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벼랑 끝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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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벼랑 끝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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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벼랑 끝의 남자
2022.04.02.
적막한 방 안을 채우던 물소리가 멈췄다.
이제 샤워가 끝난 건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욕실 문을 바라보던 수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벌어진 욕실 문 사이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샤워가운 안으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 근육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아직 채 닦이지 않은 물방울들.
수아의 시선이 흐르는 물방울들을 따라 하준의 몸 위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헉. 이수아. 정신 차려! 난생처음 본 남자 몸을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어쩌자는 거야.
번뜩 정신을 차린 수아가 고개를 획 돌렸다.
“그쪽은 안 씻을 겁니까?”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는 수아를 바라보며 하준이 물었다.
“아, 아니요. 씻을 건데요? 지금 씻으려고 했는데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는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질문이 저렇게까지 당황할 내용이었나?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준은 이내 반걸음만큼 욕실 문에서 멀어졌다.
들어가라는 의미였다.
수아는 도망치듯 급하게 욕실로 향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하아……. 처음 만난 남자랑 같이 잠을 자게 되다니.”
세면대 앞에 선 그녀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도대체 산은 왜 올라온 거냐고!”
후회로 가득한 그녀의 혼잣말이 수증기에 실려 욕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지금으로부터 3일 전.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던 완연한 봄날이었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위치한 HS 편의점.
“아이씨! 뭔 꽃잎이 이렇게 많이 떨어지는 거야! 무슨 똥개 훈련도 아니고, 쓸기가 무섭게 또 떨어져 있어!”
편의점 앞에 떨어진 꽃잎을 쓸던 수아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예쁘기만 한데. 뭘 그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은이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봤다.
“마음의 여유가 흘러넘치는 너한테나 그렇지. 알바생인 나한테는 그냥 예쁜 쓰레기일 뿐이라고.”
수아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더는 못 해! 아니 안 해!!”
결국 수아는 손에 들린 빗자루를 벽 귀퉁이에 신경질적으로 세워두고는 다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수아. 너 혹시 오늘 면접 결과 나오는 날이냐?”
오늘따라 유독 날이 서 있는 걸 보면 확실한 것 같은데.
다은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한테 말했었나?”
“아니. 말은 안 했는데, 너 하는 꼴을 보니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왜? 내 꼴이 어떤데?”
“그걸 몰라서 묻냐? 지금 네 얼굴에 쓰여 있잖아. 나 오늘 예민하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끄응. 역시 너란 인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구나.
다은은 수아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매일같이 붙어 지내는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그러니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인지 알 수밖에.
“응. 오늘 발표 난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띵동.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귀하는 이번에 실시된 면접에서…….]
“또 떨어졌어.”
자존감과 함께 수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면접에서 떨어진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기가 죽고 그래.”
“야! 한두 번이 아니니까 기가 죽는 거잖아.”
있는 집 자식인 네가 이런 내 마음을 아냐고. 수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그러게 대기업은 포기하고 작더라도 네 능력을 알아봐 주는 회사로 가라니까 말 안 듣더니. 쯧쯧.”
하고 싶은 말은 곧 죽어도 해야 하는 성격의 다은은 수아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혹시 모르잖아. 대기업 중에서도 내 능력을 알아봐 주는 곳이 있을지.”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대기업에 취업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니까?”
“…….”
“대기업에 지원하는 비슷비슷한 외모랑 스펙 가진 얘들 중에서 굳이 너를 뽑을 이유가 뭐야? 좀 더 예쁘거나 대단한 부모를 둔 얘들을 뽑겠지.”
뼈 때리는 팩트 폭격에 수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애써 외면하면서 1년만 더. 딱 1년만 더. 그러면서 발악해보는 거지.
그렇게 발악에 발악을 더하다가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붙여주면 다행인 거고.
“이런 인재도 못 알아보는 회사들. 다 망해버려라!”
말하다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수아는 얼굴을 구기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행히 우리 편의점은 망할 일 없겠네. 이런 유능한 인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했으니.”
어느새 다가온 지훈이 말을 걸어왔다.
“수아 정도 능력이면 충분히 대기업에 취직하고도 남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훈은 수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역시 저의 능력을 알아봐 주시는 건 점장님뿐이네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수아가 헤실 거리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참 다행인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은의 한쪽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뭐가?”
“수아 너 말이야. 이렇게 단순하니 얼마나 다행이야.”
“…….”
“그마저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다은은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만하지?”
“왜? 칭찬해 주는 거잖아.”
“그게 칭찬이냐? 그럼 나도 네 칭찬하나 해줘?”
수아는 미간을 좁히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자. 오늘은 여기까지.”
지훈이 오고 가는 대화 사이를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아무튼 수아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해 봐.”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수아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점장님. 그런 의미로 알바 요일을 조정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왜? 주말로 시간 옮기려고?”
“네. 자격증 학원 좀 알아보려고요. 흙 수저에 도금이라도 하려면 하나라도 더 따봐야죠.”
“그래? 안 그래도 주말 알바생 구하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주말로 가고, 평일 알바를 뽑으면 되겠다.”
“정말요?”
수아는 다행이라며 지훈의 말을 반겼다.
“그럼 이번 주부터 바로 출근하는 거야?”
“아니요. 다음 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이번 주말에는 등산 가려고 하거든요.”
뭐? 뭘 한다고? 순간 다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네가 등산을 하러 간다고?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이랑, 씹어 먹는 저작 운동밖에 안 하는 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취직이 안 되는 건 좋은 기가 부족해서인 것 같아서. 이참에 산에 가서 좋은 정기란 정기는 모조리 뽑아먹고 올 거야.”
수아는 큰 결심을 한 듯 결의에 찬 눈빛을 내보였다.
*
주말 아침.
