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지, 어중간하게 되찾은 기억은 이도 저도 되지 않고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먹지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린 점과 같은 기억들. 그 점을 연결하는 건 내 몫이지만 완성된 그것이 완전한 형태를 갖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방해 요소가 낀다면 더더욱.
게다가 딱히 증명할 수도 없는 기억들은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가령 내가 악기를 전공하고 해외 유학 생활까지 했다는 것. 그리고 지건호와 만나기 전 내게도 가족이 있었고, 그들과 지건호의 부친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것. 나는 이혼을 요구했으며 그는 거절했다는 것.
반면 증거가 확실한 것은 내 옛 휴대폰으로 찍은 뮌헨 사진. 잃어버린 아이. 지건호가 차희원 앞으로 약을 처방받아 내게 먹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차희원을 위한 무언가를 계획 중이라는 것.
그날 밤 사고에 대한 기억은 그럼 어느 쪽일까.
아직까지는 내 망상에 가까운 그날의 사고……. 역시 지현민을 직접 만나보는 게 좋을까.
“사모님.”
노크 소리와 함께 침실 문 밖에서 수연이 날 불렀다. 옷을 매무시하며 들어오라고 답하자 수연이 꽤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내 앞에 섰다.
“무슨 일이에요?”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러나 의외로 답은 쉽게 풀렸다. 작게 열려 있던 문 틈으로 몸을 비죽 내민 사람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나볼까 생각했던 지현민이었으니까.
놀라서 굳어진 내 얼굴을 본 수연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감히 막지 못한 일이라는 거겠지. 나는 차마 괜찮다는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한숨만 작게 내쉬었다.
“들어가도 돼요, 제수씨?”
“이미 들어왔잖아요.”
뒤늦은 인사는 벌써 날 지나치며 침실 깊숙한 곳까지 향해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가 그가 온 걸 알리듯 발을 옮기는 곳마다 흔적을 남겼다.
“전무님.”
곁에 서 있던 수연이 그를 말리려 움직이는 걸 내가 막았다. 지현민 같은 부류는 제 행동을 제약할수록 되레 날뛰는 성격일 테니까.
글렌 체크 패턴의 캐주얼 정장을 입은 그는 수연의 말에 대꾸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침실에 이어 드레스룸까지 훑는 시선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드레스룸에 주르르 걸려 있던 지건호의 셔츠를 툭툭 건드리며 지나던 그는 드레스룸 중간에 놓인 액세서리 진열대의 서랍을 열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시계를 하나씩 들어 보는 얼굴이 꽤 즐거워 보였다.
“지건호랑 같은 방 쓰나 봐요, 제수씨.”
“네. 여기는 무슨 일이죠?”
“이야! 이 새끼 이걸 갖고 있네? 무슨 재주로?”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던 지현민은 다소 억울하다는 투로 시계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가 구하려다 못 구한 모델인 듯싶었다.
나는 그가 제 손목에 차려는 시계를 낚아채듯 빼앗고는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무람없는 손길에 다소 황당하다는 듯 잠깐 굳었던 얼굴이 곧바로 느슨하게 풀렸다.
“하긴. 자기 물건 손대는 걸 죽도록 싫어하지.”
“…….”
“지건호 말이에요.”
아직 그런 것도 기억 못 하냐며 날 비웃던 지현민은 절 보는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새끼가 마치 내가 제 물건에 손대기라도 한 것처럼 개지랄을 떨어대는데, 억울하잖아.”
“…….”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제 시계를 만지기라도 했어, 타이를 훔쳐다 매기라도 했어?”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친다는 듯 지현민이 미간을 구겼다.
“차라리 그 새끼 여자를 건드리기라도 했다면 덜 억울할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지건호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 위로 비열한 웃음이 스쳤다. 날 돌아보며 묻는 그 얼굴에 헛숨을 내뱉었다.
“그 사람한테 따질 게 있으면 직접 가서 따지시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아니, 그렇다고 제수씨 붙들고 하소연하자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단지.”
지현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양손을 모으고 서 있는 수연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을 살피던 지현민이 작게 혀를 차며 속삭였다.
“우리끼리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방해꾼이 있네요.”
수연을 물려 달라는 소리였다. 침실까지 굳이 들어온 이유도 그런 거였던가.
“밖에는 듣는 귀가 꽤 많던데.”
“…….”
“뭐, 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제가 행한 무례에 이유를 갖다 붙인 지현민은 알아서 선택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나와 남몰래 주고받을 말은 내가 도망치던 날, 기억까지 잃게 만든 그 사고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수연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거라고 했던.
방해받지 않고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둘만의 공간을 찾는다면 침실이 제격이겠지. 설마하니 지건호가 이런 곳에까지 녹음기나 도청 장치 따위를 설치해 두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 사람 자기 공간에 다른 사람 들이는 거 싫어해요. 나가서 얘기하죠.”
