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연락이 왔다고요?”
수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편한 시간을 먼저 알려주시면 그쪽에서 전화를 드리겠답니다. 메신저나 문자, 메일을 통하셔도 괜찮다고 전했고요.”
현재 독일에 있다던 첼리스트로부터 닿은 연락이었다. 그동안 회신이 없길래 아주 연락을 끊은 줄 알았더니 오해였나 보다.
“음, 아무래도 전화가 낫겠죠? 문자나 메일 보내놓고 마냥 기다리느니.”
“사모님 편하실 대로요.”
“좋아요. 그럼 전화 부탁한다고 전해 줘요.”
“네. 시간은 언제가 나을까요?”
“이왕이면 그 사람 없는 시간으로, 아, 그때 거기는 새벽인가?”
시차가 꽤 나니 지건호가 없는 낮 시간을 바라기엔 다소 염치없는 부탁일 듯했다. 게다가 첼리스트로 일하는 사람이니 업무 시간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메일이 나으려나?”
고민하는 말에 수연이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듯 여유 있는 미소를 건넸다.
“메일로 할게요.”
“네. 그럼 제가 휴대폰으로 메일 주소 전달해 두겠습니다. 바로 메일 작성하셔서 보내시면 될 거예요.”
“아니, 잠시만요. 내 휴대폰은 좀 그렇고.”
언제라도 지건호가 확인할 수 있는 휴대폰은 위험했다. 들킨다고 신변에 문제가 되는 내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을 위해 최대한 몸을 사리는 노력 정도는 필요했다.
“수연 씨가 보내줘요. 메일.”
“제가요?”
“응. 어차피 별 내용도 아니니까…….”
말하면서 모순을 깨달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라면 지건호에게 숨길 이유도 없지 않을까. 제가 내용을 알아도 괜찮냐고 묻는 수연에게는 상관없다는 듯이 굴면서.
돌이켜 보니 그 첼리스트에게 묻고 싶은 건 과연 무엇이었나 싶다.
“이상하죠?”
동조를 구하는 질문에 수연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 무감한 시선이 조금 민망해져 손가락 끝을 다른 손톱으로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한테는 계속 감추고 싶은 게 생기네요.”
“…….”
“별거 아닌 것도 괜히 숨기고 싶고.”
“그만큼 드러내 보일 게 많다는 말 아닐까요.”
“…….”
“사모님께서 갖고 계신 게 하나씩 늘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이해가 될 듯 말 듯, 역설적인 말이었다.
기억을 말하는 것이라면 일부 동의하는 바였다. 하나씩 되찾은 사소하기 그지없던 지난 기억도 지건호는 환영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몰래 숨겨두고만 있었으니까. 언제까지 감추고만 있을 수도 없을 거면서.
“약점이라 그런 건가 봐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수연을 보며 한탄과도 같은 말을 더했다.
“내 지난 기억 말이에요.”
“…….”
“나한테는 약점, 명치 같은 거라서 자꾸 숨기게 되나 봐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자꾸 들추어내 봤자 내게는 하등 도움될 것도 없기에, 되레 그의 눈에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지난 과거.
“그 명치를 공격당할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공격.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지. 언제든 지건호는 내 약점 같은 과거를 틀어쥐고 치명상까지 남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제 곁에서 괴롭고 힘들기를 바라는 사람. 그 말인즉슨 내게 있을 불행까지도 제 손으로 쥐고 흔들겠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내 표정이 답이 되었는지, 수연은 옅은 진줏빛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걱정 말라는 어조였다.
“본부장님께서는 먼저 공격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업무적으로도 상대가 먼저 날을 세울 때까지 기다린 뒤에 움직이는 편이시죠.”
“…….”
“보통은 가진 것 없이 지킬 것만 많은 자가 사납기 마련이니까요. 사납다고 해서 다 강한 것도 아니고요.”
가진 것 없이 지킬 것만 많은 자. 적어도 지건호를 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제 힘을 들이기보다는 상대의 사나움을 유발하여 그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사람일 테지.
안 봐도 뻔했다. 상대의 교만을 이용하여 자가당착에 밀어 넣을 사람.
“썩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닌 것 같네요.”
비꼬는 목소리에 수연이 가볍게 웃었다.
“사모님 약점을 아신다면 그걸 제일 먼저 보호할 분이에요. 그 보호하는 방법이 때로는 다소 격할지도 모르겠지만.”
“…….”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공격을 하신다고 해도 명치만은 피해 가실 거고요. 그게 공정하다고 믿는 분이니까.”
수연의 단호한 말에는 헛된 가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이 비약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나도 문제다 싶었다.
