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나는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지건호를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샤워기가 정강이를 향해 물을 쏘았다. 한 손으로 수전을 잠근 그는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삽입하고 나서는 내내 그저 형식적으로만 붙었던 입술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서로를 탐하는 것 같았다.
지건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 테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남긴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애정을 빙자한 키스로 내가 잃어버린 과거까지도 덮어 버리는 사람.
만약 내가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눈을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같잖은 키스를 나눠줄까.
어쩐지 조금 설레는 마음을 뒤로하며 그에게 팔을 둘렀다. 맞닿은 가슴 아래 달음박질하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는 듯했다.
* * *
“세상에, 이게 진짜 뭔 일이야.”
창원댁의 호들갑에 옆에 있던 수연이 살짝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신 놀랍다는 듯 날 쳐다보는 눈길에 어쩐지 조금 머쓱해졌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가 봐요. 지 본부장 늦잠 자는 거 처음 봤네.”
늦잠이라고 해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도 아니고, 고작 해야 9시가 막 지났을 때였다. 나는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며 괜히 변명하듯 말했다.
“피곤했나 봐요. 시차 적응도 못했을 거고.”
“에이, 무슨. 내가 지 본부장 본 세월이 얼만데. 남아공인가, 그 머나먼 나라 뺑뺑 돌아서 다녀왔을 때도 시차 적응 같은 거 필요도 없던 사람이 바로 저 지 본부장이었거든.”
“…….”
“우리 건호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학교 뒤꽁무니 쫓아다니던 그 시절에도 늦잠 한 번 안 잤는데.”
정말이지 웬일이냐며 이유를 찾는 창원댁의 시선은 결국 또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물을 한 잔 들이켜고는 거실로 향했다. 스피커를 만지던 수연이 날 보며 허리를 세웠다.
“준비됐어요?”
“한동안 안 쓰던 거라서 소리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관없어요. 들리기만 하면 되니까.”
“말씀하신 곡으로 지금 테스트해 볼까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아니라며 수연을 잡았다. 왜냐고 묻는 수연을 잠시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머뭇거리며 답을 못하고 있자 수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본부장님 때문에 그러실까요.”
“여사님 말씀대로 오랜만에 푹 자는 것 같아서요. 괜히 깨우기는 싫네요.”
“그럼 이어폰이나 헤드셋 같은 거라도 준비해 볼까요?”
“아니에요. 그렇게 급한 건 아니고…….”
급한 게 아닌데 왜 아침부터 수연을 붙잡고 부탁했을까.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에 멋쩍게 웃었으나 수연에게까지 옮겨가지는 않았다.
“미안, 수연 씨. 나중에 내가 할게요. 연결했으면 바로 작동할 수는 있는 거죠?”
수연은 그렇다며 몇 가지 작동법을 설명했다. 대충 눈으로 익히고는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붙였다.
간만에 집이 꽉 찬 느낌이었다. 요즘따라 다른 일로 바쁘던 김수연도 오전부터 출근했고, 창원댁도, 차은주를 비롯한 사용인들도 모두 제 위치에서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무엇보다 지건호가 집에 버티고 있으니…….
……속이 답답했다. 아직 먹은 것도 없는데 체기가 도는 것 같아 가슴께를 두드렸다. 그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지 연신 내 눈치를 살피던 차은주가 수연이 멀어지자마자 쪼르르 곁으로 다가왔다.
“저, 아침 준비할까요, 사모님?”
전에 한 번 말을 섞어서 그럴까, 아니면 지현민의 지침일까. 어제부터 유독 살갑게 말을 붙이는 얼굴에서 다른 의도를 읽어보고 싶었지만 딱히 수상한 기색이 느껴지진 않았다.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으니 차은주가 그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벌써 죄를 짓기라도 한 듯, 죄송한 마음을 감추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은주. 차희원. 이 집 남자들은 죄다 차씨 여자에게 꽂혔나 싶었다.
“차은주 씨.”
“네?”
“이런 거 묻는 거 실례인 줄 아는데, 은주 씨 남자친구 있어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큰 눈이 배로 커졌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은주의 손을 턱짓했다.
“반지 좋은 거 끼고 있길래. 커플링?”
“아, 이거요.”
무례할 법한 질문에 기분이 나빴을 만도 한데 반지 얘기에 은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현민과 그 정도의 사이인가. 눈을 좁혔다가 마주친 시선에 얼굴에 번졌던 의심을 빠르게 지웠다.
“가족이 사준 반지예요.”
“가족이라면 부모님?”
“아니요. 언니…….”
“언니?”
“네.”
