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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연처럼 네가 (5/105)


5. 우연처럼 네가
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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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어?”

미술재료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던 수아의 시야에 하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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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왜 이런 데서 마주치는 거야.”

자고 있는 남자를 덮치고 냅다 도망쳐버렸던 수치스러운 기억에 수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만나게 될 줄이야.

어떻게든 그에게 들키지 않고 병원을 빠져나가야 했다.

수아는 상황을 살피려 몸을 숨겼던 안내데스크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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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남자 왜 저래?”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에 수아는 눈을 키우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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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앞이 안 보이는 건가?”

뻗은 손으로 다급하게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의 모습이 이내 좁은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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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저러는 건데.”

수아는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사라진 복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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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있다.’

복도에 들어선 그녀가 하준을 발견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을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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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괜찮아요? 저기요!”

수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하준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었다.

천천히 그의 고개가 들렸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그의 얼굴에 수아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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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사 선생님을……!”

한눈에 봐도 심각해 보이는 하준의 상태에 도움을 청하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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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급한 외마디 소리와 함께 하준의 손이 수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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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저는 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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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어딜 봐서 괜찮다는 거예요! 이렇게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어머. 이 땀 좀 봐.”

이 사람은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나? 손바닥을 그렇게 다치고도 괜찮다고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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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죠.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당장이라도 뛰어갈 것 같았는지 하준은 붙잡은 손목을 더 힘주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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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밖으로만 나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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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밖이요? 밖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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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합니다.”

이렇게 아프면서 병원 밖으로 나가겠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수아는 차마 아픈 사람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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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주고, 나머지는 차분히 설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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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일단은 밖으로 나가는 걸로 해요.”

수아는 하준의 옆구리에 팔을 끼워 넣으며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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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요. 조심.”

두 사람은 서로 속도를 맞춰 걸음을 내디뎠고, 이윽고 병원 앞 정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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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수아는 하준을 의자에 앉힌 뒤 그의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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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괜찮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슴의 통증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병원을 빠져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호흡은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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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준은 그것이 지훈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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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 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려던 하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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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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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그냥 잊어버리지. 그게 뭐 좋은 기억이라고.

또다시 떠오르는 수치스러운 기억에 수아는 말아 문 아랫입술을 잘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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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때요? 지금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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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얼굴은 전혀 안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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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쪽은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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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느닷없는 질문에 하준은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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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안 괜찮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만 괜찮다고 해요? 그런 걸 속에 자꾸 담아놓으니까 그렇게…….”

떠나고 싶은 나쁜 마음이 드는 거라고요.

수아는 차마 마지막 말을 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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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받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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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병원을 좀 싫어합니다.”

세상에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의 표정을 보니 짐작이 갔다.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공포증. 트라우마. 그런 종류의 것이겠구나.

바로 그때. 뭔가가 생각난 듯 수아의 눈이 번뜩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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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럴 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 하나 알고 있는데. 알려줄까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하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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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손 좀 이리 줘 봐요.”

수아는 망설이는 듯한 하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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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저만 알고 있는 비밀의 주문이거든요?”

싱긋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끝이 동그랗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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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마음속으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워 봐요. 그럼 어느새 괜찮아져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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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주문이라고?

단어를 듣는 순간 하준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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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핫. 엄청나게 유치하죠?”

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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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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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요? 이거 제가 만든 주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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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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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7살 때 여기 한국병원으로 봉사활동을 왔었거든요. 그때 비상계단에서 만난 어떤 오빠한테…….”

멈칫. 빠르게 이어지던 수아의 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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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하여간 누구든 관심만 보인다 싶으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고 떠들어대는 이 몹쓸 버릇. 또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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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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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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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야기해도 된다고요.”

비밀의 주문과 비상계단.

하준에게 그녀의 말들은 마치 퍼즐 조각들 같았다.

이수아라는 미완성 퍼즐을 완성시켜줄 작은 퍼즐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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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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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남 얘기 듣는 걸 좋아하나?

궁금함이 담긴 하준의 눈빛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수아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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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부모님 따라서 봉사활동을 왔다가 비상계단에서 울고 있는 어떤 오빠를 만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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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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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서 뭐라도 해주고 싶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생각해 낸 게 이 비밀의 주문이었어요. 그때 한창 마법 진, 마법 주문 같은 만화에 빠져있을 때라.”

아. 그냥 지어낸 주문이었구나.

뭔지 모를 허탈감에 짧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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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유치함이 은근 효과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도 봐요. 웃고 있잖아요.”

하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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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름이…….”

그는 서둘러 입가의 미소를 거둬내고는 물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인 그녀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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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그날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말씀을 못 드렸네요. 저는 이수아라고 해요.”

이수아. 이수아.

