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나는 그와 깍지 낀 손을 풀지도 않은 채 식당 주변을 산책했다.
산책길은커녕 인도도 없는 도로였으나 차가 많이 오가지는 않았기에 걷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뒤에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릴 때면 지건호가 날 옆으로 밀며 보호하듯 감싸 안았는데, 그것이 내심 기분 좋았다. 하지만 차마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다.
그는 식당에 앉아 내다보던 그 물가는 호수가 아니라 강이라고 했다. 우리는 강변 어디쯤에 나란히 멈추어 서서는 잔잔한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건호는 몇 번이나 나한테 춥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꼬박꼬박 괜찮다고 답했지만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결국 상태를 들켜버렸다.
“무슨 고집이야, 그건.”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나 추위 잘 안 타는 사람이라면서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어떻게 남 얘기를 하듯이 말하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깍지 끼고 있던 그의 손은 이제 내 어깨를 지나 팔뚝을 감싸 안고 있었다. 춥지 않다던 내 말을 못 믿겠다는 투였다. 항변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수연 씨가 말해 주던데.”
“뭐를.”
“내 성격이랑 특징 같은 거요.”
“넌 그걸 곧이 받아들였고?”
“그럼 내가 어떡해. 알려주는 대로 외워야죠. 당신 집에 들어가서 실수하지 않게끔.”
“썩 도움이 된 것 같진 않네.”
그렇다고 내가 큰 실수를 한 적은 없지 않나. 그러나 꺼내봐야 내 손해라는 걸 알기에 구태여 대답하진 않았다.
괜한 짓을 했다며 자리에도 없는 수연을 타박하던 지건호는 다시 강가로 눈을 돌렸다. 이제 보니 본인이 추워서 내게 자꾸 춥냐고 물었던 건지, 날 감싼 손에 힘이 더 실렸다.
추우면 그만 들어가 보자고 말할까. 아니다. 그러다 또 뒷좌석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면 어떡해. 그 전에 지건호의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불안감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데,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던 지건호가 조용히 입을 뗐다.
“네 집이기도 해.”
“응?”
“실수를 하면 하는 거지. 신경 쓰지 말라고.”
“…….”
“네가 과거 기억에 연연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나쁜 기억까지 떠올릴 거라면 좋은 기억도 모두 묻어두길 바란다는, 가히 지건호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말은 그가 꾸린 둥지 안에서 안락함을 강요받으며 시키는 대로 살라는 말이기도 했다.
좋았던 추억까지 모두 덮을 만큼의 일이 무엇일까. 견고했던 우리 사이를 부정할 일.
……부정.
나의, 그리고 어쩌면 그의 부정.
아니, 확실한 건 아직 없었다. 모든 것은 명확한 증거가 나온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나 처음 그 집에 들어간 날, 당신이 그랬죠. 하던 대로 살라고.”
“…….”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나름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
“물론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끝을 흐린 말에 그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은 해가 기운 강물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지건호 씨가 견딜 만한 여자라는 거겠죠.”
그는 쉽게 대답할 말은 아니라는 듯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그가 품은 잔잔한 너울에 가슴께가 요동쳤다.
인내하듯 얼어붙은 입술, 굳어버린 뺨. 그러나 우리가 함께했던 과거까지는 미처 뒤덮지 못한 그의 짙은 눈동자.
당신이 나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기억은 이런 바람 따위에 몸을 웅크릴 것도 아닌데. 되레 속을 꽁꽁 숨기며 날이 풀릴 기회를 엿보기만 할 텐데.
“당신이 더 추워 보이는데.”
나는 그의 차가운 뺨에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뜻하지 않은 동정에 잠시 당황한 것 같던 지건호는 조용히 답을 만들어 냈다.
“괜찮아.”
내가 품은 온기가 형편없어 그랬을까. 그에게 갖다 댄 내 손바닥이 오히려 더 얼음장 같았다.
멋쩍어 그만 내리려던 손을 지건호가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내게 가볍게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괜찮지.”
질문도 대답도 아닌 그 말은 내 입술 위에서 또 한 번 경계 없이 흩어졌다. 내 손보다, 그리고 그의 뺨보다도 뜨거운 숨이 인중을 간질였다. 서툴게 머리카락을 핥고 지나간 바람처럼.
그저 꾹 눌렀다 떨어진 것에 불과한 그의 입술에서도 비슷한 바람이 불었다. 그 끝에 고인 웃음은 온전히 저를 위한 것인 듯했다. 나는 그의 뺨에 깊게 팬 보조개를 응시하던 눈을 그냥 감아버렸다.
괜찮냐는 그의 말이 그 스스로와 내게 건넨 질문이었다면, 적어도 내 대답은 한쪽으로 기울었을 터였다.
* * *
“저기, 우리 잠시 쉬었다가……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는 건 어때요? 휴게소 같은 거 여긴 없나?”
