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같이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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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이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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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이 잡시다
2022.04.05.
“안 돼요!”
일단 부르긴 했는데,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드라마에서는 이다음에 어떻게 했었더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탓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침착하자. 일단은 말을 시키면서 안정감을 주는 게…….’
안정감은 개뿔! 정작 내가 안정이 안 되는데!!
이 망할 오지랖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사고 칠 줄 알았지만, 그게 오늘 일 줄이야.
“저, 저기요!”
고민하던 수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하준을 불렀다.
“…….”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랑 얘기 좀 해요.”
최대한 간절하게.
“어떤 일이든 분명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은 내 손 잡고 이리로 내려와 봐요.”
최대한 부드럽게.
수아는 하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
하지만 거센 바람 소리에 아무 말도 전해지지 않은 걸까.
마주 보고 선 하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망설이는 건가? 그렇다면…….
그가 움직임을 멈춘 지금. 지금이 기회였다.
수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하준의 손을 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던 그 짧은 순간.
하준은 빠른 순발력으로 몸을 돌려 수아를 받아냈다.
끌어당김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녀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응? 지금쯤이면 엄청 아파야 하는데? 뭐지?
무슨 일인가 싶어 살며시 눈을 떠보니 보이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갈색 눈동자, 오뚝한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
수아의 시선이 하준의 붉은 입술 위에서 멈췄다.
“계속 거기 있을 겁니까?”
서로의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미안해요.”
넋을 놓고 있던 수아가 하준의 가슴에 닿아있던 두 손을 급히 밀어내며 일어섰다.
오우. 엄청 단단하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어머! 미쳤어! 미쳤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잠깐 사이에 도대체 뭘 느끼고 있는 거냐고!
수아는 밀려드는 민망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하준은 태연하게 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고 있었다.
수아의 시선이 저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로 향했다.
헐…….
말아 문 입술 사이로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은 또 뭐야.
한눈에 보기에도 1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 그리고…….
중력의 힘에 이끌려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수아의 시선이 붉게 물든 하준의 손에서 멈췄다.
“다쳤어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확실히 보이는 걸 보니 분명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빠르게 다가간 수아가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살폈다.
“다쳤네! 다쳤어!”
“괜, 괜찮습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하준이 잡혀 있던 손을 황급히 빼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이렇게 피가 나는데!”
수아는 메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는 쪼그려 앉아 가방 안을 뒤적였다.
“어디에 뒀지? 분명히 챙겼는데. 어디에…… 앗! 찾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빨간색 비상약품 가방을 꺼내 들었다.
“앉아 봐요. 작은 상처라고 얕보다가는 큰일 나요.”
곧장 하준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아……!”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 하준은 어느새 수아의 옆에 앉아 손바닥을 내보이게 되었다.
“정말 괜찮…….”
다시 한번 손을 빼내 보려는데, 수아가 좀 더 힘을 주는 바람에 실패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금방 끝나요. 설마 지금 아플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죠?”
수아가 미간을 좁히며 흙이 묻은 하준의 손바닥 위로 식염수를 부었다.
“소독할 거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읍!”
말과 동시에 소독약이 부어졌다. 순간의 쓰라림에 하준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후우.
보글보글 올라온 거품 위로 수아의 입바람이 스쳤다.
하준은 고개를 돌려 수아를 바라봤다.
……뭐지?
살짝 내리깐 눈빛과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손을 뿌리쳤을 테지만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였다.
‘내가 이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하준이 과거의 기억을 훑으려던 그때.
“다 됐다. 생각보다 안 아팠죠?”
어느새 치료가 다 되었는지 손바닥 위에 붙인 밴드 끝부분을 꼭꼭 누르며 수아가 밝게 웃어 보였다.
“혹시…….”
“당신!”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냐는 질문을 하려던 하준의 말허리가 빠르게 잘려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이 나이에 아직도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고 있는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아. 말하면서도 현타 오네. 이건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그러니까 제 말은. 저한테라도 말해보라고요. 혹시 알아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질지?”
“…….”
하준은 빠르게 몰아치는 수아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설마 내가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사실 자살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복잡할 때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습관일 뿐.
“저는…….”
다소 황당한 그녀의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꺼내려는데.
