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그가 남긴 흐리고 탁한 흔적은 샤워기 물줄기를 따라 발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가슴께를 데우던 미지근한 물은 귓가에 달라붙은 목소리, 그와의 사랑을 부정하던 누군가의 그 목소리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감상에 빠져 과거를 좇기엔 조금 멀리 온 기분이었지만, 문득 지건호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병원을 나서던 그때가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병원에 있을 걸 그랬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꼬박꼬박 챙겨주는 약이나 먹고. 그냥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가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하루를 버티듯 살아간다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기억을 찾긴 했으나 온전한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지건호나 김수연이 매일같이 챙겨주던 그 약이라는 것도…….
나는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제 것을 깨끗이 씻어 보낸 뒤, 내 몸에 남은 물기까지 타월로 닦아주던 지건호가 그제야 눈을 맞추었다. 갑자기 왜 웃냐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호강한다 싶어서요.”
빈정거리는 그 말에 지건호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스쳤다. 여유를 가장한 얼굴은 뻔뻔스럽게만 느껴졌다. 벌린 다리 사이로 또 한 번 들어오는 손에 황급히 타월을 빼앗자 재밌다는 듯 그의 뺨이 살짝 패었다.
“그나저나 한 시간 훨씬 지나지 않았어요?”
배스 가운은 이미 한참 전에 젖어 버려 다시 입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타월로 대충 몸을 가리며 그에게 묻자 엉뚱한 말이 돌아왔다.
“배고프지 않아?”
“…….”
“거긴 음식은 입에 맞는데 항상 양이 안 차서.”
그는 우리가 갔던 레스토랑을 트집 잡고는 룸서비스라도 하나 부르는 게 어떻겠냐며 제 몫의 배스 가운을 내게 건넸다.
“하긴. 이 호텔 룸서비스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겠네.”
“저기요, 지건호 씨.”
“따로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아, 바깥 음식 먹기엔 좀 늦었나.”
“아니, 당신 출장 있다며. 안 가요?”
“너도 아까 다 들었을 거 아니야.”
정확하게 말해 달라고 쳐다보자 그가 새삼스럽다는 식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뜻을 모르겠다는 내 얼굴을 그제야 읽은 건지 그의 비딱한 시선 끝이 내 입술에 걸렸다.
“안 가.”
“뭐라고요?”
“안 간다고, 출장. 마음이 바뀌었어.”
“무슨……. 그게 말이 돼요? 회사 일을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게?”
“보통은 안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좀 다르겠지?”
제가 지건호인 이상 안 될 게 뭐 있냐는 말이었다.
하, 맥이 탁 풀렸다. 실컷 숨겨놓은 차 키가 소용없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 밤새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아쉽다는 얼굴이네, 신지원. 나 없는 동안 혼자 뭐 하려고 했길래.”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게 아니긴. 그의 부재를 기회로 삼은 건 나 아니던가. 마땅히 이을 말도 없어서 그냥 가운을 대충 여미며 욕실을 나섰다. 등 뒤로 뒤늦게 따라붙는 인기척에 소파에 올려둔 그의 옷을 턱짓했다.
“좀 구겨지긴 했지만 입을 수는 있을 거예요.”
“갑자기 저걸 왜.”
“입으라고요. 그러고 집에 갈 수는 없잖아.”
“뭐 하러. 내일 아침에 맡기면 돼. 사람 불러도 되고.”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요? 여기서 자고 갈 것도 아닌데.”
“그럼?”
되묻는 얼굴이 제법 태연했다. 어이가 없어 따져 물었다.
“그럼 뭐, 여기서 자고 가겠다는 거예요? 집에 안 가고?”
“보통은 그러지 않나?”
“…….”
그 보통이라는 것도 제가 원할 때만 가져다 붙이는 말인가 보지.
배가 고프다던 건 사실이었는지 미니바를 살피던 그가 스낵 하나를 찾아 꺼내 물었다. 한 손에는 들린 생수통은 이제는 더 이상 가릴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그의 성기 같았다.
잠이라도 집에 가서 편히 잘 줄 알았건만. 아니, 그 전에 그의 차로 이동하게 되면 그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마음이나마 놓일 텐데.
다 글렀다. 그렇다고 그를 재워놓고 주차장으로 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침대로 향했다. 벌거숭이 상태의 지건호를 멀쩡한 눈으로 계속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 게다가 이명처럼 귀에 맴도는 목소리까지. 모든 게 엉망 그 자체였다.
침대 속을 파고들며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었다. 맥주까지 마시려는 건지 캔을 따는 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시트가 확 젖혀졌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소리도 없이 다가온 지건호가 내게 물을 흔들어 보였다.
