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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7)화 (47/60)

| 47화

“일어나셨어요, 사모님.”

“네. 좋은 아침이에요.”

내뱉고 나니 다소 이상한 말이었다. 아침이라기엔 해가 중천에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뒤늦은 어색함을 감추듯 눈썹께를 긁고는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 직원에게 물 한 잔만 달라고 부탁했다.

새벽 늦게까지 길어졌던 통화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뒤따라오는 하품을 고이 삼키고는 뻐근한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물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수연 씨는 안 보이네요. 어제 여기서 잤을 텐데.”

병원 생활이 그러했듯이 지건호가 없을 땐 수연이 나를 밀착 담당하고 있었다. 출장으로 인한 그의 부재로 수연도 당연히 이 집에서 밤을 보내겠거니 생각했건만 아니었나. 궁금해 묻는 눈에 직원이 저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급한 일이라면 실장님께 연락해 볼까요?”

“아니, 괜찮아요. 그럴 필요까지는.”

다소 앳된 얼굴의 직원은 내 패악질로 인해 새로 교체되어 들어온 사용인들 중 한 명으로, 주방 일보다는 주로 청소를 맡아 하던 사람이었다. 담당 구역은 1층인지 침구를 교체할 때 자주 마주치던 얼굴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름이…….

“고마워요, 은주 씨.”

가슴께에 달린 명찰에서 시선을 곧바로 끌어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그에 은주라는 직원이 통통한 입술을 감추었다. 많아 봐야 스물넷 정도 됐으려나. 이런 집에서 잡다한 일만 하기에는 아까운 젊음이었다.

은주.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름을 되새기며 물을 넘기다가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너 많이 늘었다. 은주야.’

그러고 보니 어제 통화 중 지현민과 같이 있던 여자 이름도 은주였지 않나. 그 이름이 이리도 흔한 이름이던가.

기억을 되새기며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은주가 제법 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할 일이 남았는지, 아니면 날 피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눈치껏 내게서 멀어지려는 은주를 붙잡았다. 컵에 반쯤 남은 물이 크게 출렁였다.

“은주 씨, 어제 1층 침실 침대 시트 말이에요.”

“네? 네.”

“얼룩이 깨끗하게 안 지워졌을 것 같아서. 내가 뭘 좀 흘렸거든.”

“……얼룩이요?”

“응. 세탁 잘 됐어요?”

미지근한 탄성이 작게 흘렀다. 은주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검지에 낀 반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백화점에 갔을 때 본 반지 같은데. 은주 나이대의 여자가 덜컥 사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이지 않나 싶었다. 잘은 몰라도 사용인 월급 3개월 치는 되는, 예물이라고 해도 값이 꽤 나가는 반지였으니까.

“저, 사실은 어제 개인 사정으로 출근 못 했습니다, 사모님.”

“아, 그래요?”

곧장 눈을 치켜뜨자 은주가 고개를 숙였다.

“네. 말씀하신 시트는 제가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음, 아니에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생각해 보니까 어제 시트 교체도 안 한 거 같네요.”

나는 다른 것과 잠시 착각한 것 같다고 말을 덧붙이고는 다시금 은주의 명찰로 눈을 내렸다. 차은주. 어제 지현민과 통화할 때 성까지 다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이 이상한 우연으로 괜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텐데.

제 이름에 박힌 내 시선이 불편했는지 은주는 옷을 매무시하는 척 명찰을 손으로 가렸다. 자꾸만 달싹이는 입술이 꽤 초조해 보였다. 영락없이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됐으니까 그만 가보라며 고갯짓했다. 넉넉지도 않은 아량에 은주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리고는 급히 물러갔다. 시트는 다시 꼼꼼히 확인해 보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건호에게 사용인들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싶다. 하루아침에 급하게 바꾸면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온 걸까.

만약 차은주가 지현민의 그 은주가 맞는다면, 뭘 위해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그렇다면 지건호는 이를 다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도 김수연은 다 알고 있는 걸까. 새로 들어온 사용인들은 믿어도 된다며 날 안심하게 만든 게 그녀인데.

답을 모를 의문들이 켜켜이 쌓여만 갔으나 먼지 더미 위로 새로운 흙을 뿌리는 꼴이었다. 탁한 기억을 차마 다 씻어낼 수도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 확실한 건,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뭐가 이렇게 다들 비밀이 많으신지.”

혀를 찼으나 정작 나도 속이 투명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당장 지건호 몰래 건네받은 휴대폰만 하더라도 그에게 쉽게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만약 사고 전 내가 쓰던 휴대폰을 찾았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지건호는 그걸 어디에서 구했는지부터 추궁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지현민과의 접점이 드러날 것이고.

결국 과거의 신지원과 지현민의 관계까지 보여주겠지.

