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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38)화 (38/60)

| 38화

지건호가 일정을 취소한 대가는 억울하게도 오롯이 나 혼자 치러야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의 대단치도 못한 머릿속이 궁금해졌을 때는 그의 차는 이미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충 봐도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어딜 가는 건데요.”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는 그냥 배고프지 않냐고 몇 번 묻고는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둥 시답지 않은 소리로만 정적을 깼다.

“집에 가고 싶다니까요.”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식당 나올 거야. 거기서 간단하게 밥 먹자.”

아니, 누가 지금 밥 못 먹어서 이러나. 황당해 운전석을 쏘아봤지만 내게 돌아오는 시선은 없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뒷좌석을 흘깃 쳐다봤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의 차 뒷좌석에는 지현민이 건넨 물건을 담은 봉투를 포함해 어제 쇼핑한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상윤이 가져다둔 것이었다. 트렁크에 넣긴 좀 그러니 뒷자리에 넣어 두었겠지.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하필 왜 지현민이 준 것이 제일 눈에 들어오는 건지. 봉투 색깔 때문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시선이 확 집중되는 통에 행여 지건호가 저게 무엇인지 물어볼까 긴장이 되었더랬다.

적당히 사고 말걸. 괜한 객기를 부렸나. ……그럼 옆에서 좀 말리든가.

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윤을 타박하며 어제 일을 곱씹는데 대뜸 지건호가 물었다.

“뭔데 그래.”

“어?”

“뒤에 있는 거 말이야.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는 거 같길래.”

“아…….”

이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는 거 같더니 언제 또 봤을까. 나는 순간 당황하여 멈추었던 숨을 작게 토해냈다. 룸미러를 힐끔 보던 그가 적색 신호에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중요한 거야? 당장 봐야 해?”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짐짓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티가 났을까. 지건호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뒷좌석에 올려둔 봉투를 읽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혹시 결제 내역에 없는 걸 그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았다. 곧장 마주친 시선에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신호 바뀌었는데.”

의아한 눈이 제 팔을 붙잡은 내 손에서 이제 막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으로 향하는 사이 때마침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다행이었다. 땅을 기는 듯했던 마음이 다시 출발한 차와 함께 움직였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려 안도의 한숨을 날려 보냈다.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돌려보고자 다른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관뒀다. 하고 싶은 말도 당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스쳐 지나가는 건물이며 나무 따위를 감상할 뿐이었다.

목적지를 찍지도 않은 그의 내비게이션은 우리 차가 이미 한참 전에 서울을 벗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 가냐는 질문도 잊을 만큼 평온한 풍경이 연달아 이어졌다.

“신지원.”

그리고 갑자기 불린 내 이름에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차는 벌써 어딘가에 주차된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조수석 문을 열고 서 있던 지건호가 깼으면 그만 나오라고 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차는 어느 식당 앞에 주차된 상태였다. 제법 오래된 건물인 듯, 외벽에 생긴 균열을 페인트로 급하게 도색한 티가 났다. 주차장에 차도 몇 없는 걸 봐서 그리 유명한 식당도 아닌 것 같았다. 식당 주인도 장사에는 별 욕심이 없는 건지, 상호가 적힌 간판은 색이 바래 선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지건호에게는 익숙한 곳인 것 같았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 그는 사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한 뒤 밖이 잘 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뭐 먹을래?”

묻는 말에 식당 안을 크게 둘러봤다. 점심시간을 꽤 넘긴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에는 손님도 겨우 몇 명밖에 없었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그나마도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테이블에 놓인 것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저 사람들이랑 같은 걸로 해요.”

그러자 날 따라 눈을 돌린 지건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직이 웃음을 흘려보낸 그 입술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별거 아니라며 손바닥을 들고는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메뉴를 말했다. 슬쩍 봤는데도 메뉴 파악이 끝난 것인지, 확신하듯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왜 웃어요?”

“그냥.”

물을 따라 건네는 지건호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실없기도 하지. 어색하기만 한 그 얼굴을 훔쳐보며 물을 마시는데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찾은 기억 속 그는 대부분 이렇게 웃고 있었으니까.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게 조금 불편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물은 호수인지 강인지, 잔잔한 물결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꼭 금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여기도 자주 와 봤던 곳인가 보죠?”

“가끔.”

“언제, 연애할 때?”