제법 무거운 사연이 깃든 반지인 건지 날 보는 은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테이블에 있던 티슈를 뽑아 건넸다.
“미안해요. 내가 괜한 걸 물었나 봐.”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아니, 미안. 나는 그냥 은주 씨가, 하…….”
그럼 차은주가 지현민의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일까. 빈약한 근거였다지만 정황상 확실해 보였는데.
빗나간 가정에 나도 모르게 눈썹 사이를 좁혔다. 구겨진 내 얼굴을 보던 은주가 밝게 웃었다. 어느새 눈물 대신 다른 감정을 매단 눈이 날 보며 한없이 휘어졌다.
“저는 진짜로 괜찮아요. 또 궁금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돼요.”
“얼마든지?”
“네! 저, 사모님 기억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거든요. 뭐든 물어만 보세요. 꼭이요.”
주먹을 쥐어 파이팅, 하고 내게 작은 응원까지 건넨 은주가 고개를 꾸벅이며 멀어졌다. 꼭 그러겠다는 뒤늦은 대답은 속으로 삼켰다.
차은주가 나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이 집에서 일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데.
사고 전에 날 봤대도 기껏해야 호텔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건호와 그 호텔을 자주 방문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와…….
“…….”
말이 안 된다고 하기엔 대포차를 끌고 다니다 사고나 내던 사람이 바로 과거의 나, 신지원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그때 지현민과의 접촉 사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지건호에게 들킨 게 분명한데 왜 여태 아무 말도 없었을까.
괜한 불안감에 침실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닫고는 침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그는 잠에서 깨지 않은 듯했다.
그러게 어제 마지막 섹스는 하는 게 아니었는데. 왜 고집을 부려서는.
욕실부터 그와 이어진 채로 걸어 나와서는 침대에 미처 오르지도 못하고 이 바닥에서 마무리했던 걸 생각하니 아직까지 밑이 쓰라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건호에게는 이 정도로 곯아떨어질 정도의 섹스는 아니었지 않나. 나만 괜찮다면 몇 번이고 더 하면 더 했지.
그저 밀린 잠을 자는 거겠지. 불편한 곳을 떠나 온전한 제집, 제 공간에서 한때나마 제 여자였던 나를 안고 비로소 평온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불쾌한 마음에 등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미세하게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드레스룸에 둔 내 옛날 휴대폰이지 않나 싶었다.
분명히 꺼둔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었나.
재빨리 발을 옮기려던 순간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경악한 마음을 감추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눈꺼풀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지건호가 한쪽 눈을 겨우 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 끝이 거칠었다. 설마 그도 저 소리를 들었을까. 긴장하여 대꾸 없이 가만히 있자 찌푸린 눈썹 아래로 조금 더 눈을 키운 그가 말을 이었다.
“어디 가냐고.”
“……아직 자는 거 같길래 나가려고요.”
내 말을 곱씹어 보는 듯 좁힌 눈으로 천천히 날 응시하던 그가 베개에 다시 머리를 내렸다. 잠을 깨고 싶은지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지만 쉽게 달아날 잠은 아닌 듯했다.
“오늘 출근 안 한다면서. 푹 쉬어요.”
“됐어. 일어나야지.”
잡힌 손목을 풀어달라는 뜻이었지만 그는 자각조차 못 하는 상태 같았다. 말로는 일어나겠다고 해놓고서는, 다시 감긴 눈꺼풀은 금방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마 이대로 또 잠든 건가.
내 손목을 붙든 손도 점점 느슨해지는 걸 보니 얕게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반듯한 미간에 잡힌 주름을 바라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행히 진동 소리 같은 건 이제 들리지 않았다.
“자요?”
“……아니.”
“아니긴 뭘.”
답지도 않은 잠투정에 맥이 풀린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한숨과도 같은 그 소리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바람에 잘게 떨리는 그 속눈썹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많이 피곤하긴 했을 것 같아, 당신.”
나 같은 여자랑 사는 거, 쉽지는 않았겠지. 그게 사고 전이었든 후였든 간에 지건호에게는 고역이었을 게 뻔했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은 그냥 속으로 넘겼다. 목에 턱 걸린 말을 혀 위에서 녹이며 애써 풀어냈다.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
“굳이 과거 일 다 덮어두려고 애쓰지 말고.”
나는 나대로, 그리고 지건호는 지건호대로.
둘이 함께라서 더 버거운 길이라면 지금이라도 한 사람은 방향을 돌리는 게 맞을 것이다.
과거의 나, 신지원이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우리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애써 원점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을 테니까.
나는 내 침대 옆에 아직 켜두었던 조명 스위치를 내렸다. 이내 지건호의 평온한 얼굴도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