그녀의 이름이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귓가를 맴돌았다.

퍼즐이 완성되었고, 하준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산에서 그녀에게 잡힌 손을 왜 뿌리치지 못했는지.

곁에 누운 그녀를 왜 피하지 못했는지.

찾았다. 이수아.

*

20년 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허름한 판잣집

그곳에 하준과 어머니 선혜, 그리고 아버지 현철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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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가져오라고! 술!”

현철은 어김없이 술에 취해 돌아왔다.

그렇게 마시고도 부족했던 걸까.

집에 돌아와서도 술을 가져오라며 소리를 질러대던 현철은 이윽고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은 살림살이들이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부서지는 살림살이들 사이에서 선혜는 혹여 아들이 다칠세라 하준을 품에 안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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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애는 왜 낳아서 고생을 시켜!! 당장 갖다 버려! 고아원이든 어디든 갖다 버리라고!”

제 자식임이 분명했지만, 현철은 10년이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하준의 존재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폭력과 학대로 지쳐가고 있을 때쯤.

술에 취해 잠든 현철의 눈치를 살피던 선혜가 하준의 손을 잡고는 몰래 문밖을 나섰다.

가로등 하나 없는 적막한 골목길.

선혜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하준의 손바닥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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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예요?”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금반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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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에 하준이가 멋진 어른이 되어서 지켜주고 싶은 누군가가 생기는 날. 그때 전해 주려고 했던 건데.”

애써 울음을 삼키며 선혜는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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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이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엄마 대신 전해줄래?”

엄마 대신.

사실 선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린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할 것이란 걸.

며칠 뒤 선혜는 자신의 예상대로 하준의 곁을 떠났다.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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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준은 물끄러미 비어 있는 액자를 바라봤다.

사진 한 장이 없어 텅 비어 있는 외로운 엄마의 액자를.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세상을 잃은 어린아이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눈물에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흐려질까 봐.

하준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참아냈다.

그렇게 주머니 속 깊이 숨겨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넋 놓고 앉아 있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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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준!! 어디 있어?”

한참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현철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장례식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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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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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

현철은 자신을 보며 벌벌 떨고 있는 하준을 거칠게 잡아채서는 장례식장 밖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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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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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말 말고 따라와!”

도박장에서 떠도는 여러 소문 중 하나였다.

대기업 회장에게 골수이식을 해주고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소문.

현철은 그길로 하준을 데려가 골수 검사를 받게 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선혜가 세상을 떠나던 날.

병에 걸린 대기업 외아들의 골수와 하준의 골수가 일치한다는 소식이 현철에게 전해졌다.

어머니를 채 보내지 못한 하준은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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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안 가고 싶어요. 엄마 옆에 있고 싶어요.”

처절한 하준의 눈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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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몸속에 있는 그 골수 인가 뭔가가 돈이 된다잖아. 그거 하나만 주면 그 큰돈을 한 번에 준다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그거 하나를 못 해?”

10년을 거부당했던 존재가 아들이 되는 순간.

쓰레기 같은 아비는 그 아들을 순식간에 팔아넘겼다.

현철은 떠났고, 하준은 병원에 버려졌다.

버림받은 10살짜리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원 비상구 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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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는 거야?”

하준의 고개가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어느샌가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

아이의 눈망울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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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괜찮아? 무서워? 내가 같이 있어 줄까?”

말에도 체온이 있는 걸까.

처음 보는 여자아이의 말은 따뜻했고, 얼어 있던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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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밀 주문 하나 알려줄까? 손 이리 줘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는 망설임 없이 하준의 손을 덥석 잡고는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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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오빠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아이는 하준의 손바닥 위에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하준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아이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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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워봐.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러면 진짜 괜찮아져.”

하준의 시선이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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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내 이름은 수아야. 이수아. 우리 내일 또 만나자. 아니. 맨날 맨날 만나자.”

봉사활동을 하러 오신 부모님을 따라왔던 수아는 약속을 지키려는지 정말 매일같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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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 오빠. 내가 재워줄게.”

하루는 재워준다며 옆에 누워 토닥여주다 자기가 먼저 잠이 들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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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준 오빠 아프게 하지 마요!”

하루는 혈액을 채취하러 온 간호사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화를 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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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꾸지 않게, 내가 하준 오빠 지켜줄게.”

하루는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겠다며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스티커를 침대 가득 붙여놓기도 했다.

그렇게 수아는 하준이 퇴원하는 날까지 계속 찾아와 주었고, 그 덕분에 하준은 지옥과도 같았던 병원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비록 퇴원 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수아라는 이름과 비밀 주문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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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동안 빌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연으로라도 한 번만 다시 찾아와 달라는 간절한 소원.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지금 잡은 이 손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

하준의 입술 사이로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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