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네, 사모님.”
수연은 여상한 태도로 대꾸했다. 내가 차은주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없어 보였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던데. 몇 살이에요?”
“스물셋이요.”
“그럼 이 일은 우리 집이 처음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 집. 스스로 그렇게 말해놓고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혀끝에 민망함이 감돌았다.
지건호 집이지, 그와 나를 우리라고 묶을 수나 있을까.
멋쩍음을 물리치며 옷을 마저 갈아입자 옆에 있던 수연이 물었다.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언짢으셨던 일이 있었을까요?”
“아니. 그런 일 없었어요. 그냥 조금 궁금해서. 이런 곳에서 일하기엔 어리다 싶어서요.”
“형편이 조금 넉넉지 못한 것 같았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고깃집 일도 하고, 여기 오기 전까지는 원래 호텔에서 일했더라고요. 그쪽에 저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소개받은 건데, 듣기로는 꽤 성실했다고 해요.”
“음, 호텔이라면 혹시.”
“얼마 전 본부장님과 같이 방문하셨던 그 호텔이요.”
지현민이 즐겨 찾는 제 약혼녀의 호텔. 그곳에서 일하던, 현재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직원. 그녀의 이름과 지현민 내연녀의 이름이 같을 확률은…….
우연에 우연이 연달아 겹치니 확신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지현민이 제 여자를 내게 붙인 이유를 찾아봐야 할까. 아니면 차은주가 지현민의 사람인 걸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김수연을 의심해야 할까.
끝도 없는 의심과 함께 꼬여버린 기억들로 두통이 일었다. 이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지건호가 생각난 건 당최 무엇 때문이었는지.
쓸데없는 감정을 지우고는 이 집 도우미 일이 그 정도로 대우가 좋냐고 물었다. 다소 비꼬는 듯한 어조였음에도 수연은 능숙한 태도로 긍정했다.
“제법 경쟁률이 센 자리예요.”
그러고 보면 신상윤도 수행 기사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 딴에는 면접도 힘들게 뚫고 들어온 곳이라며, 장난스럽게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네요, 이 집은. 도우미 일까지도.”
“그만큼 본부장님께서 사모님 관련된 거라면 신경을 많이 쓰시니까요.”
“…….”
“사모님께서도 이미 그렇게 느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꼭 날 위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이들이 지건호에게 가지는 이 절대적인 경외감의 근거는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나 같은 미친 여자를 아직도 놓지 못하는 데에 연민을 느끼는 걸까.
“저기, 수연 씨.”
“네.”
“그 사람 말이에요.”
“본부장님 말씀일까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말을 멈추었다.
절대적인 믿음이란 아마 이런 거겠지. 내가 모든 이를 의심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는 배제한 것처럼.
“회사에는 이제 별문제 없는 거 맞죠?”
“……회사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여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던 수연이 살짝 동요했다. 의도를 캐묻는 시선이 조금 날을 세웠다.
나는 되레 별뜻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동안 계속 언론에서 태산 얘기하느라 시끄러웠잖아요.”
“…….”
“뭐, 태산화학 쪽을 더 잡은 것 같긴 하지만. 그 사람은 괜찮은 거 맞아요? 전에는 검찰 조사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더니.”
“……네. 아직까지는 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요.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제아무리 태산이라고 해도 나랏일까지는 감히 제 손으로 좌우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태산 창업주이자 명예회장인 지태강이 그 고령의 나이로 구치소 신세를 지지도 않았겠지. 그 아들이자 지건호의 친부인 지용현도 마찬가지일 테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간 연기처럼 피어오른 기억에 온몸이 굳었다. 장례식장 특유의 향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듯했다. 색을 빼앗긴 머릿속에서는 다들 검은 옷을 입은 채로 뻐꾸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지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나는 문상객을 맞는 상주였다는 것. 그 말은 아마 내 부모님 상을 치르던 때란 뜻이겠고.
그렇다면 이건 지건호를 만나기 전 기억일 것이다. 수연에게 들었던 정보에 따르면 내 부모는 그와 만나기 전에 세상을 떴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왜.
왜 내가 상주로 있는 장례식장에 지건호의 친부, 지용현이 조문을 온 거지.
왜곡된 기억일까. 하지만 지용현이 건네던 인사는 무엇보다도 귀에 선명하게 남았다. 서로 고개를 숙이며 맞절하던 것까지도.
