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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56)화 (56/60)

| 56화

지건호의 첫사랑이라니. 쉽게 연결 짓기 어려운 두 단어에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첫사랑이 음악이라는 해괴망측한 낭만을 찾는 소리는 아닐 거고.

“첫사랑이라면, 연주자를 말하는 건가요? 오케스트라 단원?”

“글쎄요. 그때 오케스트라가 어디였는지는 잘 몰라서.”

지현민은 생각을 조금만 더 뻗쳐 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먼저 넘겨짚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거실에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에 지휘라도 하듯이 손을 팔랑이는 움직임이 경박스러웠다.

나는 그 정신 사나운 손짓을 시야에서 아주 지울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현민 씨 말대로 다 지난 얘기, 썩 궁금하지는 않네요.”

“에이, 얼굴은 엄청 궁금해 보이는데.”

“굳이 과거 일에 에너지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날 여기 앉힌 이유도 그 과거 때문 아닌가.”

“…….”

“제수씨가 나한테 캐묻고 싶은 거,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는 얄궂게 비틀어 올린 눈썹을 바로 하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제때 내어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 휴대폰 비밀번호는 아직이죠?”

“…….”

“그럴 것 같아서 왔어요. 그것부터 풀어야 뭐 일이 진행되든 할 텐데. 영 감감무소식이라 답답하더라고.”

나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밀번호에 대해 아는 게 있단 말이에요? 그걸 알고 있었으면 진작 가르쳐줬어야죠.”

“어우, 화내지 말고. 나도 이제 와서 생각난 거니까.”

거짓말이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행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속이 투명한 계획은 제가 가진 음침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스피커를 통해 흐르던 음악은 어느새 한 곡이 끝났는지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얼마 뒤 낮은 첼로 소리가 거실을 채우기 시작하자 지현민이 날 보며 눈썹을 세웠다.

“이거, 번안곡이네요. 원래 첼로 연주곡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클래식 문외한이라더니 아주 모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말 돌리지 말라며 입을 떼는 것과 동시에 그가 말했다.

“어쩌면 벌써 제수씨가 답을 찾은 것도 같은데.”

“……답을 찾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억난 거 아닌가? 첼로?”

그 말에 눈 밑이 잘게 경련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됐다는 듯 웃으며 제 허벅지 위로 손깍지를 꼈다. 체격 좋은 건 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듯, 근육으로 두툼한 허벅지는 지건호와도 비슷했다.

나는 넘겨짚는 그 질문을 또 한 번 꼬며 되받아쳤다.

“첼로 이야기라면 사고 전에 레슨 받았다고 얘기 들었어요. 취미로.”

“아, 취미?”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그쪽이 편하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며, 퍽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로 화답했다.

역시. 단순한 취미 생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공을 했다는 말이고, 그걸로 유학까지 했다는 것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 누구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좋게 생각하자면, 지건호를 만나기 전의 과거라 다른 이들은 충분히 몰랐을 법한 이야기일 수도.

만약 그렇다면 지현민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장례식장에서 그의 부친을 본 것과도 관련 있는 걸까.

“근데 취미치고는 실력이 상당했던 것 같은데. 제수씨, 기억 잃었다고 본인 실력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내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럼. 연주회도 갔었잖아요. 아, 물론 제수씨는 기억 못 하겠지만.”

연주회……. 아마추어 연주회를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매체에서 본 것에 의하면 요즘은 취미 동호회에서도 연주회를 한다고들 했으니까.

제 말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게 느껴졌는지 지현민이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제수씨한테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에요. 이왕이면 기억 다 찾는 게 좋잖아. 앞으로 덜 답답하고.”

“내가 기억을 못 찾아 답답한 건 오히려 그쪽 같은데요.”

그에 입을 다문 지현민을 응시하며 소리 죽여 말했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찻잔이 작게 흔들렸다.

“내가 지현민 씨한테 원하는 건 사고 당일의 기억이에요. 물론 다른 것도 찾으면 좋겠지만, 그건 차차 알아봐도 되는 내 몫의 일이고.”

“그때 기억만 되찾는다고 다 해결될 일은 아닐 텐데.”

“그렇겠죠. 그래도 작은 오해 정도는 풀릴 것 같아서.”

부디 지건호를 피해 도망치는 건 아니었으리라는, 내 바람 같은 오해.

“오해?”

눌러 다문 입술에 내 뜻이 읽혔는지 지현민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어차피 주고받는 관계였다. 그가 내게 내놓은 것이 없는 이상, 나도 더 이상 그에게 줄 건 없었다. 기껏 내어줄 수 있는 건 시간과 물 한 잔이 전부였다.

