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내가 본 게 정확하다면 쪽지에는 수연이 말한 내 번호와는 다른 것이 쓰여 있었다. 정황상 아마도 수연이 내게 직접 만나보길 권했던, 약을 처방한 그 병원의 전화번호였으리라.
어쩐지 긴장되어 흥분한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애써 진정시켰다. 수연은 제 볼일이 비로소 다 끝났다는 듯 그만 들어가 보겠다고 인사했다. 다른 사용인들도 수연과 함께 집을 나섰다.
다시 또 지건호와 둘만 남은 셈이었다. 이 대궐같이 너른 집에, 달랑 두 사람이라니. 낭비가 따로 없다.
‘네 집이기도 해.’
지건호는 선심 쓰듯 그렇게 말했지만 내 마음대로 직원들에게 방을 내주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지건호는 제 영역에 대한 결벽이 엄청났고, 생각해 보면 직원들도 굳이 이곳에 입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사용인들을 위해 별채 개념으로 지어준 빌라까지 근처에 있는 마당에 굳이 내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당장 필요도 없는 그들이 그리워지는 건, 지건호와 둘만 있는 상황이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하…….”
깊이 내쉰 한숨에 손에 들고만 있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등록한 번호 이외에는 설정을 바꾼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비밀번호를 걸어둘까 잠시 고민하다가 말았다. 지건호가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비밀번호를 걸 만큼 딱히 숨길 것도 없었고…….
“……비밀번호.”
나도 모르게 작게 내뱉은 그 말을 그가 들었을까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 거실에서 수연으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을 때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지건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2층에 있는 제 방에 간 듯했다. 지금까지 내려오지 않는 건 그 방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라는 거겠고.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1층 침실로 향했다. 서둘러 문을 닫고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으로 가려다가 아차 싶어 다시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러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잠금을 걸었다.
그의 차 안에서 서둘러 껐던 휴대폰, 지현민이 내게 전달한 그 휴대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워낙 찰나의 기억이라 분명하진 않지만 습관처럼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전원을 껐던 것 같고.
아니, 전원은 잠금 상태에서도 끌 수 있었던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휴대폰을 다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나는 괜히 등 뒤를 확인하고는 드레스룸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꿇어앉았다.
힘으로 겨우 뜯었던 상자를 조심히 꺼내 허벅지 위로 올렸다. 미리 준비한 커터칼로 상자 뚜껑 사이를 돌려가며 긁으니 아까는 벌리는 것조차 힘겹던 것이 수월하게 열렸다.
괜히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가볍게 핥고는 숨을 골랐다. 떨리는 마음에 심장께에 손바닥을 얹은 뒤,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에는 휴대폰만 하나 달랑 들어 있었다. 혹시 쪽지라도 남긴 게 있을까 상자 이곳저곳을 확인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럼 이 휴대폰만 있으면 그날 사고에 대한 걸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일단 최근 부재중 목록을 확인하는 게 먼저일 거라는 생각에 전원을 다시 켰다. 그러나 역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인지 휴대폰은 까만 화면만 나올 뿐이었다.
“충전기가…….”
수연이 가져다준 휴대폰 충전기를 손에 든 것과 연결했다. 지건호가 내게 사준 것과 같은 회사의 휴대폰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두 개의 휴대폰을 허벅지 위에 올리고는 양쪽을 비교했다. 크기도 비슷해 같은 기종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건호가 내게 사준 것이 구식일 리는 없고, 아마도 지현민이 남긴 것이 이전에 출시된 모델인 듯했다. 지금 보니 지현민의 것에는 생활감도 느껴졌다.
빨리 충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당연히 화면이 켜진 쪽은 지건호가 내게 사준 휴대폰이었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하나. 눈을 찌푸리며 바라본 액정 위로 지건호, 그의 이름 세 글자가 떠올랐다.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안 받으면 더 큰일이 날 듯해 엄지로 화면을 쓸었다.
- 안 자고 뭐 해.
받자마자 귓가에 닿은 그의 목소리에 순간 놀라 드레스룸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CCTV가 있던가. 설마 날 감시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내가 안 자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 자는 사람 목소리가 아니잖아. 자다가 전화를 받을 사람도 아니고.
다행히 어디서 날 지켜보는 건 아닌 듯했다. 남몰래 안도하며 한 손으로 상자를 정리하고는 콘센트에서 충전기를 뽑았다. 방문을 잠갔다지만 언제든 그가 내려올 수 있는 한 위험부담이 컸다. 지현민의 휴대폰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며 그에게 대꾸했다.
“곧 잘 거예요. 왜 전화했어요? 할 말 있으면 내려와서 하지.”
