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그러고 보니 잠든 지건호의 모습을 본 건 그가 전에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가 유일했다. 몇 번의 밤을 같이 보내면서도 늘 내가 먼저 잠들었으니까.
어쩌면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로, 옆자리에 있는 그에게 귀를 한껏 기울였다.
지건호는 아직 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휴대폰으로 뭔가를 확인하는 듯했지만 업무를 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회사 일은 죄다 저 혼자 처리하는 척 굴더니 어제오늘은 일이 바쁘지도 않은 걸까. 가려던 출장까지 취소한 걸 보니 대단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나 싶고.
“못 자는 거야, 아니면 안 자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으로 늘어진 머릿속으로 불쑥 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를 등지고 옆으로 누워 있던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눈에 그가 보고 있던 휴대폰을 옆으로 내렸다. 뻐근해 보이는 눈매를 손바닥으로 잠시 누르고는 건조한 목소리를 다시 내뱉었다.
“나 때문에 못 자는 거라면 피해 줄 거고.”
“안 자는 거예요.”
명료한 대답에 그가 내리깐 시선을 내게 보냈다. 피로에 젖은 눈동자는 내 옆에 켜둔 스탠드 조명이 만든 따뜻한 빛으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잠든 널 붙잡고 내가 무슨 짓을 해.”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나 아팠을 때, 당신이 나한테 한 짓 다 알고 있으니까.”
그날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듯 가늘어졌던 그의 눈매가 헛웃음과 함께 끝을 휘었다. 발끈하여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저 제 욕구 해소에 급급하여 내 목과 가슴 주위로 붉은 흔적을 남겼던 지건호였다. 심지어 그는 제 눈으로 직접 얼룩진 내 몸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뻔뻔하게 그날 일을 숨기고 있는 지건호가 괘씸했다. 그러나 그는 제가 되레 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억지 해석 하지 마.”
“억지, 그날 당신이 나한테 한 게 더 억지겠지. 그때 우리는 지금처럼 사이가 좋…….”
그는 왜 말을 끊냐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짐짓 장난스러운 그 얼굴은 내 말에 어폐가 있음을 진작 눈치챘다는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뭐 그리 있다고 사이가 좋고 말고를 논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 우리를 두고 과연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있을는지.
겨우 한 침대에 누웠다 뿐이지, 그렇다고 제대로 마음이 통해 몸을 섞은 것도 아니었다.
눌러 다문 내 입술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는 답이 필요 없다 싶었는지 제 옆에 있던 스탠드 조명의 밝기를 낮추고는 기대어 있던 몸을 정자세로 바로 뉘었다. 곧바로 감은 눈 아래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내렸다.
“그렇게 볼 거면 눈 감아.”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요.”
눈 감고 있으면서 뭘 다 아는 척이야. 지레 찔려 불퉁하게 나간 말에 지건호가 작게 웃었다.
“치한 보듯 보고 있잖아. 더럽고, 경멸스럽다는 것처럼.”
아니냐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주친 시선은 올이 풀린 내 지난 기억까지 모조리 옭아매는 것 같았다. 혀끝에 고여 있던 단어를 겨우 뱉었다.
“경멸까지는 아니에요.”
“더러운 건 맞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무튼 난 잘 때 허락 없이 건드리는 거 싫어.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겠고 지금은 그래요.”
“…….”
“내가 앞으로 기억을 얼마나 되찾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줬으면 좋겠어.”
“…….”
“그게 당신이 원하는 최선이라면 말이에요.”
좋았던 기억까지 모두 덮어버리는 최선.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일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등 뒤로 그러겠다는 그의 대답이 짧게 떨어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침대 아래에 묻어둔 휴대폰을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실을 호도하는 게 최선이라면, 차라리 차악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냐는 생각을 애써 외면하면서.
* * *
눈을 뜨자마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옆자리에 지건호는 없었다. 근처에 있어야 할 수연도 오늘은 출근이 늦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누구의 눈도 없다는 게 중요할 뿐.
침대 아래로 조심히 발을 내리고는 매트리스 아래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가서 휴대폰을 충전기와 연결했다. 방해받지 않으려면 오늘 침실 청소는 하지 말라고 말해 두어야겠다 싶었다.
아쉽게도 지건호의 바람처럼 기억을 모두 묻어두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건 날 위한 길이자, 지건호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기억의 조각이 그의 숨통을 찌르기 전에 꼼꼼히 이어붙여 날을 무디게 만들어야 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현민의 휴대폰을 켰다. 역시 누군가 사용하던 것임은 맞는 듯, 배경화면은 기본적으로 설정된 화면이 아니었는데 휴대폰을 사용하던 이가 찍어둔 듯한 사진이었다.
그걸 자세히 보기 위해 화면을 터치하자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아쉽게도 지문이나 얼굴인식을 통한 잠금 해제 방법은 없는 듯했다.