수아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다은에게 빌린 등산용 배낭 안에 이것저것을 챙겼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안 되니까 바나나랑, 초코바. 그리고……. 앗! 잊을 뻔했네.”
수아는 서랍을 열어 빨간 주머니를 꺼냈다.
“언제 다칠지 모르니까 비상약은 필수지.”
고작 작은 산 하나를 오르는 것일 뿐인데, 준비물은 히말라야 등반가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가방 안에 꾸역꾸역 짐을 욱여넣던 그때.
Rrrr.
휴대폰 액정에 [사랑하는 엄마] 이름이 반짝였다.
“어! 엄마!”
[딸. 주말인데 뭐해?]
“응. 나 등산 가려고 준비 중이야.”
[등산? 무슨 등산?]
“그냥 체력 좀 길러볼까 하고.”
차마 대기업 취업을 위해 산의 정기를 뽑아먹으러 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긴. 우리 딸이 체력이 좀 약하긴 하지.]
“응, 그렇지.”
거짓말이 양심에 찔렸는지 수아가 말끝을 흐렸다.
“근데 엄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거 얘기해 준다는 걸.]
“뭔데?”
[한국병원에서 미술 수업하기로 한 날짜를 한 달만 앞당길 수 없겠냐고 물어보시던데? 원래 하기로 했던 날짜에 일이 생겼다나 봐. 어때? 시간 괜찮겠어?]
“한 달? 잠깐만.”
수아는 휴대폰 달력 어플을 실행해 일정을 확인했다.
다행히 잡혀있는 스케줄은 없었다.
“응. 괜찮을 것 같아. 괜찮다고 말씀드려줘.”
[그래? 다행이네. 어차피 오늘 병원에 가려고 했으니까 가서 직접 말씀드려야겠다.]
“오늘 병원 가? 왜?”
[아빠 오늘 쉬는 날이라 같이 봉사활동가기로 했거든.]
수아의 부모님은 수아가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을 함께 다니셨다.
덕분에 수아는 자연스럽게 봉사활동을 접했고, 그 경험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지금 수아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왜 미리 말 안 해줬어? 말해줬으면 시간 비워 놨을 텐데. 오늘 등산 1박 2일이란 말이야.”
[얘는. 봉사활동을 오늘만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그래도…….”
[계획한 대로 등산하면서 체력이나 길러와. 또 지난번처럼 엉뚱한 동물 주워오지 말고.]
“응? 엉뚱한 동물?”
무슨 말인가 싶어 수아의 눈썹이 들썩였다.
[기억 안 나? 너 작년에 뒷산 올라갔다가 주워왔던 거.]
“아…….”
불현듯 작년 뒷산에서 주워왔던 아기 다람쥐가 떠올랐다.
나무 밑에 떨어져 있기에 키워볼까 싶어 데려 왔더니 천연기념물 328호 하늘다람쥐였다는.
하마터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뻔했던 아찔한 사건이었다.
[정 주워오고 싶으면 동물 말고, 남자친구를 주워와.]
“뭘 주워와? 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깜빡이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멘트에 당황한 수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어머. 왜 화를 내고 그래? 요즘엔 등산 동호회 그런 것도 많잖아. 이왕에 등산하는 거 사람들이랑 즐겁게 하면 좋지 뭘 그래? 그러면서 남자친구도…….]
“제 몫까지 열심히 하고 오세요. 이만 끊겠습니다.”
[하여간 말도 못 꺼내게 한다니까. 조심해서 갔다 와.]
“네. 끊어요.”
오늘도 변함없는 기 승 전 남자친구.
피하는 게 상책이라 수아는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아직 싸지 못한 짐을 마저 챙겨 집을 나섰다.
*
인기가 좋아 어렵게 예약한 숲속의 펜션에 도착했다.
“오늘 201호 예약한 이수아라고 하는데요. 짐을 좀 놓고 가려고요.”
“네. 201호 예약확인되었고요. 키는 여기 있습니다.”
수아는 키를 받아들고 가볍게 목 인사를 전한 뒤 자신의 방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창밖으로 비치는 숲의 풍경도 꽤 아름다웠다.
왜 그리 인기가 좋은지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방을 살피던 수아는 필요한 것을 챙겨 들고 등산길에 올랐다.
잠시 후.
‘괜히 왔어. 정기는커녕 내 기가 쪽쪽 빨리는 느낌이야.’
이 산에 정상이 있긴 한 걸까.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나도 정상은커녕 정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잖아.
다리의 힘도, 오르려는 의지도 점점 희박해지던 그때.
“아가씨.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힘내! 파이팅!”
네발로 기다시피 산을 오르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알록달록 등산복을 맞춰 입으신 아주머니 무리가 수아를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조금이 얼마큼인데요? 30분 전에 만났던 아저씨도 조금이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조금은 언제 끝나는 건가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아주머니 무리를 바라보던 수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냥 내려갈까? 왔던 길을 돌아보며 망설이다가.
“아니야. 진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잖아?”
수아는 딱 30분만 더 올라가 보자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힘차게 발을 내디디려던 바로 그때.
정상을 향한 길이 아닌 옆쪽으로 작게 뻗은 길 위에 있던 무언가가 수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뭐지? 산짐승? 고라니? 멧돼지? 설마…… 천연기념물?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갈까?
문득 떠오른 작년의 기억에 걸음이 망설여졌다.
……그냥 살짝 보기만 할까?
역시나. 넘치는 오지랖과 호기심을 자랑하는 그녀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수아는 뭔가에 홀린 듯 검은 형체를 향해 다가갔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벼랑 끝에 서 있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시력이 나빠졌나?
혹시나 싶어 두세 번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지만,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안 돼요!”
금방이라도 절벽 끝으로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저절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아의 간절한 눈빛과 하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