“좋아요. 바라지도 않는 얘기, 뭐, 나라고 하고 싶을까.”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됐네요. 내가 좀 바쁜 사람이라서. 오늘 저녁 모임이 있는 걸 깜빡했네.”

이야기가 더 길어질까 걱정했다며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이만 가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식으로 하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나지 않았어요?”

“글쎄요. 난 오늘 할 말은 다 뱉은 것 같은데.”

“저기요.”

“다음에 내가 또 찾아올게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고요, 제수씨.”

언제라도 제가 내킬 때 집으로 쳐들어오겠다는 선포였다.

“지건호한테도 안부 전해 주세요. 아, 아니다. 내가 전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오늘 모임에서 얼굴 봐야 하니까.”

지건호가 늦는다고 강조하던 그 모임에 그도 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거기서 지건호를 긁으려고 일부러 집에 들렀던 걸까.

내 생각이 읽힌 건지, 빙글거리며 소파 등을 손가락으로 쓸던 그가 놀란 듯한 내 표정을 보고는 침착하라며 여유 있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 제법 수확한 거 많지 않아요?”

“무슨 수확이요?”

“지건호 첫사랑. 그거 나 아니면 아무도 모를걸. 귀한 정보니까 잘 새겨봐요.”

두루뭉술한 그 정보를 가지고 나보고 어떡하라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그의 첫사랑이 무슨 힌트라도 된다는 양 선심 쓰듯 구는 모습에는 일말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왕이면 취미로 했다던 그 첼로, 지건호 앞에서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지현민은 별다른 인사 없이 곧장 집을 빠져나갔다. 저러고서 정말 지건호를 만난다는 건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 * *

“수연 씨는 잠깐 외출한 걸로 해요.”

“네?”

난데없는 말에 수연이 갈피를 못 잡고 눈만 깜박였다. 나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며 설명했다.

“지현민 집에 온 거, 또 관리 못했다고 혼나면 어떡해.”

“아…….”

그때 지현민의 방문으로 수연을 나무랐던 지건호는 급기야 수연을 내게서 멀리 떼놓았다. 겉으로는 일을 핑계 삼은 것이었지만, 그도 수연을 온전히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수연 씨 없을 때 내가 막아볼 틈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고 하면 되니까, 수연 씨는 그때 자리 비운 걸로 해둬요.”

물론 나 역시 김수연을 완전하게 신뢰한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아니에요, 사모님. 제가 책임질 부분이라면 책임지겠습니다.”

“수연 씨, 나는 지금으로선 수연 씨가 그나마 편해요.”

그러니 또 강요에 의해 멀리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덧붙이고는 문자를 전송했다. 지건호에게 보내는 문자였다. 수연에게 말한 것과 동일하게, 지현민의 방문을 미리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수연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어쩌면 날 위한 안전장치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예감으로부터 날 보호하려는.

나는 손에서 진동하기 시작한 휴대폰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지건호. 어떠한 꾸밈도 없는 그의 이름 세 글자가 화면을 밝히고 있었다.

“네.”

- 설명해.

“무슨 설명을 더 해.”

- 그럼 해석이라도 해.

“말 그대로예요. 수연 씨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지현민이 집에 왔어요. 당신한테 화난 게 있는 모양이던데.”

원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을 테지만. 슬그머니 그의 탓으로 돌리자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그도 지현민을 상대로 꾸민 짓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그래서 나도 없는 그 집에서 날 보고 갔을 리는 없고.

“물 한 잔 마시고 갔어요.”

- 물만 마셨을 리도 없을 테고.

“뭐, 음악도 한 곡 듣고.”

대충 둘러댄 말에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 호텔에 제 전용 방까지 얻어놓는 새끼가 왜 남의 집에서 행패야.

“어쨌거나 당신 그 모임, 지현민 씨도 참석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괜히 시비 거는 거 받아주지 말라고.”

- 그래서, 같잖은 교양 떨면서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나. 저를 생각해서 한 말에도 고맙다는 한 마디 없이 그 대화 내용부터 말하라는 고압적인 태도에 썩 여유는 없어 보였다.

“당신 첫사랑 얘기 하던데.”

- 뭐?

“신년 음악회라고 했던가. 그때 누구 만났나 보죠?”

별것도 아닌 헛소리라 치부할 줄 알았더니 건너오는 답이 없었다. 진짜였나 보다.

“낭만적이네요. 같잖은 교양 떨면서 만난 당신 첫사랑.”

비꼬는 어조임을 충분히 알았을 텐데도 그는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빠르게 말을 돌렸다.

- 그건 그렇고. 아까 전화한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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