비밀번호, 비밀번호…….
어제 나도 모르게 잠금을 열었다는 건 착각이었던 걸까. 힌트조차 없는 비밀번호에 머리를 굴리다가 아무 숫자나 눌렀지만 그리 쉽게 열릴 리가 없었다.
혹시 휴대폰이 들어 있던 상자에 힌트가 될 만한 무언가가 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싶어 다시 뒤적여봤으나 나오는 건 없었다.
지현민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볼 수도 없고.
그러다 문득 이 상자를 건넨 매장 직원이 생각났다. 류정혜. 그녀의 명함을 아직 보관하고 있었다. 이제 내 휴대폰도 있겠다, 직접적으로 지현민과 통할 수는 없어도 중간 연락책을 둘 수는 있을 터였다.
지금 당장 연락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려나. 아니, 어쩌면 어제처럼 먼저 연락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어제 부재중 전화가 지현민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답답하면 어떻게든 손을 뻗어 올 사람이었다. 그도 내게서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것까지 던져준 것이겠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며 주변을 정리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다. 지건호가 사준 내 진짜 휴대폰 벨 소리.
잰걸음으로 다시 침실로 가 침대맡에 둔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 속 지건호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죄를 짓다 들키기라도 한 양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짐짓 태연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통화 연결음이 길어져 안 받을 줄 알았던 건지, 잠깐 멀어졌던 목소리가 가까이 붙었다.
- 자는 줄 알았더니.
“그럴 줄 알았으면 전화를 안 했어야죠.”
서로 인사를 생략한 전화에는 별다른 목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는데 깨웠으면 미안하다는 상투적인 말도 지운 채로 작게 웃기만 했다. 요즘따라 자주 들리는 그 웃음이 낯간지러워 말을 돌렸다.
“왜 전화했어요? 오늘 출근도 일찍 했나 보던데. 어제 하루 놀아서 바쁜 거 아닌가.”
- 맞아. 정신없어.
“그럼 어서 일 봐요. 전화할 시간이 어디 있어.”
- 궁금해서.
“뭐가요.”
- 너.
“…….”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은 말이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전부 보고를 받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휴대폰은 또 다른 족쇄가 된 거겠지.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하며 거세되었던 내 행동의 이유까지 찾으려고 들 것이었다.
괜히 부탁했나.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에 입술을 짓씹는데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오늘은 뭐 할 거야.
“계획이 있나요, 뭐. 병원 가는 거 아니면 갈 곳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 투정 부리는 걸로 들리네.
“투정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예요.”
- 그 사실로 인한 주관적 감정으로 지금 투정 부리는 거겠고.
“끊을까요?”
아쉬운 소리를 해 봤자 통할 사람도 아니었다. 카드를 내밀며 백화점을 휘젓게 한 것도 결국 어찌 보면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끊어요.”
- 뭐 갖고 싶은 거 없나 싶어서.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끊으려던 휴대폰을 귀에 다시 갖다 댔다.
- 어제 못 갔던 출장 지금 가.
“……그래요?”
- 곧 비행기 뜰 예정이고.
“…….”
- 그래서 며칠간은 얼굴 못 볼 거야.
“그렇겠네요.”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그럼 조심히 잘 갔다 와요.”
- 뭐 부탁할 건.
“딱히요.”
출장지가 독일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내가 거기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물어볼…… 까.
“저기, 건호 씨.”
- 말해. 듣고 있어.
“…….”
나는 막상 그를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펫 위에 엎어진 물처럼 머릿속에 어질러진 생각들이 꿈인지 진짜인지 당장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지원아. 왜 그래.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마저도 지금 날 부르는 건지, 아니면 과거의 나를 불렀던 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그냥 잠시…….”
아무렇게나 중얼거린 나는 혼몽한 와중에 무의식을 비집고 떠오른 기억을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억일까.
익숙하고도 낯선 거리. 내 주변을 빠르게 지나다니는 외국인들.
……아니, 그곳에서 이방인은 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 혹시 너 어디 아프거나 그래? 사람 불러줘? 지원아?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든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못 수선스러운 기색이 느껴져 애써 괜찮다고 답했지만 그에게 통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나 역시도 그랬다.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 어쩌면 그와 여행을 갔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나는 괜한 불안을 삼키며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여상한 어조로 그에게 대꾸했다.
“진짜 괜찮아요. 그냥, 당신 혼자 해외 나간다니 배가 좀 아파서.”
둘러댄 말에 그가 다소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기약도 없는 약속으로 나를 다독였다.
- 다음에 같이 가자. 생각해 보니 너랑 같이 해외여행 간 적도 없네.
“……그래요.”
그는 이만 끊어야겠다며 나중에 또 연락하겠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두고는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레스룸 구석에 숨겨둔 휴대폰, 어쩌면 그 배경화면 속 장소가 어딘지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