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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32)화 (32/60)

| 32화

“우리, 왜 결혼했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얼굴은 더 심각했다. 이런 모습을 보자고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조금 난감했다. 단어를 더 골라냈어야 했나 후회했지만 이왕 입을 연 거 그냥 이어붙이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지건호 씨한테 묻는 거예요. 사실 내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는지는 알 것 같거든. 근데 당신 마음은 잘 모르겠어서.”

“…….”

“왜 나랑 결혼했어요? 도움 될 것 하나 없는 배경에 별로 봐줄 것도 없다면서.”

“…….”

“아니, 말을 잘못했나. 왜 나랑 이혼 안 해요?”

꼭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질문에 지건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는지 건조하게 흩뿌린 웃음은 점점 살을 불렸다.

그러면서도 날 빤히 쳐다보는 눈매는 한 번도 휘지 않았다. 거짓 웃음이었다. 상황을 면피하는 데 급급한, 기억을 도려낸 자리를 급하게 채워 넣으려는 웃음.

아마 지금 지건호는 뭘 알긴 알고 지껄이는 거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혼을 요구한 건 전적으로 나였고, 그는 내가 내미는 서류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사람이니까.

“왜.”

그래, 왜. 나야말로 그리 묻고 싶었다. 내가 왜 이혼을 요구해야만 했는지.

“뜬금없이 웬 헛소리야.”

그리고 그는 왜 예나 지금이나 내 말을 헛소리 취급 하는 건지.

“헛소리라기엔 당신이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정상적인 부부 사이는 아니잖아.”

순간 피로해진 기억에 두통이 일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치며 등을 돌렸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지건호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생각을 다듬었다.

사실 시간을 조금 끌어보고자 내뱉은 말이었는데 막상 꺼내놓고 나니 그 이유도 궁금해졌다.

지건호와 신지원. 이 두 사람이 억지로 붙어 있을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이나 나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어요. 발목 잡는 아이도 이제 없겠다, 서로 사랑도 안 남은 관계에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이만하면 적당히 말을 돌리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이야기는 자충수가 될 게 뻔했고, 그 짧은 기억을 운운하며 우리의 사랑을 논하기엔 내가 가진 단서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어디가, 어떻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돌아보기도 전에 어깨가 잡히더니 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마주 본 지건호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선 증오와 맞닿아 있었다.

“다시 말해 봐. 어디가 어떻게 정상이 아닌데.”

“굳이 설명이 필요해요?”

“혹시 너, 아이 말고 다른 기억이 더 떠오른 거야?”

말하자면 그는 애써 지켜왔던 여유를 잃은 것만 같았다. 내가 뭘 더 되찾았을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그 모습에 가슴 언저리에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또다시 반복된 상황.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원점. 그러나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우리가 그리는 원점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되찾은 기억은 내게만 희망이었지, 지건호에게는 증오로 굴절될 뿐이었다.

“아쉽게도 그런 거 없으니까 이거 놔요.”

더 말씨름할 기운도 없다는 듯 몸을 틀어보려고 했으나 날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워낙 단단한 탓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반항하길 포기하며 조용히 말했다.

“씻고 올 테니까 이거 놓으라고. 섹스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괜히 힘 빼지 말아요. 피곤해.”

“내가 지금 너 붙잡고 떡이나 치자고 올라왔어?”

그럼 아니라는 말인가. 되레 당황스러워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내 표정을 읽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신지원. 네 목적이 그거였지 참.”

“…….”

“그래, 넌 원래 그랬어. 처음부터 그 잘난 복…….”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한 번 짓누른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집요하게 날 응시하는 눈동자는 마치 밤을 집어삼킨 바다처럼 어둡고 캄캄했다.

“그 대단한 기억 한번 찾아보겠다고 아무한테나 다리 벌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 너는.”

“그딴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나아져? 그리고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적어도 내가…….”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기억의 파편이 내 목을 틀어막고는 감히 거짓을 고하려는 내 입을 벌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와 나눈 사랑을 모조리 부정하려는 속삭임이 환청처럼 들렸다.

