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나는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한 수연의 눈을 보며 속으로 단어를 골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전, 내 과거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람이 바로 김수연이었다. 그러니 지건호를 제외한다면 수연은 단편적인 내 기억을 엮어줄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과거 이야기는 이미 모두 수연을 통해 전해 듣지 않았던가. 그것만 조합해 본다면 내가 외국에서 생활했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그렇다면 내 기억은 단순한 착각일까.
……아니야. 착각이라기엔 휴대폰에 증거 사진이 남아 있었잖아.
“사모님.”
상념을 끊는 부름에 헛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젓가락은 애꿎은 공기만 낚고 있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편히 하세요.”
나는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옅은 미소를 내건 수연은 어떤 말이든 대꾸할 준비가 되었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냥 별건 아니고요.”
“네, 사모님.”
“혹시 예전에 나한테 취미 같은 건 없었나 해서요.”
“취미요?”
“뭐, 여행이라거나……. 운동 아니면 그림, 악기 연주 같은 거라도요.”
수연은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이유를 갖다 붙였다.
“집에만 있으려니 조금 심심해서. 예전엔 뭐 하고 다녔나 궁금하더라고요. 뭔가를 배우고 있었다면 지금 다시 시작해도 괜찮지 않나 싶고.”
“…….”
“왜, 난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혹시 그 사람이 그러지 말래요?”
수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여 지레 발끈했다. 그러자 수연이 그런 건 아니라며 재빨리 부정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고 전 사모님께서는, 딱히 취미로 삼으셨던 건 없었어요.”
“아무것도요?”
“여러 가지 많이 해 보시긴 했지만 그게 오래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싫증을 잘 냈나 보네요.”
“그래도 그나마 꾸준하게 하시던 건.”
수연은 잠시 말을 끊고는 내 손을 쳐다봤다. 덩달아 아래로 시선을 끌어내리자 수연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첼로였어요.”
“……첼로?”
“네. 따로 레슨을 받을 만큼 꽤 좋아하셨고요.”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있던 것도 그 이유였나. 그런 거라면 창원댁이 내 손을 보며 가야금을 하던 제 딸을 떠올릴 만도 했다. 그래도 첼로라니. 감히 생각지도 못한 것에 나조차도 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레슨은 누구한테 받았어요?”
“그때 당시 대학 출강도 나가던 첼리스트인데, 지금은 결혼 후에 해외에 머문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요?”
한국에 있지 않다면 그 사람과 다시 연락을 취하는 건 힘들겠다 싶었다. 하긴, 연락을 한다고 해도 뭘 물어볼 것이나 있던가. 수연에게는 취미를 핑계로 물꼬를 튼 것이지만, 사실 과거의 신지원과 독일의 접점이 궁금해서 떠본 이야기였으니까.
……아니, 잠시만.
“수연 씨, 오스트리아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그쪽 주변국에 대해서도 잘 알겠네요. 예를 들면 스위스, 혹은 독일이라거나.”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짓씹었다 놓으면서 대답했다. 단편적인 내 기억에 기대기엔 확신이 필요했다.
“클래식 악기 전공을 하면, 그러니까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럼 독일로도 유학 많이 가지 않나요?”
“보통은 그런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첼로 레슨 받으셨던 그분도 뮌헨 국립 음대 나오시기도 했고요.”
뮌헨. 그러고 보니 이제야 또렷하게 떠올랐다.
휴대폰 배경화면 속 그 장소. 그리고 내 기억 속 그곳.
거긴 뮌헨 신시청사 앞 마리엔 광장이었다. 구시청사 한편에는 줄리엣 동상도 있었고. 생각보다 볼 것 없는 도시라며 날 찾는 이들에게 배부른 투정도 많이 했었는데…….
어째서 내가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 거지.
“혹시 그럼, 그분 지금 뮌헨에 계시나요?”
“제가 듣기로는 현재 뒤셀도르프 심포니에 있다고……. 원하시면 더 자세하게 알아볼까요?”
“아, 아니에요. 됐어요.”
괜찮다며 수연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레슨을 받던 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수연이 건넨 정보들은 일말의 가능성, 그 어두컴컴한 길을 되짚을 때 앞을 비추어줄 유일한 빛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삽시간에 떠오른 낯선 기억들은 어느새 식어 말라버린 밥알처럼 머릿속을 겉돌았다.
신지원.
