 했지.”

“…….”

“아쉬워서 어떡할까.”

나는 비겁하게 말을 붙이는 그를 위아래로 흘겨보다가 대답 없이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단단하게 근육이 선 허벅지 위로 손톱을 박아넣을 듯 힘을 주자 순간 그의 턱이 뻣뻣하게 굳는 게 눈에 보였다. 내색은 못 해도 적잖이 아프긴 했을 것이다.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밥만 먹는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요. 그렇다고 내 허벅지를 꼬집을 수는 없어서.”

“…….”

“진짜 욕구불만인가.”

마침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그에게서 벗어난 나는 입술을 깨물며 먼저 발을 옮겼다.

기분 탓일까. 욕구불만이라는 그 말이 어쩐지 노랫말 같기도 했다.

* * *

우리는 서울 시내 야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사 메뉴는 한우를 메인으로 한 한식 코스 요리였는데, 미슐랭에도 선정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손님이 별로 없어 보였다.

어중간한 시간대도 아니고 한창 사람들 많을 시간 아닌가. 의아함에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눈이 마주친 직원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신가요?”

“아, 아니요. 너무 맛있어요.”

레스토랑 총지배인이라는 그녀는 창원댁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지건호와도 이미 잘 아는 사이 같았는데, 아마도 그가 꽤 예전부터 자주 찾던 곳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을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달라는 지배인을 물끄러미 보며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도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곳의 음식이나 분위기,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소리도 좋았고.

“좋아했었나 봐요.”

뜬금없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괜히 입 주위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 레스토랑 말이에요. 예전에도 좋아했던 것 같아. 느낌이 그래.”

“…….”

“내 처지에 가격이 비싸서 자주 오진 않았을 텐데. 혹시 데이트할 때 오던 곳이에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그는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식사나 마저 하라며 내 앞에 놓인 접시를 눈짓했다. 설마 여기서도 내 입에 강제로 숟가락을 갖다 댄다거나 하진 않겠지. 나는 서둘러 젓가락을 고쳐 쥐었다.

“말했잖아요. 기억 찾고 싶다고.”

“알아서 찾을 거라며.”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러자 그가 몸을 뒤로 살짝 물리며 의자에 등을 붙였다.

“맞아. 자주 왔었지.”

느긋하게 머릿속을 헤집던 눈이 내 얼굴을 지나 창밖으로 향했다. 어딘가에 있을 별을 헤아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던 그가 씁쓸히 읊조렸다.

“너 임신하고는 몇 번 못 왔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