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지건호는 저를 찾는 벨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날 한 번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젖은 몸 그대로 욕실을 벗어났다.
화가 난 걸 미처 감추지도 못하는 뒷모습이었다. 근육으로 올라붙은 엉덩이를 지나 굵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물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성난 흔적을 남겼다.
나는 그가 멀어진 사이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가지를 챙기며 차 키를 따로 손에 쥐었다. 곧 있으면 해외 출장을 갈 테니 어차피 당분간은 지건호가 이 차로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직원에게 차를 회사나 집으로 옮겨달라 부탁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닐 테고.
지건호가 떠나고 난 뒤, 차를 확인하면 된다. 그곳에 지현민이 남긴 게 없다고 해도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의 옷이 생각보다 많이 젖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당장 그의 몸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출장을 간다니 여벌의 옷이야 따로 있을 거고. 언제든지 제 옷쯤은 갖다 대령할 직원이 수두룩했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차 키를 쥔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욕실 밖으로 나갔다. 지건호는 창밖을 보며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저 차분한 목소리만 듣는다면 그가 지금 알몸으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 할 것 같았다.
그때 지건호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욕실 밖으로 빠져나온 걸 유리창을 통해 확인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중얼거리던 걸 들키기라도 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다시 발을 옮겼다.
“글쎄. 하루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은 내가 가는 자리를 따라 길게 휘어졌다가 꼬이기를 반복했다. 저 대단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무언가를 추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눈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손에 숨기고 있는 차 키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다른 손에 챙겨둔 그의 옷가지는 적절한 속임수가 되었다. 소파에 그의 옷을 대충 걸쳐두면서 나는 그 밑으로 차 키를 떨어뜨렸다. 러그 위로 묵직한 것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에게도 들렸을까 고개를 들었지만 다행히 지건호는 통화 중이라 이 작은 소리까지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괜히 별것도 아닌 것에 놀란 티를 냈나 싶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끝으로 차 키를 소파 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남들 눈에는 의심이 가득한 상황이겠지만 지건호는 딱히 의문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나 나나 벗고 있는 건 매한가지인 상황에, 그렇다고 내가 빼돌린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들킨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알아서 차질 없도록 준비해 주시죠. 어차피 하루는 원래 현지답사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
“나 한 사람 없다고 안될 일이 갑자기 잘될 리도 없을 거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설마 출장을 안 가겠다는 소리인가. 눈을 키우며 그의 통화에 집중했다. 그러자 지건호가 휴대폰 너머 상대에게 웃음을 흘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과찬이시죠. 몇 년 전 그때 일은 벌써 잊으셨나 봅니다.”
“…….”
“그때처럼 잘될 일을 그르치는 원인이 나한테 있을 수도 있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지건호는 마치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 듯,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마치 내 얼굴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나를 투명인간 취급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늘 계획한 대로만 되진 않는 법이니까요.”
“…….”
“어쨌거나 이번 건은 사전에 상호 협의된 거라 제 역할이 특별히 중요하진 않을 겁니다. 어차피 SMR 시공사는 확정된 거나 다름없고, 태산은 지분 투자로 명분만 갖춘 거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뺨을 지그시 누를 듯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언제까지 제 통화를 엿듣고 있을 거냐는 표정 같기도 했다.
따지자면 자기가 나한테 다가온 것 아닌가.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쯤에서 빠지는 게 마땅할 것 같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리던 허리가 잡힌 건 바로 그때였다.
무슨 짓이냐고 외치려던 말이 그의 품에 갇히는가 싶더니 입술 사이로 그대로 먹혀 버렸다. 난데없이 깨물린 아랫입술이 그의 타액과 섞여 길게 늘어났다. 미처 고르지도 못한 호흡을 혀로 얽어 삼키던 그는 뒤로 젖힌 내 머리를 받치며 입술을 반쯤 뗐다. 성급하게 비벼진 코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미쳤어요?”
나는 그가 바닥에 떨어뜨린 휴대폰을 눈짓했다. 전화가 끊긴 줄 알았는지 휴대폰에서 “본부장님?” 하고 그를 찾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게도 저 소리가 들릴 정도면 내 목소리도 그쪽에 들렸겠다 싶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곧장 눌러 다문 입술 위로 다시 제 입술을 붙였다 뗀 그가 말했다.
“부장님.”
- 네, 네. 본부장님.
“우리 지난번에 EPC 기술 공모받은 거 어떻게 진행된다고 하셨죠?”
- 아, 그건 갑자기 왜…….