‘설마, 아니죠? 지건호를 사랑하게 됐다거나 한 건.’

틀림없는 지현민의 목소리였다. 감히 사랑을 운운하며 나를 조롱하던 그 사람. 그러나 그건 그럴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양, 당부하는 어조와도 비슷했다.

어째서, 대체 왜.

나는 사랑이라고 포장된 불완전한 감정 하나만 믿고 그의 아내 자리로 돌아온 것인데, 왜 지금 와서는 그를 부정해야 하는가.

하나씩 떠올라 점철된 기억은 단조롭던 감정마저 기어코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걸 바로잡을 열쇠는 지금으로선 하나였다.

휴대폰 비밀번호. 우선은 그것부터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최면 치료요?”

“네. 가능한가요?”

정기적인 진료일이 아니라 걱정했으나 다행히 정신과 담당의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윤을 부담스럽다는 듯 힐끔 쳐다보던 담당의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불가능한 건 아니죠. 최면 치료는 신지원 씨처럼 심인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쓰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고 후 입원해 있을 때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긴 했다. 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약물 치료로만 이어졌던 것이지만.

아마 담당의도 이를 알았기에 내 말이 뜬금없이 느껴졌을 터였다. 그녀는 조금 진지한 말투로 설득을 보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크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에요. 물론 학회에서는 최면을 치료의 일환으로 쓰고는 있습니다만.”

“…….”

“신지원 씨처럼 과거 기억에 대한 저항이 큰 환자에게 섣불리 쓰고 싶진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그렇게 찾은 기억으로 제가 더 힘들어질까 봐요.”

담당의는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제 남편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건 내가 건호에게 건넨 조언이기도 했으니까요.”

하긴. 지건호와 가까이 지내는, 그리고 그의 담당의이기도 한 사람이니 당연한 소리였다.

“혹시 뭔가 더 생각난 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그냥 편하게 말해 봐요.”

그녀의 안경 너머, 뜻을 알 수 없는 눈동자는 굳이 최면까지 갈 것도 없이 진작 내 속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이 속마음도 지건호에게 전달이 되려나. 그렇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생각하며 천천히 대꾸했다.

“저한테 아이가 있었더라고요.”

“아이요?”

“네. 아마도 사고 전에 유산이 된 것 같은데.”

“…….”

“그냥, 궁금해서요. 그때 기억이.”

나는 그게 전부라는 양 가볍게 입술 끝을 끌어당겼다. 책상 위 액자, 그녀의 아이와 찍은 사진에 머물던 시선을 의도적으로 늘이면서.

담당의는 찰나 흔들렸던 눈동자를 바로 하며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조금은 예상 가능했다. 환자를 보는 의사였다기보다는 저와 같은 여자를 보는 눈이었으니까.

“좋아요. 해봅시다. 다만 지금 당장은 시간상 어려울 것 같고, 예약을 다시 잡아보죠.”

“네, 선생님.”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에 대기 중이던 상윤을 돌아봤다. 말없이 날 바라보던 얼굴 위로 누군가를 위한 동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만을 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참. 상윤 씨, 나 휴대폰 생긴 거 들었죠.”

병원을 나와 차에 타자 그제야 잊고 있던 휴대폰이 떠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하던 상윤이 놀란 얼굴로 뒤돌아봤다. 처음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김수연이나 창원댁과 아직 소통이 안 된 건가.

“설마 아직 못 들었어요?”

“와, 전혀요!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싫다고 하시더니. 대체 언제요?”

“그제.”

그 말인즉슨 그제 발견한 내 옛 휴대폰 비밀번호를 여태껏 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신과에 와서 최면 치료까지 언급한 것도 그 탓이었다. 그것도 구태여 아이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말이다.

그 정도는 지건호도 알고 있는 정보라 그의 귀에 들어간대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아이를 핑계 삼은 건 마찬가지지만.

핑계.

그래, 어쩌면 내가 품기엔 과분한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깟 비밀번호 하나 찾겠다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이용하는 어미라니. 면목도 없지.

스스로를 조소하며 상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에 고개를 갸웃하던 상윤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본, 본부장님?”

“나예요.”

“예, 예?”

본부장은 무슨. 뒷좌석을 돌아보는 상윤에게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자 그제야 긴장된 얼굴이 누그러졌다.

“저장하라고. 내 번호.”

“아, 넵! 저는 뒷자리가 똑같아서 본부장님 번호인 줄 알았습니다.”

“일부러 세트로 맞췄나 봐요.”

“어, 직접 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번거롭게.”

덤덤히 대꾸하자 상윤이 실없이 웃었다.

“하긴 그래요. 사모님 예전에 쓰시던 번호도 끝까지 그대로 유지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때 본부장님께서 은근히, 아니다, 대놓고 서운해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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