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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8)화 (48/60)

| 48화

“예전에도 그 사람이랑 내가 번호를 맞추려고 했어요?”

“굳이 맞추려고 했다기보다는, 이왕 번호를 바꾸려면 같이 하자 이게 아니었을지…….”

그게 그 말 아닌가. 미심쩍은 눈길에 상윤이 이마를 긁적였다.

“저는 뭐, 두 분 사이 일까지는 잘 모르지만요.”

“번호는 왜 바꾸려고 했는데요?”

“어, 그게, 사모님 앞으로 자꾸 수상한 전화가 와서요.”

“……수상한 전화?”

“네. 사실 저도 며칠 전에 사모님께 휴대폰 만드시라 말씀드리고는 아차 싶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온종일 시달린 탓에 무의식중에 휴대폰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건 아닌가 해서.”

“…….”

“아무튼 진짜 다행이에요. 그때 일은 다 기억 못 하셔서.”

수상한 전화. 그건 지현민에게 걸려온 전화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지현민은 누구보다도 내가 기억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기억나는 건 없어도 추론 가능한 건 많았다.

가령 지현민과 나 사이에 오갔던, 남들 눈을 피해 행했던 검은 거래 같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게서 지현민이 얻을 수 있는 거라곤 하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방탕한 삶을 산대도 날 여자로 탐했을 리는 없을 거고, 기껏해야 지건호에 대한 정보를 원했겠지. 주로 태산건설에 대한, 그래서 지건호의 사업을 훼방 놓을 수 있는 정보들.

언젠가 수연이 말했듯, 그들 사이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에 어쩌면 내가 연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 가정일 뿐이지만 비루한 예감은 날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럼 나는 뭘 얻기 위해 지현민과 거래를 했을까. 약점을 잡혔을까. 그래서 단순한 협박을 당하고 있던 걸까.

“그때 그 사고도 지현민 전무님이 안 도와주셨다면 어휴, 큰일 날 뻔했죠.”

“지현민이요?”

날카롭게 뻗은 말에 상윤이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도 모르게 받아친 말인 듯했다. 실수했다는 듯 마른 입술을 가볍게 말아 문 상윤이 내 눈치를 봤으나 이미 들은 걸 어쩌나.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지현민 전무가 날 도와줬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내가 직접 물어볼까요?”

“아니요, 사모님!”

“무슨 소리인지 말해 봐요, 그럼.”

“……그런데 그때 이야기해 드린 거 본부장님 아시면 저 죽을 만큼 혼날 것 같은데요.”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떡해. 한마디 더 붙이나 안 붙이나 내용은 비슷할 텐데. 그리고 죽을 만큼이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어요.”

나는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라며 그를 달랬다. 룸미러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뱉은 상윤이 핸들을 고쳐 쥐었다.

“태산화학 지현민 전무님이랑 우리 본부장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사모님도 아시죠?”

“알아요.”

“사실 그래서 본부장님께서 별로 안 좋아하시는 이야기거든요.”

“서론은 됐고, 본론만 간단히 요약해 봐요.”

“아, 저 진짜 혼날 것 같은데…….”

상윤은 연신 난처하다는 기색으로 더듬듯 말을 이었다.

“그때가 그러니까, 지태강 명예회장님 비자금 조성 관련으로 검찰 소환됐을 땐가. 지주사 계열 분리하고 한창 정신없을 때 사모님께 사고가 터졌거든요.”

“사고요?”

그냥 단순한 전화가 아니었던 건가. 눈을 좁히며 묻자 룸미러를 통해 마주친 상윤은 후회가 막급하다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접촉 사고요.”

“운전자는?”

“사모님이셨고요. 그런데 사고 낸 차량이 명의가 없는 차라…….”

“그게 무슨……. 내가 운전한 차가 명의가 없는 차였단 말이에요?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조금 시끄러울 때라 언론에 새어 나갈까 쉬쉬하고 있었는데, 그게 쉽나요? 어디 인터넷 언론사에 이니셜 기사로 바로 뜨더라고요.”

“…….”

“그러고 나니 메이저 언론사에도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고요.”

그럼 나 때문에 지건호가 곤란해졌겠구나. 그러지 않아도 정신없었을 사람인데. 옛날 어른들 말처럼 집에 들어앉아 큰일 하는 사람 내조를 하기는커녕 되레 밖으로 나다니며 사고만 치고 다녔으니.

“그런데 그걸 지현민 전무님이 도와주셨어요.”

“어떻게?”

“본인이 뒤집어쓰셨죠, 뭘.”

“설마 지현민이, 나 대신 운전자 행세를 했다는 말이에요?”

황당해 되묻는 말에 상윤이 저 또한 그렇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대체 왜요?”

“제 말이요! 저도 아직까지도 그게 의문입니다. 굳이 후계자 경쟁하는 사람 아내 일에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전무님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할 분도 아니시고.”

“그렇지.”

“뭐, 아무리 피해 차주라고는 해도.”

“……피해 차주요?”

