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시간은 더디게,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 착실하게 흘렀다.
지건호가 출장을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 나는 그와 자연스럽게 같은 침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함께 나눈 밤에 섹스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처음을 구걸한 건 나였지만 고삐가 풀린 건 지건호였다.
그것이 내 기억을 찾기 위한 명목이든, 그의 편의를 위한 것이든 상관은 없었다. 내가 되찾아야 할 기억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방향이었다.
비록 지건호는 그 방향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은 늦을 거야. 저녁 모임 있어.”
커프링크스에 이어 시계를 착용한 그가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그의 정장 차림은 오늘도 셔츠와 진회색의 재킷이 전부였다. 가끔 격식을 차려야 하는 날에는 무난한 패턴의 타이와 베스트까지 입던 걸로 봐서 오늘 모임이 그리 중요한 자리는 아닌 듯했다.
벽에 기댄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셔츠 깃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알아요. 어제 몇 번이나 말했잖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길래. 정신없었잖아, 너.”
그게 무슨 말인가 눈을 치켜뜨자 그가 한 발 가까이 다가와서는 고개를 낮추어 기울였다. 피할 틈도 없이 내 귀에 대고 친히 흘려주는 소리는 어젯밤 날 흉내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며 얼굴을 피했지만 끈질기게 따라온 그의 입술이 다시금 노골적인 신음을 흘리고는 내 이마에 가볍게 도장을 찍으며 물러났다.
“아무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그렇게나 늦어요?”
“정확한 건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일찍 끝나진 않을 거야.”
“무슨 모임인데?”
그에 지건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새삼스럽다는 뜻이다.
“웬일로 네가 그런 걸 궁금해하지?”
“누굴 만나길래 그렇게 늦는가 싶어서요.”
“왜, 네 남편이 밖에서 다른 짓거리 할까 봐 그래?”
다른 때였다면 발끈하는 게 더 수상하다며 의심했을 터였지만 그의 질문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 속을 그대로 읽은 그는 퍽 귀여운 오해라도 했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다.
“상상이 지나치네, 신지원.”
“…….”
“나는 너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이야. 쓸데없는 걱정 사서 하지 마.”
그렇지만 저나 나나 서로에게 완전한 신뢰를 주는 사이는 아니지 않던가.
조언인지 아니면 경고인지도 모를 그의 말에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가 뒤에서 나를 낚아채듯 끌어안으며 목에 입술을 묻고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별안간 소름이 일었다. 바닥을 딛고 선 발끝까지 힘이 풀릴 듯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옷, 구겨져요.”
“무슨 상관이야. 이까짓 옷.”
“아니……. 당신 옷 말고 내 옷 말이야.”
내 허리에 두른 그의 손을 탓하며 떼어내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이런 것도 무슨 옷이라고.”
그의 손아귀에서 잔뜩 구겨진 원피스형 슬립이 배꼽 가까이 당겨 올라가며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설마 이러고 또 할 생각인가.
벌써부터 그와 맞닿은 둔부 쪽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걸 보면 여기서 당장 삽입을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늦지 않았어요?”
“이미 늦었지.”
“……할 거면 빨리하고 가든가.”
“그러기엔 부족한 시간이고.”
그럴 거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아래를 더듬는 그의 손 덕분에 작게 내쉰 한숨 끝에 열이 맺혔다. 같은 숨을 내뱉은 그가 음부를 툭툭 두드렸다.
“부었네.”
“…….”
“젖었고.”
“그만, 그만요.”
꽤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이런 상황은 여전히 자신 없었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순순히 밀려난 지건호가 제 손가락 끝을 슬쩍 보더니 입술로 물기를 훔쳐냈다. 건조한 미소 틈으로 사라졌다 빠져나온 손가락이 누구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다녀올게.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어.”
“언제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면서요.”
무슨 남자가 제가 조금 전에 한 말도 안 지키나 싶다. 불퉁한 시선에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에 손가락을 닦으며 말했다.
“그럼 자고 있든가.”
“…….”
“그것도 재밌겠네.”
뜻이 불명확한 그 말에도 그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미친놈인가 생각하는 사이 그가 손수건을 내 가슴 쪽 슬립 사이에 끼워넣고는 가볍게 두드렸다.
“필요하면 쓰고.”
어디에 쓰라는 말인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쏘아보는 눈에도 산뜻하게 웃어 보인 그는 나오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침실 문을 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수건을 빼내었다.
“그런다고 내가 당신을 믿을까…….”
작게 던진 그 말은 구겨진 손수건 속으로 형체 없이 사라졌다.
지건호도 늦게 오겠다, 오늘은 내 계획을 조금 더 늘려도 좋을 것 같았다.
