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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50)화 (50/60)

| 50화

덤덤한 목소리만 본다면 그는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슬쩍 곁눈질로 훑으며 답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내가 너랑 농담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다고 같이 씻기만 하자는 건.”

“당연히 아니지.”

“…….”

“10분 줄게. 생각해 봐.”

그러고는 먼저 들어가겠다며 발을 뗐다. 1층에 있는 내 침실 방향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왜 저래. 집에 오는 동안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뭘 잘 먹어서 저러나. 뭐가 되었든 간에 배는 안 고픈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자리만 지키고 있던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2층에 올라가서 상윤과 같이 짐을 풀던 김수연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닫힌 침실 문을 확인하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요?”

“연락은 닿았는데, 그쪽에서 답이 없네요.”

“음, 그냥 내가 직접 하는 게 나았을까.”

수연에게 사고 전 내가 첼로 레슨 받던 교수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 부탁한 참이었다. 수연이 제가 먼저 필요하면 연락처를 알아보겠다며 말을 던져놨던 터라 그리 수상한 부탁은 아니었다.

지건호에게 들킨다고 해도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 수연에게 말한 것처럼 집에만 있기 따분하니 취미 생활을 시작해 볼까 싶다고. 예전에 첼로를 배웠다고 들었는데 이왕이면 하던 걸 해 보는 게 덜 지겹지 않겠냐고. 내 나름대로는 그런 합리적인 변명 거리도 있었다.

“기다리다 보면 연락이 오겠죠. 딱히 급한 건 아니니까.”

기억은 더디고, 시간이 그만큼 길어질수록 불길한 예감만 크기를 키우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그 연락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내게 해야 할 숙제도 남아 있었고.

“사모님께서는 오늘 일, 잘 해결하신 거 맞죠?”

“덕분에요. 나 외출하고 온 거 아직 그 사람은 모르죠?”

“네. 저는 본부장님께 따로 보고 안 드렸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수연 씨.”

수연은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수연 씨 다 믿는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죠?”

“…….”

침묵으로 긍정하는 수연에게서는 억울하다거나 놀랐다는 기색이 보이진 않았다. 말 없는 동조에 나는 옅은 웃음을 내걸며 말했다.

“그러니까 수연 씨도 나 너무 믿지 말라고요. 이미 그러고 있겠지만.”

“아니에요, 사모님. 저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서로 믿어봐요, 우리.”

나는 수연에게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다고, 그만 퇴근해 보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알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믿음의 대다수는 근거를 갖다 붙이기 나름이라 생각하면서.

* * *

욕실 문이 열린 것은 그가 내게 준다던 10분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피로에 젖은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쳐낸 지건호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작게 한숨 쉬었다.

“다행이네.”

“뭐가요?”

“이대로 물에 불어 터지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왜 이제야 들어오냐는 타박이었다.

그럼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여기서 물이나 맞으며 날 기다릴 생각이었나.

웃기지도 않는 말에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위로 그의 시선이 짓궂게 따라붙었다.

“농담할 사이 아니라면서요.”

“넌 이게 농담 같아 보여?”

나는 그가 가리킨 제 성기를 무감한 눈으로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저걸로 농담 삼을 것이었다면 웃기기라도 했겠지. 불어 터질 뻔했다는 건 맞는 말인지 물줄기 속에서 부피를 키운 성기는 가히 무기와 다름없었다.

저 정도로 크면 본인한테나 좋겠지, 저걸 품는 여자들은…….

“오늘은 어디까지 할 거예요?”

괜한 의문에 애써 돌려 물었지만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그가 내 팔꿈치를 잡아 가까이 당겼다. 맞닿은 몸이 벌써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너답지 않은 질문이네. 섹스하자고 덤빌 땐 언제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왜 이래요.”

내가 덤비면 얼마나 덤볐다고. 지금 지건호만 할까 싶다. 아무리 봐도 낯선 모습이 의아해 머리를 뒤로 물렸지만 그의 손이 곧 따라왔다. 물기 어린 손으로 내 목 뒤를 여유 있게 받친 그가 가볍게 포갠 입술 위로 속삭였다.

“발정 났나 보지, 신지원한테.”

신지원. 나는 그가 내뱉은 그 이름에 속으로 조금 야유했다.

그러자 다물린 입술 위를 더듬던 지건호가 눈썹을 비딱하게 추켜세웠다. 그의 짙은 눈썹에 걸려 있던 물방울이 내 속눈썹을 지나 뺨 위로 떨어졌다.

“뭐 해. 벌려.”

고집껏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벌리자 그 틈을 놓칠세라 그가 들어왔다. 성급하게 얽힌 혀는 짧은 기다림을 벌하듯 깊숙이 침범했다.

애정이라곤 하나 없는 키스라고 느꼈다면 그건 단순한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오늘 낮, 지건호가 매일같이 건네던 그 약의 주인을 찾은 것에 대한 반발감 때문이었을까.

감히 후자였길 바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틈 없이 맞물려 있던 입술이 다소 우악스럽게 뭉개지며 신음을 흘려보냈다.

