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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60)화 (60/60)

| 60화

이마에 짧게 내려앉았던 지건호의 입술은 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뺨 아래로 두서없이 떨어졌다. 샤워 후 남은 물기를 채 닦을 생각도 없는 그를 밀어내며 고개를 틀자 턱 끝에 붙어 있던 그의 입술이 귀 아래로 향했다. 건조하게 내쉰 숨이 귓가에 흩어졌다.

“왜 그래.”

그는 왜 저를 피하냐는 듯한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나는 머리맡에 숨겨둔 휴대폰을 의식하며 답했다.

“오늘은, 그냥 자요.”

“왜.”

“……매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기억 찾겠다던 의지가 갑자기 사라졌어?”

“지금 비꼬는 거예요?”

“설마. 번거롭게 약까지 챙겨 먹는 사람도 있는데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말이지.”

“당신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부정하지 않는 그 얼굴에 미간을 좁히자 저 또한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은 그가 나지막이 명령하듯 말했다.

“앞으로 피임약 같은 거 먹지 마.”

다감한 목소리만 들었다면 부탁이라고 착각할 법도 했다.

수연이 말했던 지건호의 방식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일부러 나를 도발한 것이라면 성공했다.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병원 가서 시술받아야겠네요.”

“무슨 시술.”

“피임 시술. 당신은 피임할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내가 섹스를 거절할 명분도 없는데. 약도 못 먹게 하면 그거라도 받아야지.”

“네 몸이 그 정도까지 완벽하게 정상인 건 아닐 텐데. 그런 걸 견딜 정도로.”

사고 후 내가 받았던 수술에 비해서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시술이었다. 그런데 겨우 이런 걸 두고 내 몸을 걱정하는 척이라니.

기가 차 저절로 터진 헛웃음이 그의 가슴팍 사이로 흩어졌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요.”

“내가 왜 널 신경 안 써.”

“나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방관한 건 당신 아니에요? 이제 와서 헷갈리게 왜 그래요.”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뿐이야.”

사정. 나는 그 비참한 시간을 한 단어로 일축하는 편리함에 씁쓸하게 조소했다.

“차라리 나 퇴원시키지 말지 그랬어요. 아니, 사고 났을 때 그냥 그 안에서 죽든 살든 내버려 두지 그랬어?”

“…….”

“아아, 죽은 사람보다는 죽지 못해 살더라도 어떻게든 살아 있는 사람 껴안고 있는 게 좋으니까?”

뒤끝을 한도 없이 늘이며 조롱하는 태도에 지건호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퍽 당당한 얼굴이었지만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은 여유가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적당히 해. 그딴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하기 싫다는 거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그가 내 위로 겹쳤던 몸을 침대 아래로 내렸다.

“설마 아이를 다시 원하는 건 아닐 거잖아요.”

그 말을 던진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파자마를 찾으러 발을 옮기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빛을 등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에 깔린 어둠을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아이?”

“……그래요. 당신, 내 아이 같은 거 바라지도 않을 거잖아. 원하지도 않는 아이 갖느니 서로 조심하자는 거지.”

“…….”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난 기억 속에 흘려보낸 아이를 떠올리며 꺼낸 말에 그가 얼굴을 굳혔다.

“꼭 나한테 결정권이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네.”

“…….”

“다시, 라고 할 만큼?”

살얼음이 낀 것만 같은 선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목구멍을 비집고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말을 혀끝으로 겨우 막았다.

결정권. 생각해 보면 우리를 떠났던 그 아이도 내가 고집을 부려 선택한 것이지, 애초에 지건호는 내 건강을 이유로 원하지 않았었다. 유산을 기점으로 우리 관계가 달라졌던 거라면 바로 그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

전복된 관계에서 지금 지건호가 바라는 건 무엇일까. 제 뜻대로 맞춰줄 신지원에게 다른 선택지를 모두 제한 채 내민 것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정리되지 않은 말이 새어 나온 건 생각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당신은 내가 임신을 바란다고 말하길 기다렸나 보네요.”

지건호는 내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길 바라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내 약점이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만든 절망의 굴레 속에서 계속 제자리걸음 하도록 덫을 놓으면서. 내가 그를 향해 발악하기만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아, 어쩌면 그 지난한 재활 치료도 날 위한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해요, 그럼.”

나는 무릎을 고쳐 세우며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베개 밑에 숨긴 휴대폰이 들킬까 염려되긴 했으나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억을 볼모로 잡았던 섹스. 그러나 어차피 기억 같은 건 내 머릿속에서 만든 허상에 불과했다. 섹스를 통한 기억이 뭐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질까. 그의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결국 신지원이라는 이름의 나였던 것을.

그가 그 신지원에게 기대하는 것은 지난 과거를 묻되, 그로 인한 현재를 캐묻지도 않는 것일 터였다.