‘어차피 지건호는 사랑이 고픈 놈이니까, 그런 수작질도 딱히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낯설지만은 않은 목소리. 변조된 기계음이었지만 언젠가 이런 말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꽤 최근까지도…….

‘그딴 개수작 다 품을 만큼 내가 너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건 지건호의 목소리. 화를 내는 걸로 봐서 내가 이혼을 운운하던 상황 이후인 듯했다.

……개수작.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박힌 단어가 이명처럼 신경을 긁었다.

순간적인 통증에 잠시 비틀거리자 지건호가 반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냐고 묻는 눈에 말없이 그의 팔을 내쳤더니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욕설을 짓씹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때의 그도 지금처럼 화를 냈을 터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처지일 뿐. 그를 상대로 벌였던 개수작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내가 뭘 노렸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내 기억 하나 찾겠다고 그에게 달려드는 꼴인 건 분명했으니까.

만약 그 상대가 지건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나는 그가 가정하고 있는 상황을 섣불리 부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욕실로 발을 옮기려던 때였다.

“조금 있으면 김수연 올 거야.”

나는 눈매를 좁히며 그를 돌아봤다.

“수연 씨가 왜 와요?”

“너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잖아.”

“어딜……. 당신 어디 가는데?”

“출장.”

“갑자기? 그런 말 없었잖아. 진작 말을 하죠, 그럼.”

“언제부터 네가 내 스케줄을 궁금해했다고.”

그는 당장 몇 시간 뒤 새벽 비행기로 출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럴 거 집으로 바로 가지 왜 여기까지 왔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지건호가 저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나는 잠시 달싹이던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어차피 회사에서 픽업 나올 거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그냥 여기서 눈 붙이고 가요.”

“…….”

“섹스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기회. 내내 모색하던 그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우리를 또 다른 원점으로 되돌릴 기회. 내가 기억해야만 하는 그날 일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그 기회.

* * *

내가 씻고 나올 때까지도 지건호는 객실 안에 있었다. 내심 먼저 가 버렸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한 가지 더 다행이었던 건 그는 정말이지 섹스까지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 일이 많은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눈에 피로가 가득했다.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의 소파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헐겁게 여며졌는지 배스 가운 앞섶이 가슴선을 따라 벌어졌다. 정작 그는 짧은 시선 한 번 내게 주지 않았으나 괜히 멋쩍어 가운을 움켜쥐었다.

“출장은 어디로 가는 건데요?”

“독일.”

“아, 경남권 철도 사업 그거 때문인가.”

이래 봬도 들은 게 좀 있다고 알은체하자 지건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더 나눌 말은 없었기에 나도 입을 그만 다물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린 그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그런데 그 출장, 김수연 씨랑은 같이 가는 게 아닌가 봐요.”

“…….”

“수연 씨는 여기 언제 와요?”

“…….”

“그냥 오지 말라고 해요. 나 혼자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중요치 않았다. 나조차도 신경은 온통 그의 차에 있을지도 모를 지현민이 남긴 상자에 가 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신상윤이 벌써 집으로 옮겨놨을지도 모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집요할 이유가 있나 싶다가도, 사람이 가진 게 없다 보니 전적으로 수중에 있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인가 싶었다.

보통 차 키를 재킷 안주머니에 보관하던가. 아까 백화점에서 상윤에게 차 키를 건넬 때 어디에서 꺼냈더라. 바지 주머니였던가.

그의 허벅지 부근을 더듬듯 쳐다보는데 무언가 불룩한 것이 눈에 보였다. 저기 있는 거 같은데. 어떻게 꺼내지. 무작정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어할 사람이 없으니 집착에 가까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지현민이 그곳에 남긴 게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그걸 되찾으려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상념을 흩날리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는지 그는 줄곧 보던 휴대폰도 소파 옆에 뒤집어놓은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허벅지 부근을 배회하던 눈길이 민망해졌다. 괜스레 뺨에 열이 올랐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지건호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먼저 말했다.

“한 시간.”

……뜬금없이 뭐가?

맥락 없는 말에 눈으로만 묻자 시계를 한쪽에 풀어놓은 그가 재차 말했다.

“그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

“…….”

“괜찮냐고.”

“그러니까 뭐가요?”

그러나 그가 말한 게 무엇인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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