키 차이 때문인지 내 쪽으로 잔뜩 웅크리며 상체를 낮추어 키스하던 그는 다소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아 번쩍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두 발은 쉽게 땅을 딛지 못했다. 세면대 위로 날 내려놓은 그가 내 발목 하나를 감싸 쥐더니 제 팔에 걸었다.

아직 물에 젖지 않은 오금을 훑던 축축한 손은 이내 제가 감싼 다리를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긴장된 허벅지 안쪽, 가장 깊은 곳까지 닿을 듯 말 듯 하던 손가락은 다시 입술이 맞붙기 무섭게 안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다시 찾은 쾌락에 금세 익숙해진 몸은 스스로를 재빨리 달구었다. 뜨거운 숨을 주고받던 입술은 맥이 뛰는 곳마다 달라붙어 닿는 족족 붉은 흔적을 만들었다. 기묘한 간지러움에 신음하며 휘어진 몸은 아래에서 노닐던 굵은 손가락을 더 조일 뿐이었다.

“하…….”

나는 달뜬 눈길을 옮기며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콧등으로 그의 입술이 붙더니 인중으로 떨어졌다. 윗입술을 강하게 빨아올린 그는 그것이 일종의 예고라도 된다는 듯이, 같은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다리 사이를 더듬던 손가락의 개수를 하나씩 늘렸다.

“아직 제대로 안 씻었는데, 나는.”

문득 스친 생각에 그에게 반항하듯 말했으나 통할 리는 없었다. 그는 그깟 거 뭐가 대수냐는 얼굴로 내 턱을 가볍게 깨물었다.

“괜찮아. 내가 씻었잖아.”

“아, 으흐…… 그래도.”

“물 아깝게 왜.”

그가 짓궂은 웃음을 내걸고는 질구에서 제 손가락을 뽑았다. 찔걱이며 젖은 소리를 내던 곳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세면대에 붙인 엉덩이까지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그가 젖은 손으로 음부를 두드렸다.

“이걸로 씻으면 되겠네.”

“아, 무슨.”

많이도 흘렸다며 장난스럽게 타박하던 입술로 날 가볍게 물었다 놓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씻겨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제대로 된 호의가 아니었음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리 사이에 그의 얼굴이 파묻혔다. 연이어 음핵을 감싸는 혀에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씻겨준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그는 끝을 뾰족하게 세운 혀로 제 손가락이 드나들던 곳을 막았다가 고여 있던 액을 퍼내며 제 타액과 섞었다.

높다란 콧대가 붉은 정점을 스칠 때면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지난한 비행으로 거칠어진 턱은 오히려 새로운 자극점이 된 것 같았다. 자꾸만 움찔거리는 엉덩이를 붙잡아 고정한 그는 이런 식으로 허기를 달랠 심산 같기도 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천장을 향해 치들린 턱을 가까스로 내리며 그의 얼굴을 끌어올렸다. 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모습만 본다면 취객이 따로 없을 듯했다.

뭐, 피로에 취한 사람은 맞았으니까. 그러니 날 보자마자 섹스할 생각이나 했을 테고.

달뜬 몸과는 다르게 머릿속에 고여 있는 생각은 한없이 건조할 따름이었다. 비딱하게 각진 시야 끝에 그의 성기가 걸렸다. 그의 말마따나 터지기 직전의 발기한 페니스는 쉬이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제 것을 잡고 길게 훑었다. 나는 그의 고생을 덜어주려 배꼽까지 올라붙은 그것을 손에 쥐고는 내 음부에 맞추었다.

연신 뻐금거리던 질구는 지건호에게 당황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귀두를 겨우 지나 굵어진 부분에서 조금 버거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가 물렸던 허리를 곧장 쳐올리자마자 끝만 물고 있던 것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하아…….”

신음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그와 내 입에서 같이 떨어졌다. 나는 흩어진 목소리를 주워 담을 것처럼 맞물린 부위로 시선을 내렸다. 저를 삼킨 나를 망연히 응시하고 있던 그 역시 다른 말은 잊은 것 같았다.

수없이 겹쳐본 몸일 터였다. 전부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그럼에도 그 모든 걸 되찾고 싶을 정도로 생경한 감각이 깨어났다.

지건호는 이 행위를 무슨 생각으로 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하고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머릿속을 뒤집어엎고 싶었다. 나처럼 엉망으로. 가능하다면 제일 최악의 방식으로.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날 바라보는 눈은 도무지 흩어지지 않았다. 이마 위로 곤두선 핏줄이나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멈춰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움직여요.”

나는 매달리다시피 안기며 그를 재촉했다. 그에 작게 욕설을 짓씹은 지건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웠으나 흐려지지 않은 감각들이 그를 붙잡고 같이 신음했다. 숨통을 틀어막은 쾌락이 각기 다른 형태로 흘러나왔다.

흐르는 것은 비단 그가 만든 물기만은 아니었다. 그 젖은 소리를 감추듯 내보내는 교성만도 아니었다.

기억.

벌겋게 열이 오른 다리 사이에서 흐르고 있던 건 지건호가 그토록 덮고자 했던 과거였다.

이를테면 차희원. 그 여자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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