그렇다면 내가 그 이전부터 지용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대체 어떤 관계가 있었다고?
“수연 씨.”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자 수연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키웠다. 그 말간 눈동자 위로 잠시 잊고 지냈던 지난 기억이 덧씌워졌다.
‘하지만 본부장님. 혹시라도 나중에 다 알게 되면요.’
‘책임은 다 내가 질 테니까 김 실장은 계획대로 처리만 해 주세요. 필요한 서류는 알아서 준비해두고. 아, 지원이 가족들은…….’
수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건호가 밀어붙이려던 계획은 뭘까. 내 가족이라고 함은, 내게 남은 다른 가족이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 약 말인데.”
내가 가리키는 약이 무엇인지 기민하게 눈치챈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찾아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
“그러니까 복용 방법이라거나, 부작용 같은?”
아마 수연은 내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쉬이 눈치챘을 것이다.
“네. 그게 무엇이 됐든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연 씨는 정확하게는 모르고요.”
“아무래도 저는 전문 의료인이 아니니까요.”
나 역시 수연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 하는 정보라는 것. 그러나 지건호의 눈을 피해야 하고 수연의 입을 빌릴 수도 없다는 것.
“그래요.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요.”
뒤늦은 인사와 함께 샤워를 먼저 해야겠다는 내 말에 수연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다 무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려 덧붙였다.
“내일 본부장님께서는 오후 늦게 도착하신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사모님.”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욕실 문을 닫았다. 내일 지건호가 돌아오기 전에 처리할 게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 * *
지건호가 돌아온 건 다음 날 늦은 저녁이었다. 독일에 도착해서는 시답잖은 전화를 잘만 하더니, 일이 바빴는지 어제부터는 연락이 통 없던 참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찾지 못했다.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지도.
“지원이는?”
집으로 들어온 그는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나부터 찾았다. 원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저리 불렀던가 싶을 정도로, 지건호는 그동안의 내 행적을 보고 받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어쩌면 어제 제 허락 없이 병원에 다녀온 것 때문에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나는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서 몸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도 짧은 일정이 제법 고단했는지 마주친 얼굴이 조금 퍼석했다. 그 못지않게 얼굴이 굳은 상윤이 캐리어를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나만 느낀 건 아닌지 상윤에게서 짐 하나를 건네받은 수연이 무슨 일이 있었냐며 넌지시 눈으로 묻는 게 보였다. 상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으나 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들켰나 보네.
죽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얼굴을 보자니, 아무래도 상윤과 어제 차에서 나눈 이야기가 모조리 그의 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왔어요?”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에 내걸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그의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시선이 맞닿은 상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와는 당장 눈도 안 마주치고 싶다는 눈치였다.
“배고프지 않아요?”
“신 대리.”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지건호는 제 뒤에 있던 상윤을 향해 캐리어를 2층으로 올려놓으라고 턱짓했다. 이 무거운 걸 2층까지 어떻게 올리냐며 뜨악한 표정을 짓던 상윤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는 알겠다며 발을 옮겼다.
끙끙대며 계단을 오르는 상윤에게는 눈길조차 안 주던 지건호는 수연을 포함한 사용인들이 다시 흩어지자 그제야 내게 말을 건넸다.
“너 저녁은.”
퍽 다정한 어조였다. 상윤을 다룰 때와는 판이한 그 목소리가 외려 어색해 눈을 내리며 대답했다.
“시간이 몇 신데요. 진작 먹었지, 나는.”
“나도 됐어, 그럼.”
“나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요. 오늘 여사님이 당신 오는 날이라고 반찬이며 국이며 맛있는 거 많이 해 놓으셨어요.”
현지 음식 잘 못 먹었을 거 아니냐고, 사양 말고 들라는 식으로 쳐다봤으나 그는 괜찮다는 듯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피곤하네.”
“……그럼 얼른 씻고 자든가.”
“너는.”
“나는 조금 더 이따가 잘 거예요. 아직 자기엔 시간이 이르잖아.”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뭘 말하냐는 거냐고 눈을 치떴다. 답답한 듯 셔츠 단추를 하나 푼 그가 말을 이었다.
“너는 씻었냐고.”
“…….”
“꼴을 보니 너도 아직인 것 같긴 한데.”
뚫어지게 보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는 나대로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대답하려는데 지건호가 내 말을 낚아챘다.
“같이 씻을래?”
달라붙은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