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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1)화 (41/60)

| 41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지건호는 몇 발 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어쩌지도 못한 상태로 조수석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열린 창문 틈으로 불쑥 손가락이 들어왔다. 이어 몸을 숙인 그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입만 벙긋거리며 왜냐고 묻자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휴대폰.”

“…….”

“전화 온 거 아닌가?”

말없이 얼어붙어 있던 나는 그제야 손에 든 것으로 시선을 내렸다. 번쩍이는 화면 속, 김수연의 이름을 띄운 휴대폰에서는 꾸밈없는 벨 소리가 단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아, 여기서 나던 소리였구나.

뒤늦은 안도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다행히 그는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손가락 한 번에 소리를 멈춘 휴대폰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내 곁에서 알았다, 수고했다는 말 몇 마디로 수연과 통화를 끝낸 그는 날 한 번 쳐다보고는 되돌아온 길로 다시 향했다.

“계십니까.”

가게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차 밖으로 나가 뒷자리에 올랐다. 사실상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봉투를 뒤적이는 손이 다급해졌다. 그가 언제 나올지 몰랐기에 창밖을 보던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무슨 테이프를 이렇게 많이…….”

이것도 지현민 나름대로의 선물이라고 그런 건지, 장물 거래하듯 꼼꼼하게 테이프를 두른 상자를 뜯느라 자꾸만 손이 겉돌았다. 결국 힘으로 작게 벌린 상자 틈으로 손가락만 급하게 집어넣었으나 녹록지 않았다.

나는 밖을 한 번 쳐다보며 상자를 허벅지 위로 툭툭 내리쳤다. 뭔가 발밑으로 떨어진 것 같아 바닥을 훑었지만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장식이겠거니 생각하던 순간 휴대폰이 빠져나왔다.

“하아…….”

그러나 안도할 시간도 부족했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를 종료한 뒤 상자에 다시 넣었다. 적어도 집까지 가는 동안 이 휴대폰 때문에 마음 졸일 일은 더 이상 없을 터였다.

그에게 다른 의심을 사지 않게 봉투까지 원래 있던 상태와 비슷하게 두고는 차에서 빠져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수석 문을 열려던 그때 가게에서 나온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건호의 눈썹이 얄궂게 휘었다. 왜 차에서 나와 있냐는 뜻이겠지. 나는 그가 다른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안 그래도 부탁하고 싶었는데.”

그의 손에 들린 건 잡다한 군것질거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사탕이나 초콜릿 같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내며 고맙다는 듯 웃어 보이자 지건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어서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군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서는 그가 건네는 것 중 하나를 받았다.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라색 포장을 벗긴 것에서는 달콤한 포도 향이 났다. 몇 번 만에 녹아 없어지는 걸 보니 사탕은 아니고 캐러멜 종류인 듯했다. 혀에 남은 신맛에 침이 감돌았다.

하나 더 달라고 내민 손바닥 위로 이번에는 노란색이 올려졌다. 그렇게 레몬에 이어 딸기 맛까지 맛보고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그렇다면 네가 느낀 그대로겠지.”

애도 아니고 군것질에 열심인 게 한심하다는 건가. 괜히 멋쩍은 마음에 손에 든 작은 쓰레기를 돌돌 뭉쳤다. 더 안 먹을 거라는 의사를 읽었는지 지건호가 글로브박스를 열고는 제가 사온 것들을 넣었다.

불쑥 다가온 그의 손에 놀라 순간 멈추었던 숨을 고르는데 운전석으로 돌아간 그가 말했다.

“필요할 때 꺼내 먹어. 채워 넣고 싶은 게 있으면 알아서 넣어도 되고.”

“내가 당신 차에 뭐 하러요.”

“앞으로 종종 탈 거니까.”

왜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그의 말인즉슨 한 번씩 날 위해 시간을 내보겠다는 뜻일 테니까. 오늘처럼 한가하게. 지금처럼 한없이 사소한 것을 위해 여유를 부리면서.

지건호는 나와의 평범한 하루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한 과거 같은 건 모두 지워버릴 만큼 평범한 하루를.

“아까 수연 씨 전화는 뭐예요?”

“너 휴대폰 개통했다고.”

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그런데 왜 내 취향은 묻지도 않아요?”

“무슨 취향.”

“휴대폰. 색깔이라거나 모델 같은 거. 내가 고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자 언제부터 그런 것에 연연했냐는 듯 그가 삐딱한 웃음을 내걸었다. 연락만 잘되면 내가 희한한 구닥다리를 사줘도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뭐, 핑계껏 둘러댄 말이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마는.

그래도 지현민이 폭탄처럼 떠넘긴 휴대폰을 처리해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편했다.

