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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운명의 시작 (4/105)


4. 운명의 시작
2022.04.12.


현성 그룹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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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하준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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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오늘도 너무 멋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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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오늘도 옷이 부회장님을 입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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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잘생겼는데, 5개 국어는 기본에, 업무처리 능력은 따라갈 자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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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회장님 첫째 아들이라니. 뭐가 더 필요하겠어.”

하준을 향한 여직원들의 감탄이 쏟아졌다.

국내는 물론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 중인 현성 그룹의 부회장 민하준.

직책만으로도 완벽한데, 그보다 더 완벽한 외모를 가진 그에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하준을 향한 여직원들의 핑크빛 하트로 로비가 가득 채워지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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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회장님 너무 차갑지 않아요? 표정도 그렇고, 마음에 비수 꽂는 일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잖아요.”

갑자기 날아든 한 여직원의 발언으로 로비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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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뭘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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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떤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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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부회장님의 매력이라는 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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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이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궁금한 걸 못 참는 건지 여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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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차가워 보여도 내 여자한테만큼은 한없이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매력 포인트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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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부회장님한테 여자 친구가 있으시구나.”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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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듣고 있던 직원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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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거지. 더불어 상대방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직원들 모두 그 말에 인정한다는 듯 위 아래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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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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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디 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는 수아의 모습에 다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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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원에 미술 수업 재료 좀 미리 가져다 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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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업하는 날 가져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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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님이 오늘 책상 구성이랑 이것저것 알려 주신다고 하셨거든. 설명 들으러 가는 김에 가져다 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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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다은의 시선이 수아 옆에 놓인 커다란 가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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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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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워 보이는데 너 혼자 들고 갈 수 있겠어? 내가 차로 데려다줄까?”

아. 맞다. 정다은 며칠 전에 차 뽑았지?

평소에는 잘 모르겠다가도 저렇게 큰 거 하나씩 지르고 올 때마다 있는 집 외동딸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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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럼 저야 너무 감사하죠. 다은 님.”

순식간에 호칭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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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이럴 때만 다은 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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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럴 때라도 불러주는 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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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건 그러네.”

빠르게 수긍한 다은은 차 키를 챙겨들고는 수아와 가방 손잡이를 한 개씩 나누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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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뭐가 들었는데 이렇게 무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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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이랑 크레파스랑 색종이? 아마 종이들이 많아서 무거운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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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들고 가려고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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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타고 가려고 했지. 기사분들이 도와주시잖아.”

두 사람은 끙 차 소리를 내며 간신히 가방을 실었고, 다은의 차는 복잡한 도로를 달려 금세 한국병원에 도착했다.

창문을 통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확인한 수아가 트렁크에 실려 있던 가방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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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나올 거면 기다려줄까?”

다은이 조수석 창가 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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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나온 김에 서점 좀 들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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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알겠어.”

수아가 손을 흔들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고, 다은도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

강남 시내의 건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회장실.

넓은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들이 모여드는 곳. 밝게 빛나는 그곳에 하준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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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항은 다시 검토하고, 추가 보완해서 다시 올리라고 전달하세요.”

하준이 손에 들린 결재판을 박 비서에게 넘겼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설쳐서일까.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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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오늘 잡혀 있는 외부 일정은 없으니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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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역시나.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박 비서는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입사 이후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회사 업무에만 집중해온 사람.

그 모습은 마치 일을 못 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에게 휴식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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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께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걱정스러운 박 비서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준은 재킷을 챙겨 들고는 부회장실을 나섰다.

회장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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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실 비서실장이 일어나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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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자리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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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께서는 건강검진 예약으로 오늘과 내일 이틀간 자리를 비우실 예정이십니다.”

건강검진이라고? 따로 전달받은 기억이 없는데.

하준은 혹시나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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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미간을 좁힌 채 발길을 돌리던 하준은 서둘러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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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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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회장님 입원하신 거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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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편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그것이 의미하는 걸 알아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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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구나? 왜 나만 이걸 모르고 있는 거지?”

