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지현민의 그 난잡한 생활을 다 알면서도 여자 측이 약혼을 감수했다는 건, 태산과의 결혼으로 자신에게 떨어질 경제적 이익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일 것이다.
대단도 하시지. 태산이 뭐라고 제 인생을 그깟 남자에 허비하나. 제 능력도 대단하다는 여자가…….
속으로 혀를 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능력 있는 여자도 멀쩡한 남자와의 안온한 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놓지 못하는 태산. 그런 태산에서 나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를 과연 고이 받아 주었을까.
아무리 지건호가 제 집안에서 탄탄한 입지를 쌓은 사람은 아니라지만 그가 태산의 피를 물려받았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지주사 분할로 지현민에게는 화학, 지건호에게 건설 자리가 돌아갔다는 건 사실상 태산의 후계자 구도에서 지건호가 더 우위를 차지했다는 방증이었다.
앞으로 빠르면 10년. 그사이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어쩌면 제 아버지 자리에까지 오를 수도 있는 사람. 아니, 지건호는 기필코 그곳에 올라야만 하는 사람일 테다.
그럼 그때의 내가 설 자리는 어디가 될까. 그의 옆, 혹은 그 아래. 아니면 지금처럼 한 발 뒤, 있는 듯 없는 듯한 자리?
나는 여전히 호텔 측 직원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건호를 흘긋 쳐다보고는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미끄러질 것처럼 윤광을 내는 대리석 바닥은 샹들리에가 떨군 빛을 반사하여 얼핏 별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을 밟고 선 내 구두는 비로드 원단의 짙푸른 검은색으로 마치 별을 품은 우주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해당 브랜드 직원이 이 구두를 두고 줄곧 묘사하던 고혹적이라는 말이 뭘 뜻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디 이것만 그럴까. 당장 내가 입고 있는 원피스며 손에 든 가방, 줄줄이 두른 액세서리 등 날 치장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치 이런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지건호가 아니었다면, 그와 결혼하기 전의 신지원이었다면 감히 꿈꾸어 보지도 못했을 삶.
나는 이런 순간을 위해 지건호와 사랑을 나눈 걸까. 그렇다면 이를 위해 지건호가 기꺼이 감수한 건 과연 무엇일까.
사실상 환영받지 못한 결혼이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입원했을 때를 비롯해 퇴원한 지금까지도 나는 지현민을 제외한 지건호의 본가 쪽 사람들은 뉴스에서나 봤지 간단한 전화 통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물론 내 상태가 온전치 못했고, 검찰 수사 관련으로 집안이 정신없었던 탓도 있었겠으나, 그건 아마도 지건호가 제 결혼에 관한 것을 포털사이트에서 지운 것과 같은 맥락이겠지.
태산 쪽에서는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결혼이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이 하나둘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가족에 대해 뭔가 숨기려는 듯하던 지건호. 그런 그의 휴대폰에서 몰래 발견했던, 정황상 내게 다른 남자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던 그 문자. 그리고 그가 술김에 흘린 ‘희원’이라는 이름.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한 결혼을 했을까. 그 결혼 생활이 과연 내 기억처럼 행복하긴 했을까…….
“못 들었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번뜩 스친 기억에 잠시 이지를 잃었던 눈이 재빨리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이미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지건호의 얼굴 위로 다소 짜증이 어려 있었다.
“뭐라고 했어요?”
묻는 말에 한숨을 짧게 내뱉은 그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오기가 일어 그를 붙잡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예의 그 불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말해 줘요. 못 들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그래.”
“그냥 잠시…… 좀 피곤해서. 오늘 많이 걷기도 했고.”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에 지건호가 내 무릎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간 내 구두를 쳐다보던 그는 이내 컨시어지 직원을 향해 그렇게 하겠다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직원이 내심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서두르는 듯한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하겠다고 한 거예요?”
“불편하지 않아?”
대답은커녕 되묻는 질문에 의아한 눈으로 지건호를 바라보자 그가 내 구두를 훑어보던 눈길을 들어 올렸다. 아마 조금 전 내 변명을 염두에 두고 묻는 말인 듯했다.
“이 구두를 묻는 거라면 지건호 씨가 친히 걱정해 줄 만큼 불편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 걱정해 줘서 정말 고맙네요.”
“그것도 오늘 새로 산 건가?”
산 거면 어떻고, 전부터 있던 거면 어떤가. 설마 이 남자 지금 자기 돈 많이 썼다고 이제 와서 바가지라도 긁는 건가.
뚱한 눈으로 쳐다만 보며 답을 삼키자 지건호가 피식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뺨에 팬 옅은 보조개가 퍽 장난스러웠다.
“아쉽겠지만 그거 네 취향 아니야.”
“……내 취향이 뭔데요?”
