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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5)화 (45/60)

| 45화

“진짜로 내가 쓰던 휴대폰이란 말이죠.”

- 왜 이래. 난 그런 좀스러운 걸로 거짓말하는 스타일 아니에요. 하, 그렇지, 은정아. 아, 아, 그래, 은주야.

지현민이 애타게 부르는 이름은 제 약혼녀 이름은 아니었다. 대낮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시고. 팔자가 아주 늘어지셨네. 이걸 언제까지 더 듣고 있어야 하나. 그냥 끊어 버릴까 회의감이 들던 찰나 지현민이 먼저 말을 이었다.

- 아무튼 무사히 손에 들어간 거 확인했으니 됐네. 앞으로 종종 연락할 테니 받아요.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 왜? 아, 지건호 그 새끼 때문에?

다 알면서도 묻는 저의가 뻔했다. 나는 침묵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대로 말이 없으면 먼저 끊을 용의도 있었다.

- 제수씨, 뭘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살아요. 제수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나 되게 낯서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조심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현민 씨가 다 아는 건 아니지 않나 싶은데.”

까칠하게 나간 그 말은 의도대로 그를 할퀸 모양이었다. 곧바로 목소리를 낮춘 그가 말했다.

- 신지원 씨가 어떤 사람인데.

“…….”

- 적어도 기억 잃은 제수씨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빈정대듯 말하는 지현민의 싸늘한 목소리는 경계가 분명했다. 자신과 나를 구분 짓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위치는 그와 동등한 곳이 아닌 한 칸 아래, 그곳에서 자신을 떠받들며 시키는 대로 행동할 것을 상기하는 것.

지현민은 내 희미한 기억 위에서 군림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쪽 목적이 뭐예요.”

- 내 목적?

“선의로 나한테 이런 정보를 넘겨줄 리가 없잖아. 당신 같은 사람이.”

- 하하. 이거, 내 생각보다 우리 이야기가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네요. 하긴, 그렇게 쉽게 끝낼 것도 아니긴 하지만.

나는 그의 저열한 웃음소리를 황급히 끊어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말해요.”

- 글쎄요.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지. 우선 우리 제수씨가 기억을 찾는 게 먼저니까.

“그쪽은 그럼, 내가 기억을 찾길 바라나요?”

- 그거야 당연, 하아……. 야, 너 많이 늘었다, 은주야.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소음이 이어졌다. 나는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뗐다. 함부로 끊을 수도 없는 전화에 묵묵히 그의 답을 기다리기를 잠시, 헐떡거리는 신음이 점점 거세진다 싶더니 짧은 욕설과 함께 멈추었다.

휴대폰 너머로 얼굴에는 하지 말라지 않았냐는 여자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적당히 달랜 지현민이 숨을 고르며 웃음을 흘렸다.

- 미안해요, 제수씨. 내가 요즘 후우, 여러모로 좀 바빠서.

“……그런 것 같네요.”

- 그래, 잠시만.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음, 그래서 비밀번호는 아직 모른다는 거고.

그는 여전히 기억나는 게 전혀 없냐는 듯이 나를 떠봤다. 누구보다 내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태도였다. 지건호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지현민이 내 기억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문득 의문이 스쳤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내 휴대폰이 맞는 거라면, 왜 그쪽 손에 있는 거죠?”

- 글쎄, 왜 그럴 거 같은데요?

“내가 먼저 묻지 않았던가.”

- 제수씨가 맞혀봐요.

“난 지금 그쪽이랑 한가하게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 어쩌지? 난 그럴 기분인데. 정답을 바로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나도.

“이봐요, 지현민 씨.”

- 나는 손해 보는 거래는 할지언정 재미없는 거래는 안 하거든.

“…….”

- 어쨌거나 내가 준 것들로 단서 잘 찾아봐요. 아, 그리고 미리 밝혀두는데 나는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신지원 씨가 신지원으로의 기억을 되찾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요.

전화는 질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끊겼다. 그가 남긴 응원을 떨쳐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점 하나만 띄운 휴대폰 액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신지원으로의 기억.

나는 까만 화면 속에 비친 내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 * *

김수연은 오후 늦게, 저녁 먹을 즈음이 되어 집으로 왔다. 집이라고 해도 나한테나 집이지, 수연에게는 직장과 다름없는 곳이겠지만 지건호가 집을 비운 동안은 꼼짝없이 수연이 내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할 것이었다.