그러나 지건호에게 괜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발을 옮겨 문밖으로 나섰다. 뒤따르던 수연이 열린 문을 붙잡고 지현민을 기다렸다. 의외라는 듯 혀를 느릿하게 차던 지현민이 건조한 웃음을 내뱉으며 거실로 나왔다.
이번에도 수연이 지현민에게 내온 것은 유리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이었다. 그저 형식적인 접대에도 상관없다는 듯 고맙다는 말을 붙이는 얼굴이 심상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보며 수연에게 스피커 볼륨을 조금 높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동안 지건호가 없는 낮 시간대에 종종 틀어두었던 클래식 연주곡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저 제 말소리를 죽이고자 하는 의도인 줄 알았는지, 한쪽 다리를 꼰 채 박자를 맞추듯 제 허벅지를 두드리던 지현민이 갑자기 뺨을 굳혔다. 그러고는 비뚤게 틀어 올린 입꼬리에 웃음을 매달고는 마주 앉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집에서 음악 소리 나는 거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
“제수씨는 이거, 무슨 곡인지 알아요?”
알고 묻는 건지, 알고 싶어서 묻는 건지 모를 질문이었다.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지현민이 먼저 입을 뗐다.
“난 잘 몰라서요. 클래식 쪽은 영 문외한이라. 이건 지건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 새끼는 시끄러운 건 다 질색하는 놈이거든.”
“…….”
“아,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싫어하던 건 아니었다, 참. 아마 예전에는 좋아했을 거예요.”
나는 테이블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지현민의 입으로 전해 듣는 지건호 이야기가 딱히 듣기 싫지는 않았다.
“한번 다 같이 음악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가 신년회 기념이었던가. 알죠? 정재계에서 한자리씩 하는 인간들 모여서 고상한 척 점잔 떠는.”
“…….”
“아무튼 머리 좀 컸다고 이제 인맥 좀 쌓아줘야겠다 싶으셨나. 우리 회장님도 당신 아들들 데리고 음악회에 갔는데 나는 몇 악장 듣지도 못하고 잠들었거든. 그런데 지건호 그 새끼는…….”
내 반응을 확인하려고 그러는지, 지현민이 일부러 말을 끊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미안해요, 제수씨.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 눈치 없이 길어졌네.”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뭐, 원하신다면. 그런데 나중에 지건호한테 딴말하지는 말고요.”
다른 말 할 게 뭐가 있나. 어서 하던 말이나 계속해 보라고 눈짓하자 그가 입술에 남은 물기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 지건호는 꽤 감명 깊게 본 모양이더라고.”
글쎄. 지건호는 그 자리가 싫어도 싫은 척하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제 친부와 동행한 공식적인 자리.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태산의 스캔들. 아닌 척하며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지건호는 제 자신에게 더 엄격해졌을 것이다.
허리는 더 빳빳하게 세우고, 상대를 살짝 내려다보되 결코 오만하지는 않게. 간혹 제게도 건네오는 손을 익숙한 듯 잡으며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
보지 않아도 꼭 본 것만 같았다. 눈앞에 선연한 그의 모습을 흩뜨리며 지현민의 다음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그 새끼 몇 달 내내 클래식만 들었을 거예요.”
“그때 그 곡을요?”
“그거야 나는 모르지. 말했잖아요. 잤다고. 지금도 그렇지만 난 이런 거 영 내 취향 아니거든. 북을 두드려도 현란하게 두드리는 게 좋고.”
지현민은 지금 들리는 이 곡도 썩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아버지도 참 웃긴 게, 클래식도 그 시대 대중가요 같은 거 아닌가? 내가 팝 듣는 건 저속하다며 딴따라 취급을 하더니 그 새끼가 듣는 클래식은 교양 있다고 칭찬을 해 주더라고요. 참 나, 어이가 없어서.”
“…….”
“아무튼 뭐, 덕분에 나도 맷집 많이 키웠지. 옛날 일이네요, 이것도.”
지현민의 말대로 다 옛날 일이었다. 지건호는 이제 클래식은 물론이고 노래 같은 것도 잘 듣지 않는 눈치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말이에요.”
기억을 더듬는 지현민의 얼굴에 악의 가득한 장난기가 감돌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가만히 쳐다보자 지현민이 제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 빙글거렸다.
“그때 그게 그 새끼 첫사랑인가 싶기도 하고.”
“…….”
“그러지 않고서야 몇 달 내내 꽂혀서 그 지랄을 할 리가 없거든.”
“…….”
“어쩔 때는 샤워할 때도 그 곡을 틀어놓고 했는데……. 그 안에서 샤워만 했을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