“또 멀미해?”
그건 아니지만 신경을 써서 그런지 속이 자꾸 메슥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적으로 뒷좌석으로 눈길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게 독이었나 보다.
그의 차에 올라 서울로 향한 지 벌써 한 시간 남짓. 차에 타기 전 어떻게든 휴대폰을 꺼내 볼까 기회를 엿봤지만 지건호가 도통 내 손을 놓아주지 않은 탓에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동안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또 언제 다시 울릴지도 모를 상황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만약 그에게 들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필요해서 장만했다는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늘 아침, 내가 그에게 직접 사달라고 부탁한 것이 휴대폰 아니던가.
아, 괜히 쓸데없는 걸 말해서는. 아니지. 그러게 왜 하필 지현민은 나한테 휴대폰을 줘서…….
순간 짜증이 인 내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그가 조수석 창문을 조금 내렸다. 덕지덕지 붙어 있던 불안감이 바람에 실려 조금 떨어져 나갔다.
“거기 열어봐.”
그가 내 앞에 있는 글로브박스를 눈짓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박스를 열고 살펴보았다.
“뭐 없어?”
“……뭐가 있어야 하는데요?”
본인 차에 둔 걸 내가 어떻게 알까. 그게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원하는 게 먼지 따위가 아닌 이상, 깨끗하게 비워진 글로브박스에서 뭔가를 더 발견하긴 어려워 보였다.
아무것도 없다며 쳐다보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간이 오래됐지.”
“왜요, 뭔데.”
나는 닫았던 글로브박스를 다시 열고 손을 넣어 훑었다. 하지만 역시나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는 내 머릿속처럼 텅 빈 공간이었다.
“네가 거기 가끔 군것질거리 몰래 넣어두곤 했거든.”
그는 멈춘 신호에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날 돌아봤다.
“아직 몇 개 남아 있으려나 했는데 없나 보네.”
“애도 아니고 무슨…….”
중얼거리며 내뱉은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여기서 당장 카페를 찾긴 좀 그렇고.”
보이는 건 죄다 논이고 밭인 시골길이었다. 휴게소를 찾는다고 해도 고속도로 위로 차를 올리는 게 우선이었고.
그래도 잠시 그의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야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제일 최선인 건, 최대한 시간을 끌어 휴대폰이 스스로 방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핸들을 두드렸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은 바깥 하늘만큼이나 서늘한 색을 띠고 있었다.
“바쁘면 그냥 집으로 바로 가도 괜찮아요.”
“아까 김수연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오늘 일정 다 비웠다는 거.”
잠깐의 침묵 후에 되물었다.
“설마 진짜 나 때문에 스케줄을 다 비웠다는 말이에요? 출장도 취소하고?”
“그럼 넌 여태 뭣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는 되레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왼손, 그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묵묵히 응시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몰랐는데 당신 되게 한가한 사람이네요.”
“그 반대겠지.”
“…….”
“너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여유 없이 굴고 있잖아. 하루 종일.”
누가 들었다면 내가 그러라고 시킨 줄 알겠다. 집에 가자는 날 끌고 기억도 안 나는 이곳까지 내려온 것도 순전히 제 선택이었으면서. 생색내는 법도 가지가지였다.
난 이제 괜찮으니 괜한 시간 낭비 말고 그냥 집으로 가자고 말하려는데 지건호가 내게 뭔가를 건넸다. 그의 휴대폰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묻듯이 바라보자 그가 나직이 말했다. 전방을 주시하던 눈은 그대로였다.
“찾아봐. 근처에 갈 만한 곳 있는지.”
“나 그런 거 검색 잘 못해요. 그리고 인터넷에 나오는 얘기 다 믿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 특히 맛집 같은 거.”
“누가 그래?”
“상윤 씨가.”
그리고 수연 씨도. 반 박자 늦게 말을 덧붙였으나 그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침 적당한 쉴 곳을 찾았는지 지건호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 이름은 잘만 검색하더니.”
“그런 거랑은 경우가 좀 다르니까요.”
“다르긴 뭐가 달라.”
“당신 정보는 그래도 다 사실이잖아. 다 기사로 보도된 것들이고.”
사이드미러를 보던 그의 눈매가 조금 구겨졌다.
“그래서, 그 기사만 찾아봤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나더러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기사만 봤을 리가 있나. 그랬다면 그의 친모에 대한 이야기나 그가 태산에서 어떤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와 같이 잠시간 침묵을 나누던 지건호는 여전히 내 손에 있는 휴대폰을 흘긋 보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어딜 가냐고 묻자 그는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있는 줄도 몰랐을 작은 슈퍼마켓이었다.
“그냥 여기 있어.”
지건호는 따라 내리려는 나를 만류하며 반쯤 열린 조수석 문을 닫았다.
휴대폰 알림음이 들린 건, 그로부터 아주 잠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