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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4)화 (44/60)

| 44화

“그래서 지 본부장은 언제 온대요?”

“모레요.”

“아이고, 모처럼 만에 자유시간이네요!”

창원댁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콩나물 꼬리를 뚝 분질렀다. 아무리 제 자식 키우듯이 한 지건호라고 해도 그가 아주 편한 존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마주 보고 앉은 나는 근처에 떨어진 콩나물 껍질을 옆으로 모으며 말을 이었다.

“여사님도 내일은 그냥 쉬셔도 괜찮아요. 그 사람 없으니 반찬 신경 쓸 것도 없을 텐데.”

“어유, 그랬다가 지 본부장한테 무슨 말을 들을 줄 알고.”

“제가 뒤탈 없게 잘 말해 놓을게요. 따님이랑 오랜만에 오붓하게 시간 보내세요. 지금 서울에 있다면서요.”

“그런 건 또 언제 들으셨대?”

“아까 여사님 통화하시는 거 옆에서 들었죠.”

결혼을 앞둔 창원댁의 딸이 일 때문에 서울에 잠시 왔는데, 혹시 시간 되면 제 엄마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창원댁은 당연히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별반 필요도 없는 애꿎은 콩나물만 다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집의 살림을 전반적으로 봐주는 사람이 창원댁이긴 했지만, 그녀의 진짜 역할은 식사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긴 해도 본가와는 비교도 안 되는 2인분 밥상, 그마저도 지건호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내 밥 하나 챙겨 달라고 그녀를 붙들긴 멋쩍었다.

“저는 알아서 잘 챙겨 먹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걱정을 내가 어떻게 안 해요. 사모님 손가락이 이래 빼빼당군데.”

급할 때면 꼭 사투리를 쓰는 창원댁은 내 손을 툭 치면서 손에 들려 있던 콩나물을 낚아챘다. 콩 비린내가 난다고 콩나물에는 손도 대지 말라며 한사코 만류하더니, 슬금슬금 거들던 나를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창원댁은 눈을 가볍게 흘겼다.

“귀한 손에 물 묻혀도 안 되는 거고.”

“귀하긴 뭘요. 저 가만 보면 손가락에 굳은살도 많아요.”

나는 이것 보라며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좁힌 눈으로 유심히 살펴보던 창원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보니까 꼭 우리 경아 손 같긴 하네요.”

“경아요?”

“아, 경아는 우리 딸내미 이름. 박진경.”

“아아. 따님분이 무용하신다고 했던가요.”

전에 지나가는 말로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알은체를 했지만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창원댁이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웃었다.

“무용이 아니라 가야금. 우리 사위가 무용했고.”

“아, 가야금.”

“에휴. 돈도 없는 집에서 그거 뒷바라지하느라 애 많이 먹었지요.”

“…….”

“그래도 국악기라서 다행이지, 뭐. 다른 거 첼로나 바이올린 같은 건 돈이 기가 막히게 든다더라고요. 유학도 기본이고.”

“…….”

“우리 시조카 중에서도 바이올린 전공한 애가 있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결국 독일 유학 하던 거 정리하고 중간에 돌아왔대요.”

“…….”

“그나마 독일은 학비 같은 건 싸다고 하던데 생활비는 뭐 공짜인가? 암튼 걔 밑에 들어간 돈이 고등학교 때 벌써 억 소리가 났다고 혀를 내두르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바이올린 전공은 특히나…….”

기억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창원댁의 말에 동조하다가 문득 기시감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이건 그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우연찮게도 모두 독일, 지금 지건호가 밟고 있는 그 땅과 연결되고 있었다.

휴대폰 배경에 내건 사진은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듯한 뮌헨의 모습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거리도 왠지 그곳과 비슷한 곳인 듯했다.

지건호는 나와 해외에 같이 나간 적이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독일은 나 혼자 방문했다는 말일 터였다.

아마도 결혼 전의 일이겠지. 내가 독어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창원댁의 시조카처럼 혹시 나도 독일로 유학이라도 갔던 걸까. 하지만 내게 그 정도의 여유 자금이 있었을 리는 없지 않나…….

“여사님.”

“네, 사모님.”

“저 결혼할 때, 그 사람 본가에서는 반대 많이 했겠죠?”

난데없는 질문에 창원댁은 잠시 당황한 듯 손을 멈추었다. 괜찮다는 얼굴로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웃어 보였으나 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연 씨한테 대충 전해 들어서 저도 알고는 있어요.”

“…….”

“꼭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냥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내가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 당연했을 거고요.”

“혹시 사모님, 옛날 기억이 좀 돌아왔어요?”

창원댁은 조심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밖에 있는 사용인들이 듣기에는 턱없이 작은, 비밀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기억이 난 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것만큼은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안 나면 계속 묻어둬요.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면 스스로 지울까.”

“…….”

“때로는 덮어두는 게 더 득이 될 때도 있는 법이에요.”

“……그 사람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누구, 지 본부장?”

