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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54)화 (54/60)

| 54화

병원 건물 앞, 작게 조성된 공원은 휴식을 즐긴다기보다는 환자들이 안정을 찾기 위한 장소 같았다.

“괜찮으세요?”

벤치에 앉은 내게 물을 건네며 묻는 상윤의 얼굴이 나보다도 더 파리했다. 괜찮다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물을 입에 털어넣듯 마셨다. 이제야 머릿속이 좀 말끔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연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상윤을 향해 턱짓했다.

“앉아요. 그렇게 서서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말고.”

“……사모님 옆에요?”

“왜. 내 옆이 싫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저기에 앉든가.”

건너편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자 그건 또 아니다 싶었는지 상윤이 머뭇거리며 옆자리에 앉았다.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벤치 끝자리에 앉는 꼴이 누굴 의식한 행동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건호겠지. 그가 건넸을 협박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피식 웃으며 남은 물을 다 들이켰다. 찬물을 마셔 그런지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날 말이에요.”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에 꽂으며 고개를 돌렸다. 상윤이 뚱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 내가 언제를 말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언제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모님.”

“그 사람 출장 다녀온 날.”

대놓고 읊은 답에 어떻게든 발뺌해 보려던 상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와 나눈 대화, 지현민과의 접촉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후회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죽을 만큼 혼나기만 할 줄 알았더니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 사람이 상윤 씨한테 뭐라고 했어요? 또 녹음 같은 거 했대요?”

“…….”

“나 일부러 여기 온 건데. 편하게 얘기하자고.”

그러자 주위를 둘러보며 망설이던 상윤이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요. 본부장님은 사모님께서 예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이상한 사람이라고요?”

“단순히 그런 이상하다는 말로 치부할 게 아니라……. 휴, 아무튼요.”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않았으면서 뭐가 아무튼이야. 어이없어하며 쳐다보자 상윤이 고개를 조금 더 기울여왔다.

“대단한 분이시라고요.”

“…….”

“지금도요, 만약에 사모님 근처에 뭔가 위협될 만한 게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지켜보고 계시다가 바로 연락하실걸요.”

“상윤 씨, 그게 말이 돼요?”

“저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건호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날리자 상윤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진짜라니까요? 제가 그날요, 사모님 말씀 듣고 혹시 도청 장치 같은 게 있는지 샅샅이 다 확인해 봤는데 눈에 띄는 건 없었거든요.”

“블랙박스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녹음되는 거 싹 다 지웠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다 알았다는 거죠. 내가 지현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었다는 걸.”

“뭐, 생각해 보면 꼭 그 사건을 짚고 넘어가진 않으셨는데…….”

그럼 뭐야. 넘겨짚었단 말인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자 상윤이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듯 이어나갔다.

“지현민 전무님을 언급하시긴 하셨거든요.”

“그때 그 접촉 사고 얘기를 한 건 아니고요?”

“네. 그냥 지현민 전무님에 대해 사모님께 말씀드린 게 있냐고 여쭤보셔서.”

“그래서 상윤 씨는 그렇다고 했고?”

그리 허술한 말에 고이 걸려들었냐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말하다 보니 저도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인지 상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어는, 저는 원래 거짓말 같은 건 못하는 사람이잖습니까! 또 본부장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게 거짓말이기도 하고요.”

지건호가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술에 내걸었다.

“근데 어쩌지. 오늘 또 거짓말 하나 더 하게 생겼는데.”

“무슨, 어떤……. 아니, 저 모를래요. 저는 이 작당 모의에서 그냥 빠지겠습니다.”

“뭔 줄 알고 빠져요. 그리고 이미 들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상윤 씨도 공범이야.”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상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까지 내뱉는 상윤의 외침 사이로 전화벨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휴대폰을 넣어둔 주머니를 확인하다가 아차 싶어 손을 멈칫했다. 나한테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시선을 들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람이 전화를 받으며 멀어졌다.

“…….”

아까 최면 치료를 받을 때도 들렸던, 예전에 쓰던 휴대폰 벨 소리. 혹시나 비밀번호를 풀 수 있을까 싶어 들고 나왔는데 정작 상윤의 눈치를 보느라 꺼내놓지도 못했다. 최면 중 벨 소리까지 들렸다면 비밀번호는 이제 금방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럼에도 상쾌하지 않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어색하다 못해 기이한 감정까지 들어 괜히 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건호가 연락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은 잠금 하나 걸리지 않은 채로 기본 배경화면만 보일 뿐이었다.