* * *

아래가 뻐근했다. 둔통에 얼굴을 찌푸린 채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불행히도 아직 아침은 오지 않은 모양인지 스탠드 불빛만 어둠 속에서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내게 끼워넣은 그의 성기는 자는 동안 크기를 더 불리기라도 한 듯했다.

대체 이러고 자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빠져나가면 그에게 맞추어진 구멍이 한동안 쉽게 다물리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읏.”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가 베개 위에 파묻혔다. 내가 깬 걸 알았는지 뒤에서 내 한쪽 어깨를 틀어쥐어 고정한 그가 허리를 또 한 번 거세게 튕겼다. 아래가 움찔거리며 수축했다.

살덩이를 한껏 쥐어짜는 감각에 점성 있는 액체가 찔걱이며 결합부를 간신히 비집고 나오려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확인하듯 손을 내려 질구 근처를 더듬던 그가 도톰하게 부푼 붉은 살을 손가락으로 둥글렸다. 자는 내내 마를 새가 없었던 곳이 반사적으로 또 한 번 젖어들었다.

그는 왈칵 쏟아진 것을 다시 밀어 넣기라도 하려는 듯 허리짓을 이어나갔다.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던 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힘없이 흔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밤중에 그와 나눈 대화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달뜬 교성뿐이었고, 그는 그런 내 입술을 삼키며 낮게 신음한 게 전부였다. 그 거친 탁성 끝에 짓씹은 욕설도 사실은 정확하게 알아듣기는 힘든 소리였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행위였냐고 묻는다면, 글쎄.

쾌락에 잠겨 있던 이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베개에 묻고 있던 얼굴을 같이 들어 올렸다. 거의 엎드린 상태로 그를 받아내고 있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는 체액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내 가슴을 감싸며 제게 더 가까이 붙였다. 앓는 소리와 동시에 등 뒤로 맞붙은 그의 가슴팍이 크게 호흡했다. 진득한 체액이 곳곳에 남아 있는 듯 그와 닿은 모든 부위가 끈적거렸다.

머릿속까지 헤집을 듯 날 꿰뚫은 그는 제가 꽂아넣은 것을 천천히 빼내었다가 더 깊게 찔러넣기를 반복했다. 흉기와도 다름없는 그것에 나는 매번 전율하며 흐느꼈지만 그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성싶었다.

어쩌면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 흐, 으. 제발…….”

절박하게 내민 손은 다시 그에게 붙잡혔다. 내 손등 위로 제 손바닥을 겹친 그는 제 몸도 그대로 날 깔아뭉갤 듯 겹치고는 내 애원이 기껍다는 듯 옅게 웃었다.

제 무게로 날 짓누르며 같이 엎드린 채로 그는 상체만 살짝 들어 허리를 가볍게 움직였다. 각도를 달리한 삽입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정이 밀려나왔다. 헉, 하고 멈춘 숨에 내 아랫배를 받쳐 든 그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힘들어?”

어젯밤 내게 묻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어조였다. 대답 대신 제게 닿는 날 선 시선에 피식 웃은 그가 제 것을 다시 밀어 넣었다.

“견뎌 봐.”

그 말끝에 섞인 웃음소리는 결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저를 향한 내 얼굴을 바로 돌려놓으며 허리를 다시 치받아 올렸다. 나는 베개 위로 쓰러진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매트리스를 짚은 그의 손을 외면했다. 그 큰 손 아래 깔린, 지금 내 신세와 다를 것 없는 내 손까지도.

문득 진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그가 만든 것도, 그 밑에 깔린 내가 만든 것도 아닌 인위적인 울림.

정황상 베개 밑에 숨기고 있던 휴대폰 알림인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전화는 아닌 듯, 한 번에 그친 그 진동을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찰나의 소음에 긴장한 나머지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하아, 하고 머리 위로 내려앉는 더운 숨에 알아듣기 힘든 욕이 실렸다. 매트리스를 짚고 있던 그의 팔에 퍼런 핏줄이 튀어나올 듯 두드러졌다.

그는 곧바로 날 돌려 눕혔다. 엎드린 채 그를 받아내고 있던 몸이 순식간에 그와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자세를 바꾸는 동안에도 빠지지 않았던 그의 성기는 잠깐의 여유를 부릴 새도 없이 또 한 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견디라는 말이 그냥 던진 위로는 아니었는지, 지건호는 제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겨우 참고 있던 목소리까지 모조리 흘려보낼 것 같던 그 움직임 속에서 또다시 진동이 울린 건 그때였다. 이번엔 보다 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울림이었다.

나는 다급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경악한 내 눈동자를 직시하며 눈썹을 세웠다.

“어디서 전화가 왔나 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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