“……줄 거면 똑같은 걸로 주든가.”
나는 그가 다른 손에 쥐고 있는 맥주캔을 눈짓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반응했다.
“심신미약자가 술을? 정신 나간 소리지.”
“혹시 알아요? 술 먹고 기억이 돌아올지. 왜, 그날 당신처럼 헛소리…….”
꺼내다 말고 끊긴 말에 지건호가 눈만 살짝 치켜떴다.
그는 내가 말하는 그날이 언제였는지 쉽게 알아챈 듯했다. 지건호가 술에 취해 신상윤의 부축을 받고 들어왔던, 그래서 그가 술김에 낯선 이름을 토해냈던 그날. 정작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맥주를 꿀꺽이며 삼키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마저 금방 끝났다. 입술에 묻은 것을 손등으로 훔쳐낸 그는 협탁 위에 빈 캔을 올렸다. 그리 도수 높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술 냄새가 확 퍼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데.”
그는 꽤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내게 물었다. 고작 맥주 한 캔에 늘어질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전보다 긴장을 늦춘 상태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별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마음에 담아둘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도 대답을 종용하는 눈동자는 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집요하게 와닿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시트를 한 번 더 움켜쥐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말을 내뱉었다.
“그냥, 아이 얘기였어요.”
우리가 공통적으로 나누어 가진 기억. 그리고 그도 내가 일부 되찾았다고 알고 있는 기억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기억.
“당신은 내가 아직 임신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 입덧 얘기도 했고.”
나는 조금 굳은 듯한 그의 얼굴을 살피며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덕분에 나도, 임신했던 그때 기억이 난 거예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던 그 말을 지건호는 다행히 모두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하, 혀끝으로 가볍게 훑던 그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렀다.
“그래, 별것도 아니긴 했네.”
더 이상 캐물을 건 없다 싶었는지 그는 내게 먼저 자라고 말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잇달았다. 벽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그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나는 다시 시트를 뒤집어썼다.
잘 둘러댔다. 굳이 여기서 그날 그의 말을 되짚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기분인 건지. 별거 아닌 거짓말이 그가 남기고 간 술 냄새처럼 기억을 흩뜨려 놓았다.
‘설마, 아니죠? 지건호를 사랑하게 됐다거나 한 건.’
나는 여전히 날 농락하는 목소리를 지워낼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눈을 떴을 때 지건호는 없었다. 이곳에서 잠을 잔 건 맞는 건지 침대 옆자리에는 누웠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안 간다더니 출장을 가긴 간 건가. 통화 내용을 주워들은 걸로만 종합하자면 아예 안 갈 수는 없다던 것 같았는데.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어젯밤 계속 웅웅거리던 귀는 자는 동안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두통에 이마를 짚는데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지건호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대신 날 맞이한 건 역시나 김수연이었다.
잘 잤냐고 묻는 수연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수연이 내 곁으로 다가와 물을 건넸다. 물끄러미 내려다본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 몇 알이 놓여 있었다.
“수연 씨, 이거요.”
채 트이지도 않은 목소리는 아직도 잠에 잠겨 있었다. 나는 다소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무슨 약이에요?”
“늘 드시던 약입니다, 사모님.”
“아니, 그거야 잘 알고 있고. 나는 이게 어떤 약인지 궁금한 거예요.”
이미 정신과에서 영양제의 일종이라고 한 차례 확인받았던 약이었다. 괜한 질문이라는 걸 나도 알았지만, 오늘따라 다시 확인하고 싶은 건 왜일까. 지건호에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걸까.
어차피 김수연이 기계처럼 내뱉을 답도 무엇인지 다 알 것 같았기에 나는 그냥 물과 함께 약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언제 왔어요, 수연 씨는?”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아요.”
“아, 한 시간.”
적당히 긴 시간이지, 한 시간.
그런 거라면 수연이 오기 전까지 지건호도 여기 있었다는 말일까. 날 혼자 내버려 둘 사람은 절대 아닌데.
“그럼 그 사람은 출장을…….”
“저, 사모님.”
나는 돌연 내 말을 끊는 수연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가볍게 눈썹을 들썩이자 수연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직접 한번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딜요.”
“이 약 처방해 준 곳이요.”
“…….”
뜬금없는 제안에 나는 수연을 말없이 응시했다. 약을 따로 처방해 준 곳이 있다는 소리인가.
“병원이 또 따로 있어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말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을 뿐, 나는 침대 쪽으로 점차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표정을 재빨리 지웠다.
“뭐가 따로 있어?”
지건호가 셔츠 단추를 채우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