살며시 미소만 지어 보이자 창원댁은 당연하다며, 피는 안 섞였지만 지건호의 반은 당신이 만든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장난인 듯 젠체하는 그 모습을 보며 따라 웃었다.

“그럼 여사님도 저 마음에 안 드셨겠어요.”

“어머, 내가?”

“여사님께도 그 사람은 아들 같은 존재였을 테니까요. 집안 좋고 능력도 좋은 여자 만났으면 하고 바라셨을 것 같은데.”

무심히 던진 말에 창원댁이 손에 든 콩나물을 내려놓았다. 나를 꾸중하는 듯, 한편으로는 다소 서운해 보이는 눈길이 내 얼굴에 닿았다. 이럴 때면 정말이지 지건호가 누구 손에 자랐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엔 놀랐던 건 사실이에요. 냉정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내 친자식 일이었으면 또 모를 일이고.”

“…….”

“근데 내가 암만 지 본부장을 정성껏 키웠다고는 해도 막말로 진짜 피 섞인 자식도 아니고.”

“…….”

“그리고 지 본부장이 좋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어요. 사모님이랑 있을 때나마 숨을 좀 제대로 쉴 거 같다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못 믿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창원댁이 말도 말라며 혀를 내둘렀다.

“내 무슨 드라마 보는 줄 알았다니까.”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기만 해도 부끄러워진다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어쨌든 지건호가 적어도 과거의 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신지원을 사랑했다는 건 진짜인 듯했다.

지건호에게는 정말 내세울 것 없는 내 배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사랑이라는 한낱 시들고 말 감정으로 모든 걸 덮을 수 있을 만큼?

아니다. 우리 관계에는 분명 숨겨진 것이 존재했다. 사랑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한 감정이었을 뿐이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지건호를 진짜 사랑이라도 하게 된 거야?’

날 조롱하던 그 목소리가 다시 이명처럼 귀에 달라붙었다.

내게 지건호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단서가 하나씩 드러날수록 머릿속은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모님,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괜찮다며 걱정 말라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은 게 영 아닌 모양인데. 아이구, 오늘은 김 실장도 오후에나 온다는데 어떡해요.”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했나 봐요. 쉬면 좀 나아지겠죠.”

“그래요, 그래. 얼른 손 씻고 침대에 가서 누워요.”

“저 저녁은 수연 씨랑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여사님도 일찍 들어가 보세요.”

창원댁은 염려 말라는 듯, 어서 방으로 들어가기나 하라며 눈짓했다. 씻은 손의 물기를 닦으면서 나는 그럼 한숨 잘 테니 오늘 침실 청소는 건너뛰어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다는 대답을 뒤로하며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잠금장치까지 누른 뒤 서둘러 발을 옮겼다.

이로써 다시 또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 * *

“도대체 비밀번호가 뭐냐고…….”

휴대폰 화면 속에는 비밀번호 오류 횟수 초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재시도할 수 있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

하아, 알려줄 거면 좀 제대로 알려줄 것이지. 그렇다고 숫자를 하나하나 끼워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너무 애를 쓴 탓일까, 지금 이게 꼭 중요한가 싶은 생각까지 몰려왔다.

……중요하긴 하지.

지현민은 내 사고 당일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려고 했다. 그걸 담고 있는 게 아마 이 휴대폰일 것이고.

혹시 서비스센터에 가져다주면 비밀번호도 풀어줄까. 명의가 다르면 그것도 안 되려나 생각하는데, 때마침 손에 든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전화가 온 것이었다.

번호가 저장된 걸 봐서 휴대폰 소유주는 발신자와 이미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나 큰 친분은 없는 듯, 점만 하나 덜렁 찍힌 발신자의 이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 어, 드디어 받네요?

“……지현민 씨?”

- 맞아요. 지현민. 그러는 그쪽은 당연히 차희……, 아. 제수씨겠죠?

“네. 신지원이에요.”

- 그래요, 그래. 지원 씨. 이렇게 통화하게 되니 반갑네요. 그쵸?

딱히 반가울 것까지는 없는 일인데. 말을 멈추자 그쪽에서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여자 목소리도 섞여 있는 걸로 봐서 혼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듣는 귀가 더 있다면 전화로 나눌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다지 거리낄 일이 아닌지 웃음 끝에 낮은 신음을 매단 지현민이 말을 이었다.

-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전화했어요.

“비밀번호를 아직 못 찾았거든요.”

- 무슨 비밀번호? 아아, 휴대폰 잠금? 뭔지는 기억도 안 나고요?

누구 것인지도 모를 휴대폰 비밀번호를 내가 무슨 수로 기억할까 싶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지현민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 아쉽네요. 거기에 재밌는 사진 되게 많을 텐데.

“지금 나 놀리는 건가요?”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 지문 같은 것도 인식 안 되나 봐요?

“……설마 내 지문이요?”

의아하다는 질문에 지현민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 지금 들고 있는 그거, 신지원 씨 휴대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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