내뱉는 목소리에 한껏 날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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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프신 거 아니고, 그냥 건강검진 받으시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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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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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병원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아시니까 일부러 연락 안 하신 거겠지.]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병원이라는 글자만 봐도 벌벌 떠는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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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회장님 상태는 어떠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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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검사라니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그냥 검. 사.]

지훈은 별일 아니라고 말하며 화제를 돌리려는 듯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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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너는 아직도 회장님이 뭐냐? 회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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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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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다. 인제 그만 아버지라고 부를 때도 되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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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알아서 해. 끊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하준은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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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비서님. 저 잠시 외출합니다.”

부회장실로 돌아온 하준이 외출 준비를 마치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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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준비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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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업무이니 박 비서님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준은 1층에서 대기 중이던 수행 기사에게도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며 홀로 운전석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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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여기에서 진행해 주시면 돼요. 이쪽으로 책상을 놓으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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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미술 수업이 진행될 소아병동 놀이실.

장소나 책상 위치, 수업에 참여할 아이들 명단 등 수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간호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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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가방은 여기에 두고 다니시면 될 것 같은데. 혹시 공간이 부족하시면 좀 더 큰 곳으로 준비해드릴까요?”

간호사가 놀이실 뒷문 벽 쪽에 있는 붙박이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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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충분할 것 같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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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더 감사하죠. 아이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몰라요. 저희 아이들 잘 좀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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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 그날 뵐게요.”

인사를 건넨 수아가 놀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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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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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미 한참 전 병원 주차장에 주차를 마쳤지만, 하준은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성의 입원 소식에 급히 달려오긴 했지만, 차마 병원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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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야 하는데…….”

말과는 다르게 가늘게 떨리는 손은 핸들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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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준이 핸들에 고개를 묻은 채로 주문을 외우듯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흠칫 놀란 하준이 핸들에 묻었던 고개를 빠르게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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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하고 있어?”

지훈이었다.

그는 하준이 병원에 올 거란 것도, 혼자서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할 거란 것도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고 말 안 한 건데 굳이 찾아와서는. 어이구.

지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어차피 돌아가라고 해도 말을 들을 하준이 아님을 알기에 인사만 하게 하고 빨리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하준이 힘겹게 발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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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왔어.”

좀 전은 무슨. 한참 전에 왔겠지.

하준이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할 때는 그 반대를 생각하면 된다는 것.

20년을 함께 지내니 그 정도는 이미 터득한 터였다.

두 사람은 금세 병원 입구에 도착했고, 로비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준의 두려움은 더 커져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걷고 싶은데, 앞으로 디디는 발걸음이 자꾸만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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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찮아? 큰아버지께는 너 왔었다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앞서 걷던 지훈이 걸음을 멈춘 하준에게 다가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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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아. 들어갈 수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괜찮다니. 참 고집스러운 녀석이다.

그렇게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어디에서 사고가 난 건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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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주세요!”

병원 로비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피투성이의 환자들과 다급한 의료진들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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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정신 좀 차려봐! 여보!”

뒤쫓아 들어오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들려왔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의 중심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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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순식간에 가슴을 조여 오는 끔찍한 고통에 하준은 가슴팍을 거세게 틀어쥐며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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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아!”

로비의 상황을 살피던 지훈의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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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괜찮은 거야? 지금이라도 나가는 게 좋겠어.”

그는 휘청이는 하준의 어깨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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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져.”

하준은 질끈 감은 눈으로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통을 숨겼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안으로 삼키고 삼켜, 홀로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에게는 혼자 병원을 빠져나갈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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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물, 물 좀.”

힘겹게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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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알겠어.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금방 사 올게”

매점을 향하는 걸음에서 지훈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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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괜찮아. 괜찮아.”

살짝 고개를 틀어 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준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려는 데.

충격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형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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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던 희망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절망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느낌.

하준은 뻗은 손끝으로 다급하게 벽을 짚으며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향하는 곳이 어디이든 지훈이 없는 곳이면 되었기에.

그렇게 정신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귓전을 찢을 듯 시끄럽던 소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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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제 걸음이 멈춘 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하준의 몸은 벽을 타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양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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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

흔들리는 숨결과 함께 애원과도 같은 처절한 혼잣말이 새어 나오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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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괜찮아요? 저기요!”

자신을 부르는 어딘가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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