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그제야 나는 지현민의 방문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지건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차희원을 말하던 그 단단한 음성.
“연락하라면서요.”
조금은 날이 서서 나간 대답에 지건호가 되레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 집에 도착한 게 언젠데 그때 전화해.
“이것 봐. 전화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었잖아.”
- 잊었어? 네가 말 안 하면 나는 몰라. 너한테 제대로 듣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 내 입으로도 직접 보고를 하라는 말이다. 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 낭비를 하려고 할까 싶다.
이러다가 먹은 것까지 하나하나, 밥알 개수까지 보고하라는 거 아닌지. 나는 생각이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질까 지레 겁을 먹고 말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잊었냐고 묻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 …….
“내가 또 다 잊기를 바라나 보죠?”
- 미안. 실수했어.
막상 바로 사과를 하니 정작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손톱을 매만지며 마른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대답했다.
“끊어요, 그럼.”
- 그래.
오늘 늦는다는 말을 또 할 줄 알았더니 이젠 그도 지쳤나 보다. 내가 먼저 끊기를 기다리는 듯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대로 휴대폰을 내리다가 이내 다시 끌어올렸다.
“……저기.”
- 응?
되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번졌다. 뒷말을 기다리는 정적이 한없이 늘어질 때쯤, 그가 입술을 떼는 소리에 서둘러 물었다.
“혹시 기다린다고 하면 일찍 와요?”
- 뭐라고?
잠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했는지 그는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며 말끝을 잡아채는 질문에 아니라고 헛웃음을 날렸다.
“아니에요. 너무 늦지는 말라고. 부스럭거려서 중간에 깨는 거 싫으니까.”
핑계를 대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괜한 말을 꺼냈을까. 얼굴에 열이 번졌다. 달아오른 목을 감싸며 고개를 돌리는데 뺨에 닿는 수연의 시선이 수상했다. 옆에 있던 차은주도 웃음을 숨기는 눈치였다.
“왜…… 다들 그렇게 봐요.”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싶어 눈을 키우자 수연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 예전 모습 보는 것 같아서요.”
“……좋다는 뜻이죠?”
“그럼요. 보기 좋아요. 기억은 다 못 찾으셨어도 머리보다 마음이 기억하는 게 있나 봐요. 그렇죠, 은주 씨?”
차은주가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보다도 상기된 얼굴은 무엇까지 바라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건호와의 불행을 기대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차은주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그들처럼 멋쩍게 웃어 보였다.
* * *
그동안 지현민과의 직접적인 통화를 피한 이유는 그 비밀번호를 여태 풀지 못한 탓도 있지만, 새 휴대폰으로도 연락하지 않았던 건 지건호에게 들킬 위험을 차단하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는 지현민의 번호를 아직까지 모른다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불쑥불쑥 충동이 치미는 건 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수연에게 번호를 물어볼까. 수연이 아니라면 그때 백화점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금은 연락하기엔…….
“너무 늦었지.”
휴대폰 액정 상단의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지현민과 연락하고 싶은 이유가 고작해야 이런 것이었다니.
지건호의 첫사랑.
못해도 15년, 20년 가까이는 되었을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뒤늦게 밀려든 민망함 때문인지 내뱉는 한숨에도 열이 몰렸다. 생각을 비우고자 까맣게 꺼진 액정을 두드렸으나 그곳에도 역시 지건호의 흔적이 가득했다.
나는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나열된 검색 기록을 바라보다 삭제 버튼을 눌렀다. 태산 신년 음악회, 태산 지용현 음악회, 태산건설 신년, 지용현 음악회 등등의 글자가 한 줄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갖고 있는 기억도 아니었으니 이런 식으로 찾을 수밖에.
변명에 가까운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검색한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내가 원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을 줄 알았더니 키워드의 문제인 건지. 어차피 오래된 기사라 포털에서 찾기 힘들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찾는 건 영 부질없다 싶어 다른 검색 기록들까지 일괄 삭제하려다 ‘태산 지건호’에 눈이 멈췄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터치하자 그와 연관된 기사가 주르륵 쏟아졌다.
대체로 태산건설에서 제공하는 보도 자료에는 그의 사진이 실리지 않았으나 그 이외의 것들에는 그의 사진이 종류별로 나와 있었다. 눌러보는 사진마다 표정을 지우고 있는 그 얼굴은 실물만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좀 잘 나왔네.”