“작년이랑 다르게 진행되는 게 확실한가 싶어서요. 워낙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본부장님. 바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드릴까요?
“아니. 지금 말씀해 주세요.”
내 인중 끝에 머물고 있는 그의 입술이 낮은 목소리를 따라 잘게 진동했다. 이왕이면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덧붙인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꼴을 하고 통화를 계속하겠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틀어 벗어나려고 했으나 도망가봤자 말 그대로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내 목 뒤를 손으로 받치고 있던 그는 꼭 물을 닦아주려 했다는 듯 내 뺨을 길게 핥고는 입술 사이를 침범했다. 예고도 없이 들어온 혀는 물색도 없었다.
나만큼이나 난감한 기색이던 통화 상대는 그가 부탁한 자료를 찾아 읊고 있는 모양이었다. 흘러드는 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지만 지건호 역시 그다지 궁금한 내용은 아닌 듯 제대로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건 오직 나였다. 그게 지금의 나인지, 아니면 과거의 신지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구분 짓는다고 그게 크게 달라지나.
집착에 가까운 그의 키스를 받아내던 나는 체념하듯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뱀처럼 얽혔다 빠져나간 혀도 또 다른 기억의 똬리를 푼 것 같았다.
‘원래 일의 경중이라는 게 사람을 가리고 그러잖아요. 남한테는 이 손톱 밑에 낀 때만도 못한 건데 다른 사람은 죽니 사니 곡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거거든. 내 말 무슨 소리인지 알죠?’
‘됐고,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그 사람 올 시간 다 됐으니까.’
‘오케이. 나도 뭐, 시간 끌 생각은 없으니까. 괜히 지건호랑 부딪쳐봐야 욕만 듣지. 간단히 말하고 갈게요.’
흘러든 기억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지현민 목소리가 분명했다. 건들거리는 어조 하며 불편하기 그지없던 태도. 찰나의 기억이었지만 그는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집을 찾아온 듯했다.
용건이 뭐였을까.
그러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언제나처럼 두통을 수반한 기억은 의문만 잔뜩 남긴 채 미로 속으로 꼬리를 감추어 버렸다. 귀가 먹먹했다. 귓속에서 누군가 불을 땐 듯했다. 뭔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을음이 머릿속을 더럽혔다.
“아, 잠시만. 건호 씨.”
나는 그가 통화 중이라는 사실도 잠시 망각하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뒤늦게 내가 소리를 냈다는 걸 알고 눈을 내렸지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은 뒤집어진 상태였다. 이명까지 이는 통에 통화가 끊겼는지 확인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란 건 나뿐인지, 적어도 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
긴장하여 다문 입술은 그에 의해 다시 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가 여린 입천장을 간질이자 고여 있던 타액이 거친 숨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가 주는 것을 아무리 삼켜봐도 조갈 난 것이 메워지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그가 불러일으킨 내 과거에 대한 기억과도 같았다.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이 질척이며 턱 아래에 붙었다가 목을 따라 내려갔다. 맞닿은 몸 사이에 끼워지다시피 한 그의 페니스는 내 명치 부근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몸을 웅크릴수록 그의 성기는 내게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크기를 불려 나갔다.
지건호는 욕실에서 끝내지 못했던 걸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심산 같았다. 나는 내 아랫배를 찌를 듯 파고들었다가 가슴 가까이로 솟구치는 그의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곳곳에 닿는 그의 숨도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맥이 뛰는 곳마다 제 입술을 갖다 대던 그는 내 뺨을 작게 깨물면서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짓뭉갰다.
사정까지 머지않은 얼굴이었다. 열 오른 눈빛과 딱딱하게 굳은 뺨, 서늘한 입매, 저급한 손놀림. 하나같이 나를 끝까지 몰아붙일 때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재촉하듯 그의 손가락을 입술로 포개 물었다. 곧이어 귓바퀴를 더듬던 성마른 입술에서 욕설이 작게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아랫배에 뭉근하게 열이 번졌다. 그가 뿌린 희뿌연 액이 배꼽을 지나 음모에 엉겨 붙었다. 어이없다는 탁한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왜.”
그 짧은 음절은 내 말에 대한 뒤늦은 대답인지, 그가 내게 묻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내게 뭐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왜.’
‘…….’
‘설마, 아니죠? 지건호를 사랑하게 됐다거나 한 건.’
나는 이명과도 같은 그 목소리를 지우며 눈을 감았다. 내리깐 눈꺼풀 위로 지건호의 입술이 길게 내려앉았다. 침묵을 종용하는 차가운 입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