불현듯 과거의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그 신지원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신지원을 흉내 내고 있는 거라면…….
그럼 나는, 지건호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말도 안 되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가정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당황한 듯 쳐다보는 수연을 발견하고는 별거 아니라며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도 오래 가진 않았다.
나는 굳어버린 표정을 감추며 속을 달래듯 물을 마셨다. 그러나 정돈되지 않은 기억은 물과 만난 기름처럼 좀처럼 녹아들지 못했다. 찌꺼기만 남은 감정이 그 기억을 더럽힐 뿐이었다.
* * *
지건호에게서 전화가 온 건 현지 시간으로 저녁,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3시가 넘은 때였다.
그야 한창 좋은 식사 시간이겠지만 여기는 어둠이 가장 짙은, 잠을 잤어도 가장 깊게 잠들었을 시간.
이건 대체 무슨 배려 없는 경우인지.
나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네.”
- 아직 안 잤나 보네.
“당신이 깨운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하나 봐요.”
-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아서.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그는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 여기 몇 시인 줄은 알아요?”
- 대충 3시…… 7분쯤 됐겠네, 이제.
시계를 확인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은 그에게서는 미안하다거나 당황스럽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담담한 말투에 되레 멋쩍어진 건 나였다.
- 그 시간까지 넌 안 자고 뭐 하는데. 혹시 내 전화 기다렸어?
이럴 줄 알았다면 휴대폰 같은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시답잖은 통화나 하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지건호 전화를 기다린다니.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 아닌가.
“……아니요. 설마요.”
- 답이 늦어.
“거리가 있으니까. 당신이랑.”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그가 피식 웃었다.
- 잘 도착했다고 전화했어.
“네.”
- …….
“다행, 이네요.”
- 그렇지.
정적이 싫어 아무렇게나 덧붙인 말에 그가 실없이 대꾸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듯, 피로가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새삼 낮고 굵은 그 목소리는 중간중간 짧게 내뱉는 한숨마저 괘종시계의 무거운 추처럼 날 울려대는 느낌이었다.
괜스레 곱아든 발끝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건네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 저녁은.
“지금 여기 시간이 몇 신데 저녁 타령이야.”
- 먹었냐고 묻는 거잖아.
“먹었어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지금 저녁 시간인 거 아니에요?”
- 저녁은 맞는데. 생각이 없네.
“왜?”
- 독일 음식 나한테 잘 안 맞아.
하긴. 한식 입맛인 지건호에게는 죄다 고역인 음식들일 테다. 알 만하다며 혼자 웃다가 그에게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어 급하게 입을 닫았다.
잘 도착했다는 말을 전하는 게 용건이었다면 이제 끊어도 될 텐데 그는 딱히 통화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저녁도 거르는 거라면 지금은 직원도 없이 혼자 있다는 말일까.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 생각은 좀 해 봤어?
“무슨 생각.”
- 뭐 부탁할 건 없는지.
“그런 거 없다니까.”
- 그래도 내일까지 잘 생각해 봐. 떠오르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는 하다못해 젤리 같은 걸 부탁해도 상관없다며 몇 가지 후보를 나열했다.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걸 보면서 말하는 건지 내뱉는 족족 죄다 간식거리였다. 농담인 듯 진담 같은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자 지건호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지원아.
“듣고 있어요.”
- 그런데 왜 말이 없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잘 몰라서.”
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기도 하고. 뒷말은 속으로 삼킨 심드렁한 대답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연이어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저녁 대신 술을 마시기로 한 모양이었다.
- 그만 끊을까 그럼.
“…….”
- 그래. 피곤할 텐데 그만 자.
“저기, 잠깐만요.”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다급한 내 목소리에 멀어졌던 그의 건조한 숨이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느긋하게 내 말을 기다리며 맥주를 들었다.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맥주를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목울대를 꿀꺽이며 삼키는 그 시원한 소리에 그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그 아래 느슨해진 눈빛. 거칠게 오르내리는 목울대, 그리고 잘게 움찔거리는 다부진 턱까지.
어두운 새벽이라 더 그랬을까. 유난히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목이 말랐다.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는지 그가 짐짓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맥주는 안 돼.
“……갑자기 무슨.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맥주 부탁하려는 거 같길래. 아닌가?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가 말하는 사소한 다행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일지. 나는 끝이 늘어진 웃음소리를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몽롱한 건 비로소 몰려든 잠에 취한 탓이라고 여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