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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37)화 (37/60)

| 37화

김수연은 재빨리 몸을 한 발 뒤로 물리며 내게 입을 다물라고 눈짓했다. 방금 제가 한 말을 지건호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지건호가 모르게 진행하는 일이라…….

나는 눈치껏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를 향해 태연히 시선을 돌렸다.

“간 줄 알았는데요.”

“가길 바란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요.”

굳이 가릴 것도 없는 진심에 커프링크스를 채우던 지건호의 입술이 얄궂게 휘었다. 어제 입고 있던 셔츠와 다른 걸 보니 아마 수연이 준비해 들고 온 것인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입을 옷도 어딘가 있으려나. 주위를 슬쩍 둘러보는데 묻기도 전에 수연이 내게 옷을 건넸다.

“아, 고마워요, 수연 씨.”

나는 일단 씻고 오겠다고 말한 뒤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돌아왔다. 수연이 미리 준비해 준 화장품을 덧바르는 동안 지건호에게 그만 좀 나가달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저는 괜찮으니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어도 된다는 투였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수연과 벌일 작당을 막아보겠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아무리 수연이 비서 일을 하고 있긴 하다지만, 모시는 임원 부부의 호텔 객실로 찾아와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 나를 의무가 있나. 본인은 익숙해 보여 다행이다 싶었지만 괜히 수연의 눈치가 보였다.

옷을 갈아입느라 반쯤 헐벗은 아내와 그 아내에게 붙인 제 비서. 이렇게 셋이서 같은 호텔방 안에서 아침을 맞는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지건호 혼자였다. 원래 제 직원은 병풍처럼 취급하는 스타일인 건지, 아니면 그 상대가 김수연이라 특별히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만.

“수연 씨.”

“네.”

수연은 지건호의 눈치를 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도와줄 게 있냐고 묻는 얼굴을 보며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는 니트 상의에 팔을 마저 끼워 넣었다. 그래도 예의를 차리고는 싶은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건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지건호 씨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 수연 씨는 알죠?”

예상했던 질문은 아니었는지 동그랗게 커진 수연의 눈이 지건호에게 잠시 닿았다가 내게 향했다. 그 또한 생뚱맞은 말이라고 생각한 듯, 날 등진 채 옷을 매무시하던 그가 실소를 흘렸다.

“네. 오늘 본부장님께 공식적인 일정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출장은 정말 안 가는 거래요?”

“네, 그건…….”

니트에 이어 바지에 다리를 넣는데 지건호가 고개를 돌렸다.

“뭘 알고 싶길래 김 실장을 괴롭혀.”

“내 남편 스케줄이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본인에게 관심 없다고 섭섭해하는 거 같길래.”

“직접 물어봐. 괜한 사람 통해서 물을 필요 뭐 있어.”

“그럼 휴대폰이라도 하나 만들어 줘요.”

나는 바지 단추를 마저 채우며 수연에게 고맙다고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침실을 벗어났다. 둘이서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 같았다.

수연이 지나가는 길로는 눈길도 주지 않던 지건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웬 휴대폰.”

“당신 말대로 매번 다른 사람 통해서 연락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반대로 나랑 연락 안 되어서 답답할 일도 없을 거고.”

신상윤이 들었다면 기뻐 난리 쳤을 말이었다. 그러나 지건호는 내가 그 휴대폰으로 상대할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했다.

아마 안 된다고 하겠지. 뻔했다. 내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이 어디 있냐고, 원하는 건 다 직원들 편으로 부탁하면 된다고 그러겠지. 기대 없이 한번 질러본 말이었기에 그가 거절한다 하더라도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물론 휴대폰이 생긴다면 조금은 숨이 트이긴 하겠지만. 그의 눈을 피해 새로운 단서를 찾기에도 용이할 것이고. 어쩌면 수연이 말한 약을 처방해 준 곳과도 대면하지 않고 연락이 닿을 수 있을 터였다.

“김 실장.”

고갯짓으로 수연을 부른 지건호는 날 한 번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휴대폰 하나 알아보세요.”

“네. 본부장님 명의로 개통하면 될까요?”

그는 뜻밖의 말에 눈썹을 세운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수연은 알겠다고 말하고는 나중에 연락드리겠다며 객실을 나섰다. 그가 내린 지시를 바로 수행할 생각인 듯했다.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니었는데. 뭐가 이리 쉽나 싶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진작 필요하다고 말할 걸 그랬나. 거칠 것 없는 호의에 나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휴대폰 쓸 줄은 알아?”