“아, 말씀 안 드렸던가요? 사모님 그 접촉 사고 피해 차량이 전무님 소유였거든요. 우연인지 뭔지.”

당연히 우연은 아니겠지. 나는 차가운 손가락 끝을 맞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사건 해결은 어떻게 됐나요.”

“사모님께서도 아직 모르고 계셨던 것처럼 다행히 잘 넘어갔습니다. 그때 다른 연예인 사건에 묻혀서 사람들 관심이 오래가지도 않았고요. 포털 기사도 다 삭제되었을 거예요. 찾아보면 몇 개 남아 있긴 하겠지만, 거기에도 사모님 얘기는 없을 테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상윤은 그것만큼은 확신한다는 어조로 내게 말했다.

또 한 번 지워진 내 이름. 지현민이 수를 쓴 거라지만 거기에 지건호의 의도는 없었을까.

“이제 보니 왜 다들 날 그런 눈으로 봤는지 알겠네요.”

“……네?”

“기억도 안 나는 과거의 나는 참,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싶어요.”

한숨처럼 읊조린 말에 상윤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습관적인 부정을 누가 모를까. 조용히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데 상윤이 우물쭈물하며 억지스러운 위로를 건넸다.

“그냥 좀, 특별하게 사셨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됐어요.”

특별하긴 대체 뭐가. 씁쓸함을 곱씹으며 애써 포장할 필요 없다고 말하자 상윤이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이건 제 진심입니다. 그때는 제가 봐도 사모님 정말 위태로워 보였으니까요.”

“…….”

“그래서 그때 배 속 아기도 그렇게 된…….”

마주친 시선에 상윤이 아차 싶다는 듯 재빨리 눈을 피했다. 죄송하다며, 저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왔다며 제 머리를 쥐어박는 주먹에 꽤 무게가 실렸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헛소리를…… 실언했습니다.”

“괜찮아요. 헛소리는 아니지.”

“…….”

“그걸 헛소리라고 하면 진짜 세상에 없었던 거 같잖아.”

아이가 왔다 간 흔적도 나는 다 잊어버려 알 수가 없는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상윤을 향해 됐으니 운전이나 제대로 하라며 웃어 보였다. 이내 침묵이 감도는 차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비밀번호 하나 찾아보겠다고 나왔다가 이게 뭔지. 뜻하지 않은 정보만 더 알아간다.

지현민과의 접촉 사고. 그럼 그게 내 약점으로 잡혔던 걸까. 아니, 상윤이 말하기론 그 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수상한 전화는 정말 지현민으로부터 걸려온 게 맞았을까.

결국 또다. 의문은 다시 내 옛 휴대폰으로 귀결되었다.

어떻게든 빨리 비밀번호부터 풀어야 했다.

나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눈을 뜬 시야에 벌써 눈에 익은 익숙한 거리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상윤 씨.”

“네, 사모님.”

“상윤 씨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차고 문이 열리는 걸 기다리던 상윤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어서 주차부터 하라며 턱짓하고는 차에 시동이 꺼졌을 때 말을 이었다.

“이 차에 지건호 귀 있어요.”

“……예?”

무슨 해괴한 말이냐는 듯 상윤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우리 대화 다 몰래 녹음되고 있을 거라고.”

“아, 차량 블랙박스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벤트 있을 때만 작동되는 거…… 아닌, 아니에요?”

“글쎄. 나야 모르죠. 그런데 지건호 씨는 다 알더라고. 우리가 나눈 대화.”

“……사모님. 그렇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씀하시면.”

“어쨌거나 난 분명 경고했어요. 오늘도 수고 많았고요.”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운전석 쪽에서 상윤이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까지 같이 해결하기엔 내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집에 들어서자 창원댁이 날 맞았다. 겨우 하루 반 정도의 휴가였을 뿐인데 창원댁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진 듯했다.

“병원은 잘 다녀오셨어요, 사모님?”

“네. 여사님도 어제 따님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 봐요. 얼굴 좋아 보이세요.”

“아유, 즐거운 시간은 무슨요. 그 가시나 하루라도 빨리 치워 버려야 내 속이 편하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창원댁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나는 우선 간단하게 씻고 나오겠다 대답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수연과 맞닥뜨린 건 그때였다.

“수연 씨?”

“아, 오셨어요.”

문고리를 먼저 잡아 돌린 탓에 놀랐는지 조금 커졌던 수연의 눈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왜 내 침실에서 나오냐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으나 굳이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김수연은 언제든 내 곁에 있던 사람이니, 이곳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병원 다녀오셨다는 말은 들었어요.”

“응.”

묘한 찝찝함 속에서 단추를 하나씩 풀자 드레스룸으로 뒤따라온 수연이 탈의를 거들었다.

“그럼 혹시 그 약에 대해서는.”

“수연 씨.”

“네.”

목소리를 낮추어 묻던 수연이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수연의 손에 들린 옷을 건네받으며 끊었던 말을 돌렸다.

“차은주 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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