* * *
최면 치료는 예전에 입원했던 병원처럼 따로 공간이 마련된 곳에서 하는 건 아니었다. 담당의의 진료실 한편에 일인용 리클라이너 소파만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병원만 왔다 하면 내 움직임을 의심하듯 살피던 상윤은 좀처럼 내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특별한 치료는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상윤 씨도 계속 여기 있으려고요?”
“그럼요?”
상윤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되물었다. 새삼스럽기까지 하다는 표정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윤에게 굳이 숨겨 가며 받을 치료는 아니었다. 이는 지건호에게 그대로 흘러가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준비되었으면 바로 시작하겠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소파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을 편안하게 들이마셨다가 내쉴게요. 열 번. 자, 하나. 마시고, 후우.”
둘, 셋…… 아홉, 열.
감은 시야에 은은한 조명이 어른거렸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듯 몽롱한 머릿속으로 내가 이미 갖고 있던 조각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신지원 씨.”
“……네.”
담당의의 말에 한발 늦게 꺼내놓은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최면에 빠졌다기보다는 뭐랄까, 얕은 꿈을 헤매고 있는 기분. 애초에 최면도 무의식 속에서 단서를 찾는 것이니 별반 다를 것 없을 테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번 최면 치료도 그다지 효과를 볼 것 같진 않았다.
“지원 씨. 자, 편안하게 호흡하면서 눈앞에 있는 걸 하나씩 지워봅시다. 지금은 뭐가 보이나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고 후 텅 비어 있던 내 머릿속처럼. 감은 눈을 찌푸리자 담당의가 다시 물었다.
“음,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들리는 소리는 없는지 귀를 더 열어볼까요.”
담당의는 몇 가지 예를 들며 내 대답을 유도했다. 새소리라거나 강아지 짖는 소리. 혹은 아이 울음소리와 같은.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시야가 그러하듯 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상태. 그저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바다를 향해 한 발씩 내딛는 기분. 빠질 듯 결코 빠질 수는 없는 물속에서 목만 겨우 빼놓고 호흡하는 것처럼 숨이 점점 가빠왔다.
“지원 씨,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편안하게 모든 감각을 열고 더 집중해 봅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숨을 골랐을까.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무언가 귓가를 두드렸다.
“아……. 잠시.”
한숨과 함께 내뱉은 그 말에 담당의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벨 소리가 들린다고 답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끄러운 벨 소리. 닦달하는 듯한 그 기계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괜찮아요, 지원 씨. 다 지나간 일이니까. 이제 그 벨 소리가 어디에서 들렸는지 생각해 봅시다. 천천히 왼쪽, 오른쪽. 발 아래도 살펴보고.”
“안, 안 보여요.”
그러나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는 그저 컴컴한 우주와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허공으로 팔을 뻗어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그 소리가 어떤 소리였을지 더 알아볼까요. 지원 씨 휴대폰이었을까?”
지금 내 휴대폰 벨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한 걸 보면 아, 예전에 쓰던 것일지도.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물에 녹은 기억들로 머릿속이 파도처럼 찰랑거리는 기분이었다.
잔물결이 이는 머릿속으로 담당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잘게 요동쳤다.
“누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을까요. 남편, 가족, 친구.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까요.”
휴대폰을 들고, 연신 시끄럽게 울려대던 벨 소리가 끊기고, 곧바로 귀에 흐르던 그 목소리는……. 얼굴을 한껏 구기며 더 떠올리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네, 좋아요. 그럼 이제 지원 씨가 알고 싶은 것을 한번 찾아볼까요?”
나는 찡그린 미간을 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기분 탓인지 유난히 꼴깍 소리를 크게 내며 넘어간 침이 열을 품고 그대로 배꼽으로 추락하는 듯했다.
“문을 차근차근 한번 열어봅시다. 자, 지원 씨는 지금 어디에 있죠?”
의사의 말을 끝으로 주위가 밝아진다 싶더니 이내 몇 가지 가전제품과 가구가 검은 시야 속에 들어왔다. 방이라고 하기엔 좁고, 거실이라고 하기에도 잡동사니가 더러 보이는.
아, 이건 지건호의 집이 아니다.
낯선 듯 익숙한 이곳. 어쩌면 이곳은 결혼 전 내가 살던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눈썹을 비틀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기억을 헤집었다.
뭔가 더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벽에 붙은 피아노. 그 위에 놓인 액자.
그래, 액자.
더 이상 최면에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되짚으며 액자 속 사진을 쳐다봤다.
“이건…….”
그건 분명 나였다.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나. 연주회 같은 걸 한 듯,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서.
나는 내 주변으로 모여 있는 가족들을 하나씩 훑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흐릿해진 이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더 발견할 수는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점점 가팔라지는 호흡에 담당의가 날 붙들었다. 생각날 듯 말 듯 한 기억의 조각이 조율되지 않은 첼로의 소리처럼 귀를 할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