- 첫 통화는, 나랑 해야지.
“아.”
내 반응이 시원찮다 느꼈을까.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끊었나 싶어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살펴봤지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끊어요?”
용건도 끝났겠다, 먼저 끊으려다 혹시나 싶어 묻자 재빨리 그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 끊고 싶어?
“아니, 별말이 없길래.”
- 끊고 싶은 건 아니라는 거네.
이번엔 내가 말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민망했고 아니라고 하기엔 아쉬움이 앞섰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만으로 그려질 듯 말 듯 한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
고작 시야만 차단되었을 뿐인데 다른 감각이 되살아났다. 지건호가 쓰는 향수며 스킨 냄새는 물론이고 맞닿은 뺨의 온기, 깔끔하게 정돈된 손톱이 날 긁을 때의 감각까지 모두.
목소리를 다듬고는 딴청 피우듯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내려오지 그래요.”
- 그런 건 딱히 없어.
“그럼 끊고.”
- …….
“내가 먼저 끊을까요?”
- 됐어. 다 왔어.
어딜 다 왔다는 말이지. 설마 싶어 되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침실 문고리가 움직였다.
- 신지원. 너…… 문을 잠갔어?
퍽 황당하다는 그의 목소리에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 잠시, 잠시만요!”
다급히 소리치며 손에 쥐고 있던 지현민의 휴대폰을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숨겼다. 시트를 매일 교체하는 건 아니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여기에 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가 의심할 만한 요소들은 눈에 안 보이게 대충 치웠다. 이제 남은 건 나 하나뿐.
나는 몇 번의 심호흡 뒤에 문고리를 당겼다. 문 앞에 서 있던 지건호가 느릿한 시선으로 내 발끝까지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뭘 했길래 문까지 잠가.”
“잠긴 줄 몰랐어요. 닫으면서 뭔가 잘못 눌렀나 봐.”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눈매를 좁히며 진의를 찾는 얼굴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꽤 뻔뻔한 얼굴로 그를 보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직접 본인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당당한 내 태도에 그는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안으로 들였다.
작위적인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 안의 모든 물건은 원래 있던 그대로였고, 연결된 드레스룸이나 욕실 또한 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음대로 실컷 보라며 넉넉한 인심을 보였으나 단조로운 눈길로 몇 군데만 겉핥기식으로 확인한 그는 천천히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막 샤워를 끝내고 온 건지 그에게선 은은한 베르가못 향이 느껴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 향을 외면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편한 차림의 그는 곧 잠자리에 들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전화도 모자라서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고. 이런 식으로 매일 생존 확인 해야 하는 건 아니죠?”
“할 말 있으면 내려오라던 건 너야.”
“그 할 말 없다던 건 바로 당신이고요.”
그가 만들어낼 핑계가 궁금해 가만히 바라봤다. 적당히 생각을 헤집던 그가 내 손에 든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휴대폰은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건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연락할 수단이 생겼다는 게 나로서는 숨통이 트였다.
“어디 좀 봐.”
“……뭘?”
“휴대폰 말이야.”
그는 허락을 더 구할 시간은 없다는 듯 내 손에 있던 휴대폰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내가 화면을 보지 못하게끔 제 턱 가까이까지 손을 높이 올렸다. 도대체 남의 휴대폰으로 뭘 하려고 이러나, 뒤꿈치까지 들고 그의 시선를 좇았으나 역부족이었다.
확인할 게 있는지 엄지로 화면을 몇 번 쓸던 그의 눈썹이 반항하듯 꿈틀거렸다. 이내 못마땅하다는 눈이 나를 향했다. 찔릴 것도 없는데 괜히 움츠러든 마음에 목소리를 죽였다.
“뭔데. 왜 그러는데요.”
“설마 매일같이 네 남편 이름을 까먹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뭘. 그게 무슨 소리야.”
치켜든 눈앞으로 그가 휴대폰을 내보였다. 화면에는 그의 번호와 함께 그의 이름 세 글자가 크게 떠 있었다.
“이게 왜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혹시 이름에 오타가 있나 획을 따라 살펴봤으나 정자체로 적힌 그의 이름에는 오타라고 오해할 법한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괜한 시비였다. 나는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고는 화면 속 그의 이름을 성의 없이 문질렀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요. 괜히 방해하지 말고.”
“너 혼자 문까지 잠그고 뭘 할 생각이었길래 방해를 한다는 거야.”
“……내가 하긴 뭘 해요. 그냥 피곤하니까 난 이만 자겠다는 거지.”
그러나 지건호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침대 쪽으로 걸음을 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여기서 같이 잘 거면 거기 서 있지 말고 올라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