“네 마음에 드는 게 네 취향이겠지.”
뭐 특별할 게 있겠냐며 당연한 소리를 내뱉던 그는 곧장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걸로 해. 남들이 골라주는 거 무턱대고 다 하지 말고.”
“…….”
“날 열받게 만들 계획이었다면 오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야. 아, 신 대리한테 진짜로 시계를 사줬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고.”
그 소리는 또 언제 전해 들은 거야. 정말이지 어떻게 된 게 비밀이 없다. 내가 닿은 흔적은 하나같이 다 지건호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이 갑갑해졌다.
“당신 마음에 안 든다는 거겠지. 내 취향이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다소 욱한 마음에 쏘아붙였다. 괜히 내 취향 핑계를 댈 필요가 있을까.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퇴원하던 그날처럼 제가 원하는 대로 인형놀이를 시키면 될 일이었다. 내가 거기 놀아나 줄지는 미지수겠지만.
“그 말 아니에요?”
내 말이 틀렸냐고 따져 묻자 지건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길게 훑는 시선이 자못 정성스러웠다.
“아니. 싸구려 같고 좋은데, 왜.”
“뭐라고요?”
“내 취향이라는 소리야.”
찰나 닿았던 그 서늘한 눈빛에 발가락이 곱아드는 것 같았다. 불쾌감을 짓밟으며 헛숨을 삼키는데 시야에 컨시어지 직원이 잡혔다.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한 번, 그리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지건호를 한 번 번갈아 보다가 지건호에게 슬쩍 팔짱을 꼈다.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본부장님. 많이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뜬금없는 행동이다 싶었는지 날 보며 눈썹을 비틀어 올리던 지건호는 이내 고개를 돌려 괜찮다며 직원을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날 아주 내칠 생각은 없었는지 내가 불편하지 않게끔 제 팔을 살짝 굽혀주는 태도가 답지 않게 친절했다.
컨시어지 직원은 우리를 에스코트하며 엘리베이터로 발을 옮겼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뒤를 따랐다. 지금 어딜 가는 거냐는 질문이 혀끝에 고였지만 차마 뱉지는 못했다.
호텔에 꼭 자러 가냐고, 레스토랑에 갈 거라며 그가 내 말을 비웃은 탓도 있었지만, 이제 저녁까지 다 먹은 이상 호텔에서 특별히 갈 수 있는 곳이 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객실 내부를 둘러보며 몇 가지 설명을 끝낸 직원의 정중한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객실까지 올 거면서 웬 내숭이었는지.
나는 그래 봐야 별거 있냐는 눈으로 창에 비친 지건호를 쳐다봤다. 직원을 돌려보낸 그는 마무리할 일이 남은 듯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객실은 우리가 저녁을 함께한 레스토랑과 비슷한 방향이었으나 그보다는 훨씬 위층이라 내려다보기엔 시야가 다소 아찔했다.
몇 번 방문했다던 레스토랑과는 달리 마냥 익숙한 기분은 아니라 망연히 아래만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옆에 나란히 선 지건호가 유리에 비쳤다. 그는 제게도 오늘은 고된 하루였다는 듯 피로가 짙은 기색으로 말했다.
“마땅히 남은 객실이 없어서 그냥 여기라도 달라고 했어. 그렇다고 이곳보다 더 좁은 곳은 네가 불편할 거고. 아까 로비에서 물었던 것도 그 말이었어.”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목적은 뻔한 곳인데 방 크기가 뭔 상관일까.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다 풀어놓을 힘은 없어 짧게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그나저나 그럼 이 객실보다 더 넓은 곳도 있다는 말인가. 새삼 지건호의 재력이 실감 나서 속으로 자조했다.
오늘따라 지건호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게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겨우 찾은 기억마저 조작된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확실한 단서, 지현민이 내게 남긴 그것을 빨리 찾아야 했다. 아까 신상윤의 손에 넘어간 그 봉투는 집에 잘 도착했을까. 어쩌면 지건호의 차에 뒀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건호의 차에 있는 거라면 그의 손이 닿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 확인해야 했다. 그가 씻는 틈을 타 주차장으로 가볼까. 아니면 더 안전하게 잠들어 있을 시간을 노려야…….
나는 먼저 씻을 건지 그에게 물어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곳곳에 심어 놓은 눈과 귀가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단독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다. 집이 아닌 이곳까지 날 데려왔을 땐 이미 몇 수를 더 읽었을 게 분명했다.
일단 천천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침착하게, 여유를 부리되 긴장을 늦추지는 않고. 마치 지금의 지건호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나 꼬리잡기라도 하듯 붉은 미등을 좇던 것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우리요.”
지건호가 나를 보는 게 창을 통해 비쳤다.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대신 유리창에 맺힌 그의 허상을 붙잡고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