대답은 즉각 떨어지지 않았다. 눈동자만 살짝 굴려 그를 보았지만 그의 다문 입술은 쉽게 열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

까짓거 내가 찾으면 되는 기억이었다. 약을 먹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든. 내가 꼭 되찾아야만 하는 기억이라면 방법을 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창밖으로 향했던 눈을 다시 끌어온 건 그의 목소리였다.

“연애할 때는 좋은 곳만 데려갔지.”

“……결혼하고는 아니었나 보죠?”

그는 당연하지 않겠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뒤로 기울인 탓에 탄탄한 가슴을 가둔 셔츠가 팽팽해졌다. 나는 단추에서 시선을 떼며 농담하듯 빈정거렸다.

“잡은 물고기에는 신경 안 썼다는 말이네.”

“틀렸어. 신경을 더 쓴 거지.”

“…….”

“네가 잡힌 물고기가 아니었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밑반찬이 나왔다.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인 반찬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던 아주머니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아, 네…….”

나는 괜스레 지건호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아주머니를 보며 눈치껏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 새댁도 잘 지냈죠? 아유, 이게 얼마 만이야 그래.”

……새댁. 나는 그 어색한 단어를 혀끝으로 굴리다가 미소로 대답했다. 정말 반갑다고 말을 건넨 아주머니는 오늘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더 많이 담았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금방 식사 나올 거라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아주머니가 물러나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테이블 위로 지건호가 수저를 건넸다.

“가끔 오던 게 아니었나 본데요. 아주머니께서 나 기억하시는 거 보면.”

“네가 워낙 눈에 띄는 얼굴이라 그래.”

“…….”

“왜 그렇게 봐.”

“아니, 칭찬인가 싶어서.”

빤히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며 답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다소 어이없다는 웃음이었다.

“그 정도쯤은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스스로 잘 알 거 아냐.”

“뭐, 아무튼. 칭찬이라는 거죠?”

“알아서 생각해. 너 좋을 대로.”

“그럴게요.”

짧게 대답하며 반찬을 입에 넣었다. 몇 가지 나물을 맛보는 동안 수저 한 번 들지 않는 그를 보며 다시 물었다.

“내가 좋아하던 반찬이 뭐예요? 양이 다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지금 네 입에 잘 맞는 거겠지.”

“……다 맛있으니까 그러지.”

중얼거리며 그의 앞에 있는 그릇까지 젓가락을 뻗었다.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내게로 옮겨 준 그가 천천히 먹으라며 빈 컵에 물을 따랐다. 멋쩍어 변명하듯 말했다.

“생각보다 내가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배불러도 여기 음식 많이 먹었어, 너는.”

“…….”

“그러니까 많이 먹으라고. 눈치 보지 말고.”

“그럼 같이 들어요.”

“곧 식사 나온다니까 기다리지 뭐.”

그 말에 마지못해 젓가락을 내렸다. 어젯밤에 배고프다고 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반찬 하나 손대지 않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언제쯤 식사가 나오려나. 주방 쪽을 힐끔거리는 사이 문득 조각난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왠지 내 느낌에 그럴 것만 같은.

“여기, 나 아이 가졌을 때 왔었죠?”

지건호는 내 질문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어쩐지.”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소리였다. 연애할 때는 오지 않고 결혼 후에 더러 찾던 곳. 그 결혼 생활에서도 임신 중이던 기간이 대부분이었을 테니 이곳 방문도 배 속 아이와 함께였을 확률이 높겠지.

그러나 뒤늦은 그의 대답은 내 예상을 조금 비껴갔다.

“같이 온 건 그 전이었지. 넌 입덧 때문에 어디 멀리 가지도 못했으니까.”

“아.”

“근데 그 입덧이 희한하게도 여기 음식만 찾는 바람에.”

“…….”

“사장님께 염치없는 부탁을 많이 했어, 내가.”

지건호는 무감한 어조로 지난 일을 회상했다.

날 이곳까지 데리고는 못 와도 반찬 따위를 이곳에서 포장해서 들고 갔었다고. 원래 포장을 하던 식당이 아니라 처음에는 사장님도 난감해하셨는데, 따로 부탁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정성이 갸륵하다 싶었는지 어느 날부터는 택배로 몇 가지 반찬을 부쳐 주셨단다.

나는 때마침 테이블에 오른 버섯전골을 보며 생각나지도 않는 과거 일에 마음속으로 늦은 감사함을 표했다. 잘 먹겠다는 인사에 음식을 가져다준 아주머니는 밥이 모자라면 더 말하라며, 밥은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다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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