……비록 검찰에 출석했을 때 찍힌 사진이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검찰이나 법원에 출두하는 사진은 손쓸 수 없는 영역인가 보다 생각하며 검색어를 수정했다.
지건호 검찰 출석.
몇 번 되지도 않은 일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슈가 되는 사건이었는지 이전보다 더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나는 여태 보지 못한 사진을 저장하며 기사를 한 번 쓱 훑었다.
보도 날짜를 보니 아마도 결혼 전 일인 것 같았다. 내용은 국토교통부 장관과의 뇌물 수수 혐의였는데, 재개발을 비롯한 고속도로 민자 사업 수주를 위해 국교부 장관에게 돈을 찔러넣었다는 게 주된 골자였다.
당시 국교부 장관은 차덕룡. 이름 앞에 붙는 한자를 보니 고인인 모양이었다. 설마 이 사건 때문은 아니겠지 싶어 연관 기사를 눌러보았다.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정하며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닐 텐데.
죄스러운 호기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검색어를 바꾸어 차덕룡의 사망 기사를 더 찾았다. 뇌물 수수 기사와 연관되어 나온 부고 소식에는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나오지 않았다. 빈소를 어디에 차렸는지만 알려주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포털 창을 빠져나왔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왜 하필 이 순간에 그 기억, 지용현이 조문 왔던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단순히 장례식을 연상해서 그렇다기엔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호흡했다. 오늘 낮, 최면 치료 중 가족사진을 떠올리며 공황 증상이 왔을 때 의사가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기억이 날 거면 아주 나든가…….”
기우지도 못하게 조각난 기억은 의심만 더 키우고 만다. 차라리 그냥 지건호의 말대로 다 덮어버릴걸. 그러나 그러기엔 조금 멀리 온 것 같다.
이미 나는 그와의 결말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가.
깨진 조각을 아무리 이어붙여 봤자 틈까지 완벽히 메우기는 힘들 것이었다. 완전함을 기대하기엔 나부터가 불완전한 사람이었고.
그러니 몇 가지 기억만 더 되찾는다면 그때는 이렇게 맥없이 기다리는 일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여전히 닫힌 침실 문을 흘깃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어둠을 비집은 첼로 소리가 어지러이 흩어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아니, 연주한 적이 있는 곡인 듯했다.
* * *
“……누구, 은주 씨?”
평소와 다른 복장을 입은 차은주가 내 손을 잡아 나를 일으켰다.
침실이 원래 이 정도로 밝진 않았는데, 커튼을 활짝 열어놓은 탓에 하얀 시트 위로 떨어지는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며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은주는 친분을 과시하듯 내게 팔짱을 끼며 어딘가로 가자고 재촉할 뿐이었다.
얼떨결에 발을 내딛자마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침실이었는데 갑자기 피아노가 등장하더니 그 위로 액자가 진열되었다. 최면 치료 때 봤던 것들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럴수록 피아노가 멀어졌다. 뭐라도 낚아챌 듯 팔을 뻗어 휘젓자 이번엔 피아노가 무너져 내렸다. 놀라 은주를 찾았지만 이젠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꿈이었다. 모든 건 내가 만들어낸 허상. 무의식의 발현.
“신지원 씨. 나이는 대충 서른?”
불현듯 잊고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느새 컴컴해진 시야 속에서 빛을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꿈에서 깨고 싶어 도와 달라고 발버둥 치자 딛고 있던 땅이 조금씩 아래로 꺼졌다. 이대로 추락하는 건가 싶어 망연자실하던 순간, 위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고민할 틈도 없이 붙잡았다. 그러나 나는 손만 겨우 잡혔을 뿐, 여전히 낭떠러지에 매달린 상태였다.
“어때요. 이만하면 내 제안 받아들일 만하지 않나?”
익숙한 목소리. 지건호와 닮은 듯 다른 이목구비.
지건호가 맞을까. 눈을 좁히며 확인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 움직임 탓인지 겨우 딛고 선 바닥은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헐거워진 손을 절박하게 붙들자 그가 웃었다. 내게 뭐라고 하는 듯했지만 좀처럼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아, 안 들려. 그렇게 웃지만 말고 날 좀, 제발. 제발…….
“……원아. 신지원!”
시야가 다시 환해졌다. 나는 경기하듯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음을 자각하자 그제야 눈앞이 선명해지더니 긴장이 풀린 몸이 이내 지건호의 품으로 쓰러졌다.
“……왔네요.”
뒤늦은 인사에 섞인 반가움은 덕분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