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58)화 (58/60)

| 58화

“안 벌려?”

지건호는 다소 짜증이 밴 목소리로 재촉했다. 짐짓 화가 난 듯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벌려줘?”

금방이라도 제 손을 쓸 기세에 나는 그가 손에 든 걸 빼앗았다. 쏘아보는 눈에도 위축되지 않는 걸 보니 그는 제 행동에 그다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환자 취급 그만해요.”

“네 꼴이나 좀 보고 말해.”

“내가 어디가 어때서.”

“몰라 물어?”

정말이지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 악몽 한 번 꿨다고 사람을 반송장 취급 하는 게 대체 어디 있나. 누가 봐도 지금 멀쩡한 건 나지, 지건호는 아니었다.

정작 꼴이라고 할 만한 건 본인 모습인 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내게 닿는 시선 곳곳에서 술기운이 묻어나는 그를 밀어냈다.

“술 냄새 나니까 좀 떨어져요.”

코를 찡그리며 타박하는 말에 그제야 지건호가 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옷도 아직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로 내게 죽부터 먹이려던 그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많이 안 마셨어.”

“누구 기준으로 많이 안 마신 건데.”

“있어, 정신 나간 노친네.”

제 말이 퍽 재밌었는지 그는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을 턱을 괴고 있던 손바닥에 숨겼다. 그러고는 어서 한술 뜨라며 내게 턱짓했다. 핏발이 선 눈은 취기에 나른하게 풀려서는 머리만 붙이면 곧장 잠들 것만 같았다. 여간 많이 마신 게 아닌 모양이었다.

술 취한 사람 상대해서 뭐 하나. 고개를 저으며 조금 전 지건호에게서 빼앗은 숟가락을 바로 쥐었다. 그의 말마따나 강제로 입을 벌려 쏟아붓는 것보다 내가 자진해서 먹는 게 이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래도 그렇지. 악몽 한 번 꿨다고 팥죽이라니.

귀신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미신인가 싶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쯤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던 그가 눈썹을 비틀었다. 어서 먹지 않고 뭐 하냐는 뜻이다.

“내일 먹을게요. 늦었어. 밤이잖아.”

사용인들은 모두 제 숙소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김수연 역시 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퇴근했을 시간.

그나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선 떨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세 입만 먹어, 그럼.”

“……하.”

“먹여 줘?”

“됐어요.”

숟가락으로 팥죽 표면만 긁어내듯 퍼서 입에 넣었다. 급하게 해동한 죽이었지만 냉동실에 있었던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지 갓 만든 죽과 비슷한 맛이었다.

그래도 아닌 밤중에 팥죽이라니.

한숨과 함께 꾸역꾸역 삼키자 그가 잘했다는 듯 내 등을 쓰다듬고선 내 식탁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쳐 놓았다.

“잠은 그래도 깊게 자는 것 같더니.”

“…….”

“나 없을 때도 그랬어?”

나는 그가 약속한 세 번을 끝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잘 잤어요. 오늘이 이상했던 거지. 그리고 살면서 악몽 한 번 안 꿔본 사람이 어디 있어.”

“…….”

“이럴 일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다른 사람들 있었어 봐.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유난 떤다고 생각하겠지.”

알긴 아네. 흘겨보는 눈에 그가 내게 물을 내밀었다.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테고.”

“…….”

“보기 좋다고 여기면서.”

수연이 했던 말, 예전 모습 같아 좋다던 그 말과도 비슷했다.

대체 그 예전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입가심하듯 물을 삼키고는 그만 일어나자며 의자를 뒤로 뺐다. 그러자 그가 내 등 뒤에 걸쳐두었던 팔로 내 허리를 감으며 날 붙들었다. 잊고 있던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앉은 상태 그대로 일어선 나를 껴안은 그는 내 가슴 아래에 이마를 묻으며 작게 호흡했다. 명치 부근에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모였다가 날 가두고 있는 그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나는 조금 굳어버린 채로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그러고는 그가 내게 했듯 웅크린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쓸자 옅은 웃음소리가 희게 번졌다. 아랫배에 작은 진동이 울렸다. 곱아든 발가락에 힘이 실렸다.

“들어가서 자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래.”

대답은 곧잘 하면서도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쩌면 술기운을 빌려 그때처럼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도.

“지원아.”