“수연 씨는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비호하는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본부장님 좋은 분이시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 대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말이에요. 그 사람이 수연 씨 같은 사람들 다 모아두고 집단 세뇌를 시킨 건 아니죠?”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수연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세뇌한다고 해서 그대로 세뇌당할 사람은 아닙니다.”
어째 그 말이 더 수상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메일 보낼 내용은 내가 따로 정리해서 수연 씨한테 줄게요.”
“네, 사모님.”
“아, 그리고 어제 말이에요.”
소파에서 일어난 수연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지건호 씨가 무슨 모임에 참석했는지 혹시 내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왜 여쭤보시는지…….”
“그냥 궁금해서.”
의아하다는 얼굴을 향해 나는 여상한 말투로 대꾸했다.
“다음부터는 그 모임 간다고 하면 각오 좀 하고 있으려고요.”
그게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을까. 수연이 알겠다는 말과 함께 뜻 모를 웃음을 삼켰다.
* * *
“왔어요?”
나는 입에 머금고 있던 약을 삼킨 뒤 그를 보며 인사했다.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세운 지건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에 든 걸 턱짓했다.
“뭐야, 그건.”
“약.”
간단히 답하며 화장대 서랍 안에 남은 약을 넣었다. 피임약이었다. 그가 제 셔츠 목 단추를 풀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약인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차희원 이름으로 받아 먹던 약이 아니라서 그런가. 조금은 화가 난 듯 그의 뺨이 굳었다. 따져 묻는 눈이 노골적이었다. 나는 무심히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피임약.”
“피임약?”
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먹느냐는 표정에 되레 황당한 건 나였다. 나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며 친히 설명을 붙였다.
“당신이 콘돔을 안 쓰니까.”
“…….”
“피임은 해야 되잖아요, 우리.”
뭐 틀린 거 있냐며 대꾸했지만 그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인 모양이었다. 잠시간 나를 쳐다보던 그는 단추를 마저 풀고는 셔츠를 벗어던졌다. 이어 욕실 문이 요란히 닫혔다. 씻기 시작했는지 샤워기 소리가 크게 이어졌다.
“왜 저래.”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고는 침대 매트리스 아래 숨겨두었던 옛 휴대폰을 꺼냈다.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생각나는 대로 비밀번호를 맞춰 보는 중이었다.
보통 비밀번호는 어떻게 설정하느냐고 주위에 물어보자 공통적으로 답하길, 기억할 만한 혹은 기념할 만한 날짜를 주로 잡는다고 했다. 수연은 제가 한국에 들어온 날을, 창원댁은 딸의 생일을, 차은주는 제 언니 생일을 예로 들었다.
나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이지 싶어 특정 날짜를 넣어 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기념할 만한 것도 없었고 내 생일, 지건호의 생일, 결혼기념일, 한 손에 다 꼽을 만한 겨우 몇 개로 끝나는 정보였으니까. 그것마저도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이었고.
게다가 지건호를 만나기 전에 썼던 휴대폰이라면 그와 관련된 건 배제하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에 대한 기억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면 수연처럼 한국에 다시 들어왔던 기억이라거나…….
그러고 보니 귀국은 어떤 연유로 했는지 아직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얼기설기 엮은 단편적인 기억으로 유추했을 때 첼로 유학이 맞다면,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 나가는 형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그리고 내게 책임질 형제라도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유학이 무슨 대수랴. 귀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에서의 그 기억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첼리스트에게, 레슨 중 내가 독일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메일 내용을 되새기는데 불현듯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베개 밑으로 감추었다.
“왜 그렇게 놀라. 뭐 몰래 훔쳐 먹었어?”
지건호는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며 배스 가운을 매듭지었다.
“내가 몰래 훔쳐 먹을 거나 있나요, 이 집에서.”
전부 다 본인 귀로 들어가거늘. 불퉁하게 내민 대답에 그가 제 손가락으로 이건 뭐냐는 듯이 화장대 서랍을 툭툭 쳤다. 내가 조금 전 피임약을 넣어둔 서랍이었다.
그가 서랍을 열어 피임약을 꺼내어 들었다.
“나 몰래 벌써 꽤 먹었나 본데. 꼬박꼬박.”
“……꼬박꼬박 제때 시간 맞춰 챙겨 먹어야 하는 게 바로 그 약인데.”
그게 얼마나 번거로운 줄 아냐며 치뜬 눈에 그가 피식 웃고는 매트리스 위로 한쪽 무릎을 내렸다. 날 가두듯이 올라탄 그가 습관적으로 입술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러게 번거로운 짓을 왜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