“……누굴 원시시대에서 온 사람 취급 해. 그 정도는 알아요. 모른다고 해도 배우면 그만이고.”

“그렇다면 다행이고.”

다행은 무슨. 이렇게 쉽게 허락할 거 진작 하나 사다 주지 않고. 불퉁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자 그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워낙 너 좋을 대로만 갖다 붙이는 기억이라, 내가 알 수가 있어야지.”

또 내 탓이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하려는데 불쑥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제 준비 다 되었으면 그만 나가자며 발을 옮기는 그의 등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 명의예요?”

아주 사소하고도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돌아보는 지건호의 낯은 그렇지 못했다.

새삼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은 아니다 싶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내 눈에는 보이는 그 미세한 변화가 나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감쪽같이 표정을 감춘 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관리하기 편해. 그리고 내가 네 법적 보호자니까.”

“음.”

“왜, 새삼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있나.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 그의 아내 자리였는데. 기억을 모두 되찾지 않는 이상 내 인생에서 지건호는 선택지를 둘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눈 떠보니 하루아침에 생겨난 남편, 그것이 지건호였다. 거부권은 내게 없었다.

난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이고는 날 보며 우뚝 멈추어 선 그를 지나쳤다.

객실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였다. 거실 쪽 소파 역시 체크인할 때의 모습과 동일했다. 벌써 직원이 왔다 갔을 리는 없을 테고. 벗어둔 옷가지만 치워둔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차 키 생각이 났다. 소파 밑에 숨겨둔 그의 차 키.

슬쩍 시선을 내려 소파 아래를 훑었으나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알아서 주웠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도 소지품 정도는 확인했을 터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괜히 찔려서 멈칫거리자 그가 다가왔다.

“왜.”

“응?”

“뭘 그렇게 멀뚱거리냐고.”

“아니, 그냥…….”

말을 흐리다가 되물었다.

“당신 뭐…… 놔두고 가는 거 없어요?”

“딱히.”

역시 알아서 다 챙긴 모양이었다. 달리 의문을 갖지 않는 걸로 봐선 그냥 주머니에서 떨어졌겠거니 생각하는 듯했고.

그렇다면 이제는 어쩌면 그의 차에 있을지도 모를 봉투, 지현민이 내게 전달한 그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뭐, 그의 눈에 보인다고 해도 이리 마음 졸일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제 쇼핑했던 수많은 봉투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적당한 알리바이는 충분하니 나만 의심 없이 행동하면 되었다.

“넌 뭐 잊은 거 없어?”

“뭘요?”

뜬금없는 말에 생각을 들켰나 싶어 과하게 목소리를 키웠다. 지건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뜻을 캐묻는 눈을 보자 머리가 자글자글 끓었다.

“그런 거 없어요.”

내 대답에 그는 내 어깨 너머를 잠시 응시하던 시선을 바로 거두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 위로 뜻 모를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는 됐으니 그만 나가자며 문을 열었다.

수연이 구두 대신 따로 준비해 온 운동화는 어쩐지 발목을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불편한 안락함에 무거운 발을 천천히 옮기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아, 잠시만요.”

무슨 일이냐고 되돌아보는 지건호를 향해 깜빡하고 두고 온 것이 있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묵묵히 카드 키를 내어주고는 나는 여기 있을 테니 어서 갔다 오라며 눈짓했다.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 그는 굳이 묻지 않았다.

제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이. 아니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서둘러 문을 열고는 객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소파 앞쪽 테이블에 고이 올려져 있는 봉투를 들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팝업 스토어에서 구매했던 아이 옷이었다. 정작 내게는 필요도 없는, 마땅히 줄 사람도 없는 것.

“이게 뭐라고…….”

지건호도 웃기다고 하겠지. 그냥 착각했다고 하고 두고 나갈까 고민하며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어?”

손에 든 걸 감추지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내 모습을 짧게 훑던 그의 목울대가 느리게 오르내렸다. 한쪽 손을 찔러넣은 주머니가 작게 꿈틀거렸다.

“뭐 하고 있어. 다 챙겼으면 어서 나오지 않고.”

지건호는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내게 다른 건 묻지 않겠다는 듯이 등을 돌려 나갔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뒤따랐다. 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발걸음에 조금 뛰다시피 하자 그가 고개를 돌리고는 손에 든 봉투를 빼앗아갔다. 꼭 그것이 무거워 내가 느리게 걷는다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이곳에 정말로 남겨두고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낮이 집어삼킨 우리의 지난밤일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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