“요즘 제일 인기 많은 걸로 사뒀다니까 걱정 마.”

“별로 걱정은 안 해요. 수연 씨가 어련히 알아서 잘 골랐을까.”

“예나 지금이나 너는 김수연을 참 잘 따르는 것 같네. 어쩔 땐 나보다도 더.”

“그러라고 나한테 붙인 거 아닌가.”

그렇지 않냐며 그를 쳐다봤다. 무심한 눈이 맞닿은 곳에 실소가 번졌다. 어쨌거나 내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너 내 번호는 알고 있어?”

“몰라도 물어보면 되죠. 집에 사람이 몇인데 그거 하나 모를까.”

“모른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네.”

“……그래요, 몰라요.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할 필요도 아직 못 느꼈어. 됐죠?”

내 반박에 다소 서운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린 지건호가 지금이라도 외우라는 양 제 번호를 읊조렸다.

외울 필요까지 뭐 있을까. 저장만 하면 될걸. 사실 지건호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상상을 하니 좀 어색했다.

그의 일정을 알고 싶다는 핑계로 얻어낸 휴대폰이었지만, 막상 돌이켜보니 내가 그동안 그에게 그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지건호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사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붙잡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할 사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게 벌어진 어지간한 일은 김수연이나 신상윤을 통해 즉각 보고될 테니까.

그가 내 보호자 행세를 해야 할 때나 기껏 연락을 주고받겠지. 예를 들면 사고가 난다거나…….

“운전은 아직 무리겠죠?”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떠보듯이 그에게 넘겼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건호의 얼굴 위로 서늘한 그늘이 깔렸다. 아마 그날의 사고를 되짚기 싫다는 뜻이었을 게다.

굳게 다문 그의 입이 무엇을 말할지 알면서도 나는 천천히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끌어올렸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번에는 그가 사고의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내가 운전하는 거 말이에요. 아직은, 안 되겠죠?”

“알면서 뭘 물어.”

“……그러게. 그냥 혹시나 싶어서.”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허탈하게 내뱉은 웃음에 그가 같은 종류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의견만은 아니야. 병원에서도 당분간 운전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고. 너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마당에, 혹시라도 또…….”

“알아. 나도 알고 있어요.”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나는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어차피 나도 운전 다시 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큰 사고를 내놓고…….”

“…….”

“미안하잖아. 나만, 살아남은 게.”

나는 지건호의 눈치를 보며 더듬듯 말을 이었다.

그가 꾸며낸 진실 속의 나는 죽은 자의 동승자일 뿐. 운전대를 잡은 건 결코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허황된 죄책감으로 목이 말랐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마른 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

찰나 가라앉았던 그의 눈동자에 색이 더해졌다. 그것은 심연에 묻어둔 진실을 까맣게 덧칠하는 색이었다. 모든 걸 덮고 이내 조롱 조로 바뀐 그의 눈은 다시금 앞을 향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도 나는, 사람이 죽었다니까.”

“죽은 사람 몫까지 살아, 그럼.”

“…….”

“그래, 그럼 되겠네.”

까칠하게 날이 선 목소리는 내게서 흐를 다음 말까지 끊어 버렸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는 내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본인 것도 채운 뒤 차를 출발시켰다.

서울로 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 역시 이 상황에서 그와 하고 싶은 말은 없었기에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할 일을 다시금 되짚어 보았다.

지현민이 내게 남긴 휴대폰. 그 속에 들어 있을지도 모를 사고 당시의 진실.

나는 지건호 몰래 숨을 몰아쉬며 두 손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붉게 변한 하늘이 마치 토막 난 내 기억 속 붉은 미등처럼 시야에 어른거렸다.

* * *

“또 등록하시고 싶은 번호가 있다면 여기에서…….”

“없어요.”

수연의 말을 일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시간을 꽤 넘긴 때였으나, 다른 사용인들을 포함한 수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의 휴대폰 때문이었다.

날 붙잡고 휴대폰 기능을 알려주던 수연에게 그런 건 차차 배우면 된다고, 됐으니 그만 가봐도 된다고 말했지만 수연은 내가 영 미심쩍은 듯했다.

어쩌면 그 병원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근처에 지건호가 버티고 있는 한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진짜로 없어요. 수연 씨, 신 대리, 여사님, 그리고 그 사람. 번호는 이렇게만 알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아, 참. 내 번호는 뭐라고 했죠?”

“본부장님 끝자리 번호랑 같고, 중간 번호만 달라요. 여기, 혹시나 싶어서.”

나는 수연이 손으로 적어 건넨 내 번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쪽지를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고맙다는 말에 눈이 마주친 수연이 살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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