찰나 안도감이 들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그가 내 심장까지 움키며 바닥을 향해 떨어뜨린 내 이름.

꿈에서처럼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에 현기증을 느끼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꽉 붙든 손 아래 구겨진 셔츠가 그나마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리는 듯했다.

“힘들어?”

절박한 내 손길에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정작 내가 되돌려줘야 할 것 같은 질문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가.”

“이러고 있는 거 힘드냐고.”

새삼 뭘 물어보나 싶다. 제 몸을 받아주는 게 하루 이틀 일이던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빠져나가려던 순간 그가 내 허리를 더 단단히 감아 왔다. 되레 몸이 더 맞붙는 바람에 이도 저도 못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들어가요.”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너.”

“무슨 대답을 해.”

미간을 좁히며 묻는 눈에 나도 얼굴을 굳혔다. 그가 더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이렇게 사는 거 힘드냐고.”

“…….”

“이런 식으로, 내 옆에 있는 거 말이야.”

적어도 내 안위를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확인을 구하는 질문이었지.

그가 만든 어색한 정적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니,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람에 간간이 흔들리는 나무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요.”

“……글쎄.”

언제나 제가 듣고 싶은 말을 정해두고 질문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힘들지 않다는 말을 바라는 걸까. 아니면 힘들다는 말을 기다리는 걸까. 만약 후자라면 제 곁에 있는 내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퇴원시켜 데려올 때는 그저 제 장난감처럼 쉽게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제 마음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으니까.

지난 과거는 차라리 다 덮어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 건 지건호였지만,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지켜왔던 우리의 좋았던 과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없진 않았겠지.

그러니 궁색한 핑계에도 모르는 척 입을 맞추고 배를 맞대며 나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저를 묻으며 사정 아닌 사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밤마다 나를 탐하던 그의 손길이 지금의 신지원을 향한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그 과거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데.

어쩌면 지건호가 원하는 대로 꾸며낸 신지원에 대한 기대감이 깨진 건 아닐까.

“그걸 알았다면 나도 이러고 있지 않겠지.”

지건호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이 자조했다. 맥이 풀린 목소리에 섞인 웃음은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버석한 입술에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취기를 빌린 그의 진심은 그때도 지금도 이런 식으로 날 할퀼 뿐이다. 그는 날을 세운 제 마음을 호도하듯 눈을 감은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싶을 때 고요한 어둠에 잠긴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하루는 나보다 네가 더 힘들었으면 좋겠다가도.”

“…….”

“또 다음 날은 그것보다는 덜 힘들었으면 싶고.”

“…….”

“그다음 날은 그냥.”

지건호는 가쁜 숨을 고르듯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 큰 몸을 잔뜩 웅크려 기대어서는 크게 오르내리는 그의 등은 마치 숨을 죽이고 우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냥 네가 힘들든 안 힘들든.”

“…….”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져.”

위선이자 위악인 그 말은 어떻게든, 어떤 모습으로든 날 제 곁에 묶어 놓겠다는 다짐이었다.

“난 네가 힘들더라도 내 옆에서 힘들어했으면 좋겠어.”

“…….”

“죽을 만큼 괴롭더라도 내 앞에서 괴로워해.”

저주와도 같은 그 말은 협박처럼 뿌리를 내렸다. 허리 뒤로 단단히 얽힌 그의 손가락은 이미 날 옥죄고 있는 족쇄와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역시나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나 또한 그의 취기를 빌려 한 말에 지건호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정제되지 않은 그의 애정이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이 틀렸어.”

나는 그 오만한 눈을 내려다보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힘들어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을 거니까.”

“…….”

“한다고 해도 그건 내 몫이지.”

“…….”

“그러니까 당신은 신경 쓸 거 없어요.”

내 말을 천천히 되새기는 듯하던 그는 한참 뒤에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긍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허공에 흩어진 그 목소리를 긁어모으듯 몸을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취기 어린 더운 숨이 가만히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붉게 번졌다. 내가 되찾은 기억들을 모두 태워버릴 듯, 그의 숨이 닿는 곳곳에 열꽃이 피었다.

혼몽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그의 위로 허리를 내렸다. 여태 틀어두었던 첼로 소리를 흉내 내듯이 활 대신 손가락 끝으로 그의 등을 켜면서.

꿈이었냐고 묻는다면 꿈이었노라 대답할 수 있는 시간 동안 또 한 번의 긴 연주가 반복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