딱히 숨길 것도, 기억할 것도 없는 상태. 마치 사고 후 모든 기억을 잃고 초기화된 나처럼. 저장된 번호는 지건호를 비롯한 그의 사람들이 전부.

그가 내게 기대하는 게 이런 거라면, 지금 거짓을 고하는 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사모님.”

쓴웃음을 삼키던 것도 잠시, 날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상윤이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가리켰다.

“통화 나누세요. 저는 저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당연하게도 지건호의 전화였다.

“네.”

- 밖인가 보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상윤의 말대로 어디서 감시라도 하고 있나 싶어 주변을 훑었지만 의심되는 건 없었다.

- 안 추워?

“별로.”

- 밥은.

“먹었고.”

- 오늘 상담은.

“…….”

- 왜 말이 없어?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런 건 내가 말 안 해도.”

모든 치료 내용이 그에게 닿지는 않아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제가 원하는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 찾는 걸 바라지는 않지만 치료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 것도 그 이유일 터였다. 그로서는 내가 얼마나 기억을 찾았는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어쩌면 지현민과 관련된 것도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이 갑갑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가 닿았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던 지건호가 저 또한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네가 말 안 하면 나는 몰라.

무덤덤한 어조였지만 비꼬는 투는 아니었다. 그러다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온 건지 그는 잠시만,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신지원.

“…….”

-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모른다고.

“거짓말.”

- 억울하네. 거짓말은 네 전공일 텐데.

이건 명백한 비꼼 조였다. 됐으니 그만 끊자고 답하자 지건호가 작게 웃으며 말꼬리를 붙잡았다.

- 오늘 진짜 늦는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전화했어.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열 번은 채우겠어요.”

- 그 열 번 중에 기다리겠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해, 너는.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였나 봐요?”

그는 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공백이 주는 진의를 읽기는 싫어 침묵했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또 누군가가 사무실을 찾은 듯 그가 내게 서둘러 말을 붙였다.

- 끊어. 집에 잘 들어가고.

“네.”

- 들어가면 문자라도 남겨주고.

“…….”

- 왜 또 대답이 없어?

“그냥 어색해서요. 맨날 뭐 하지 말라는 소리만 듣다가 해 달라고 부탁하는 말 듣는 건 처음이라.”

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 그래, 부탁할게. 잊지 말고 연락해. 끊자.

별다른 대답을 하기 전에 전화가 뚝 끊기자 휴대폰은 그의 이름만 띄우고 있었다.

지건호. 액정 속 그 이름을 가만히 쓸어보는 손끝에 찌릿한 통증이 감돌았다.

* * *

문자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집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났을 때였다.

나는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며 시계를 흘깃 쳐다봤다.

한창 바쁠 시간이었다. 지금 와서 문자를 보내자니 늦은 감도 있었다. 어차피 상윤이나 수연을 통해서 내가 집에 도착했다는 건 보고받았을 사람이었고.

그래도 문자 하나 보내는 데에 품이 뭐 얼마나 든다고.

그의 이름을 찾아 문자를 보내려는데 뭔가 잘못 걸린 건지 문자 대신 전화로 연결되었다. 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화면이 바뀌었다.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저기, 잘못 걸었…….”

황급히 수습하며 꺼낸 말은 미처 다 잇지 못했다.

- 조만간 연락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목소리는 내게 닿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들려줄 의도는 아니었을 테니 그 역시 전화를 잘못 받은 모양이었다. 거절 버튼을 잘못 눌렀다거나.

이대로 끊을까 하다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조금 더 듣고 있기로 했다.

- 아뇨.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차피 아직 기억은 못 하는 것 같으니까.

……내 얘긴가. 회사 전화인 듯한데, 그 전화로 사적인 얘기를 나눌 상대가 있나.

- 네. 그래도 희원이는…….

귀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이름에 그만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차희원. 끝까지 들으나 마나 분명히 그 이름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로 차희원을 입에 담고 있을까. 놀란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지만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끊어진 전화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차희원. 분명히 전해 들은 그 이름은 좀처럼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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