수연까지 집으로 온 이상, 더 이상 방에만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 거실로 나왔다. 그동안 휴대폰 비밀번호는커녕 어떠한 실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여사님은 먼저 퇴근하셨다네요, 사모님.”

“네. 내가 먼저 들어가 보시라고 했어요. 내일까지는 여사님 휴가예요.”

왜냐고 묻는 수연에게 딸 핑계를 대면 행여 창원댁이 곤란해질까 싶어 적당한 이유를 갖다 붙였다. 금방 탄로 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지어낸 선의의 거짓말을 나무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심 김수연과의 거리를 조금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일지도 모른다.

병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수연은 완벽한 지건호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수연이 내게 병원 연락처를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지건호 몰래.

혹시 지건호와 사이가 틀어진 것일까.

그러나 수연의 얼굴만 봐서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저녁은 수연 씨랑 알아서 챙겨 먹겠다고 했는데, 괜찮죠?”

“그럼요.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니면 외출을 하시고 싶다거나.”

“외출이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잠시 멈칫했다. 고민하는 게 눈에 다 보였는지 수연이 괜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랑 같이 외출하시는 건 본부장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덤덤한 목소리에는 구태여 날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저 내게 또 다른 선택지만 보여 줄 뿐, 결국 수연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왜 오늘은 그녀가 바라는 건 무엇인지가 더 궁금해지는지.

나는 의도를 감춘 수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외출할 기력이 남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연의 눈을 피해 확인할 것도 아직 남아 있었고.

그냥 있는 반찬으로 해결하자고 말하자 수연이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다며 거실에 남아 있던 사용인들과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정원 속 나무들을 눈으로 되짚던 나도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여사님께서 다 준비해두고 가셨네요. 보니까 내일 저녁 찬까지 다 있더라고요.”

식탁에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수연은 내가 먼저 수저를 들기를 기다리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말을 건넸다. 나는 그러냐는 대답과 함께 국을 한 술 떴다.

“연락은 해 보셨어요?”

“무슨…… 아.”

수연이 무엇을 말하는지 순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한발 늦게 알아듣고는 주위를 살폈다. 사용인들은 이미 식사 준비를 끝내고 물러갔다지만 귀는 주방으로 열려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도 되나 싶어 뒷말을 삼키자 수연이 안심해도 괜찮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들어도 모르는 척할 사람들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사모님 편에 설 사람들이에요.”

“……어째서요?”

눈을 좁히고 되묻는 말에 수연은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모님이시잖아요. 그래도 저희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는 분은.”

“…….”

“새로운 일자리까지 만들어 주신 은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건.”

저들에게는 새 일자리를 만들어준 셈이나 기존에 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내쫓긴 꼴이 아닌가. 은인 소리를 듣기에는 과분한 자리였다. 게다가 날 은인으로 대접하지도 않던 사람들인데.

뭘 보고 저들이 내 편이 될 거라는 말인지.

“수연 씨는 가끔 좀 이상주의자 같아요. 그런 말 많이 들을 것 같은데.”

“아니요.”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럴 줄 알았어. 전에도 들어본 적 있죠?”

“네. 사모님께요.”

반찬을 집다 말고 수연과 눈을 마주쳤다.

하긴. 나나 모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내 과거를 다 기억하고 있을 테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내렸다. 무엇을 집었는지, 입 안에서 달콤함이 가득 퍼지며 쓴맛을 지웠다.

“수연 씨가 전해 준 곳으로 연락은 아직 안 해 봤어요.”

“사모님, 혹시 본부장님이 염려되시는 거라면.”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물로 입을 가볍게 헹구어 내며 말을 덧붙였다.

“약이 당장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리고…….”

“…….”

“지금은 그 사람 몰래 뭘 더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진심이었다. 비록 지현민과 연결된 휴대폰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그것으로 내 과거의 실마리가 될 법한 단서를 더 찾아볼 생각이지만, 여기서 더한 비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수연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내게 말했다.

“본부장님을 믿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기보다는.”

“…….”

“믿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그 사람한테.”

이 또한 내 진심이었다. 지건호의 믿음을 얻는 것. 그가 신지원으로서의 내 과거를 묻길 바라는 만큼, 나도 신지원으로서 그의 믿음을 얻어내길 바랐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라면 이게 차악의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수연 씨, 혹시 내가 예전에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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