톡.
“어?”
갑작스럽게 콧잔등 위로 떨어진 무언가에 놀라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톡. 토독.
빗방울이었다.
‘응? 설마 나 지금 비 맞은 거야? 이렇게 맑은데?’
수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토도독.
또다시 이마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헐. 진짜 비잖아!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아씨. 우산도 안 가지고 왔는데.’
당황한 수아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죠.”
“네?”
허둥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수아가 되물었다.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내려가자고요.”
하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같이 가요!”
벌써 저만치 멀어진 하준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자고로 산이란 올라가는 건 어려워도 내려가는 건 쉽다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인가?
어째 나는 올라갈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은데.
“헉. 헉.”
내딛는 걸음마다 수아의 거친 숨소리가 담겼다.
그건 그렇고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빨라.
무정한 황새 놈 같으니라고. 다리 짧은 뱁새가 불쌍하지도 않나?
애꿎은 입술을 잘근대며 앞서 걷는 하준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획 돌렸다.
뭐야? 자기 욕하는 거 알았나?
그가 걸음을 멈춘 지금이 기회다 싶어 수아는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또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보다는 확실히 느려진 걸음으로.
설마 나를 기다려준 건가?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아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걸음을 맞추며 산에서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수아가 예약한 펜션에 다다랐다.
두 사람이 비를 피하려 안으로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
쏴아! 번쩍! 우르릉 쾅!
기다렸다는 듯 3단 콤보로 비가 퍼붓기 시작하더니, 빛이 번쩍이고, 천둥이 쳤다.
수아와 하준의 눈동자에 당황함이 가득 들어찼다.
“혹시 숙소 예약했어요?”
흐르던 정적을 깨고 수아가 물었다.
“아니요.”
하준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초 계획은 당일 등산인 데다, 비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비도 많이 오고, 또 금방 어두워질 텐데 차라리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출발하는 건 어때요? 제가 빈방 있는지 물어볼게요.”
딱히 그의 대답을 듣고자 물어본 말은 아니었기에 수아는 제 말만 하고는 급히 카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펜션 사장은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장님. 혹시 빈방 있을까요? 작은 것도 상관없는데.”
“어쩌죠? 지금 예약이 다 차서 빈방이 없어요.”
하긴. 주말이라 방 하나도 겨우 예약했는데, 비까지 내리는 지금 빈방이 있을 리가 없지.
잠시 고민하던 수아는 뭔가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하준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빈방이 없다고 하네요.”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제가 예약한 방에서 같이 자는 건 어때요?”
“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하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사실 놀란 건 하준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꺼낸 수아 또한 놀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쳤나 봐.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남자한테 같이 자자고 하다니. 어떻게 수습할래.’
대담한 대사를 날린 사람 같지 않게 수아는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저랑 같이 자자고요!”
이미 엎질러진 물. 수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외쳤다.
“…….”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하준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은 황당함을 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요. 그저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서 제안한 것뿐이니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제 될 일도 없을 것 같고.”
하준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변명 같은 말을 뱉어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저는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제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태어나서 그쪽을 모른 척할 수가 없습니다.”
“모른 척해도 됩니다.”
하! 한번 해보자는 거지?
수아는 반복되는 하준의 거절에 오기 비슷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오늘 밤은 어디에서 보내실 건데요? 방법이 있다고 하시면 그땐 모른척해 드릴게요.”
“저는 로비에서…….”
순간 하준의 말이 멈췄다.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로비에 빈자리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로비에서 뭐요?”
어서 그다음 말을 해보시지.
“거봐요. 방법 없죠? 그쪽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 때문에 펜션 어디에도 자리는 없잖아요.”
“…….”
“아까 미리 방 확인해봤는데, 침실이랑 거실이 분리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침대에서 자고, 한 사람이 거실에서 자면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하준의 태도에 수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이 정도까지 했으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라고 이런 얘기하기가 쉬웠는지 아나?
마치 ‘하룻밤만 제 방에서 머물러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꼴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려던 그때.
“……그럼 제가 거실에서 자겠습니다.”
하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사면초가의 상황. 천하의 민하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 아, 네!”
수아는 줏대 없이 올라가는 자신의 입술을 애써 내리누르며 하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