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우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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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 사이
2022.04.19.
“저 진짜 괜찮은데요.”
검은색 세단 자동차 앞에서 두 사람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하준의 말에서 시작된 실랑이였다.
“아직은 운전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수아 씨 덕분에 이제 진짜 괜찮아졌습니다.”
“그래도요…….”
난감했는지 시선을 굴리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혹시 제가 사고라도 낼까 봐 불안해서 그럽니까? 저 이래 봬도 10년 무사고인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괜히 번거로우실까 봐 그렇죠.”
“번거롭긴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요?”
느닷없이 들려온 단어에 놀라 눈썹이 들썩거리고 있는데.
하준이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왔다.
고개만 돌리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함께 이불을 덮은 우리 사이.”
응? 뭘 함께 덮어?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더니 하준은 교차한 두 팔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네가 잠들어 있는 나를 덮쳤잖아.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날은 제가.”
말뜻을 이해한 수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알아요. 좋아하는 거.”
하준이 그녀의 말을 빠르게 가로챘다.
“네? 제가요?”
그래. 잘생겼다고는 생각했어. 몸도 좋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건 좋아하는 것하고는 다르지!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좋아하는 거.”
“아니요! 제가 그쪽을 왜 좋아해요!”
“저요?”
“네! 지금 제가 그쪽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아니요. 저는 침대를 말한 건데요.”
“침대요?”
갑작스러운 단어에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네. 침대를 좋아해서 침대로 온 거 아니었어요? 저는 그걸 말한 건데…….”
말을 마친 그의 얼굴이 웃음을 참고 있다는 듯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 침대요? 그렇죠. 침대 좋아하죠.”
그래. 이럴 땐 웃는 게 상책이지. 하하하하.
수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어? 그날은 거실을 좋아한다고…….”
이런. 젠장.
“저 데려다주신다면서요. 빨리 출발하죠. 출발! 출발!”
수아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조수석에 올랐다. 펜션에서 도망쳤던 그날처럼.
풉. 귀엽네.
하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운전석에 앉은 그가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수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뺨에 와닿는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한 마디 하려는데, 그가 다시 상체를 기울이며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또 다가오는 건데?’
또다시 찾아온 위기 상황.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입술만 뻐끔대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찰칵.
‘……찰칵?’
느닷없이 들려온 낯선 소리에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안전벨트 해야죠.”
하준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네. 그럼요. 해야죠. 안전벨트는 생명선이니까. 안 하면 벌금도 내야 하고. 당연히 해야죠.”
당황한 수아의 입술 사이로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풉.”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에 참았던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풉? 지금 웃은 거야? 아니, 비웃은 거지? 이 씨!
미간을 좁히며 발끈하려던 수아가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마주한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아, 화를 낼 수도 없게 만드는 저 얼굴. 어쩔 거냐고.’
수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설마 지금 긴장한 겁니까?”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아, 아니요? 제가 긴장을 왜 해요?”
당황한 수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죠.”
가만히 쳐다보던 하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저 진짜로 긴장 같은 거 안 했…….”
“자.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요?”
그녀의 말허리를 잘라낸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수아 씨 집이 어디인지 묻는 겁니다.”
처음부터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될 것이지. 우리 어디로 갈까요는 뭐냐고. 괜히 사람 설레게.
“제가 주소 찍을게요.”
더 마주 보고 있다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 것 같다는 생각에 수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상체를 숙여 내비게이션의 화면을 터치하는 사이 하준의 시선이 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왜 그날 바로 너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렇게 어여쁜 모습 그대로인데.
이마에서부터 눈, 코, 입술까지 그림을 그리듯 수아의 얼굴 곡선을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다 입력했어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마자 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수아의 동공은 길을 잃은 듯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럼 출발하죠.”
빠르게 시선을 거둔 하준이 페달을 밟았다.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 왜 그러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먼저 정적을 깬 건 수아였다.
“네? 무슨……?”
“산에서요. 뛰어내리려고 하셨잖아요.”
아. 그날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었구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준의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그날은 수아 씨가 오해한 겁니다.”
“오해요?”
“네. 저는 뛰어내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하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입니다. 그날도 머리나 식힐 겸 해서 산에 올랐던 거고요.”
“아니! 생각을 정리한다고 그렇게 위험한 곳에 서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다 정말 떨어지면 어쩌려고.”
수아는 미간을 좁히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농담이겠지 했는데, 바라본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어쩔 수 없다뇨?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당황스러움에 그녀는 말아 쥔 주먹으로 하준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의 외마디 소리에 잠깐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제가 때린 건 너무 죄송한데. 그래도 이건 그럴 만했던 거니까 이해해 주셔야 돼요.”
민망함에 수아는 재빨리 하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말은 제가 맞을 짓을 했다는 겁니까?”
정면을 향하던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왔다.
“그럼요. 맞을 짓 했죠. 어쩔 수 없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해야죠.”
“…….”
“그런 의미에서 그런 좋지 않은 습관은 이참에 버려요!”
“…….”
단호한 수아의 태도에 하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익숙하지 않은 길.
하준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누군가를 조수석에 태우는 것.
그 누군가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 여자와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그것마저도 그녀와 함께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하준의 차는 수아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아는 운전석에서 내려 제 앞으로 다가온 하준을 향해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하준이 다시 몸을 돌렸다.
“하준입니다.”
“네?”
“제 이름. 민. 하. 준. 이라고요.”
그는 혹시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할까 싶어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아! 네. 민하준 씨.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맑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
역시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준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도 첫 만남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수아 씨!”
“네?”
“그러니까…… 그게…….”
20년 전, 그날의 그 오빠가 나라고 이야기할까.
하준은 입술이 달싹이며 말을 망설였다.
“네.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해도 언젠가 스스로 떠올려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하준은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한 채, 그저 속으로 바랐다.
내 곁에 있는 동안, 그날이 언제가 되더라도 자신을 기억해내 달라고…….
*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같은 시간, 하준이 지하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좋은 아침입니다.”
박 비서의 인사가 끝나기 전 그가 불쑥 인사를 건네왔다.
응? 지금 뭐라고…….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박 비서와 수행 기사의 눈이 동시에 벌어졌다.
그저 건네지는 인사만 받을 뿐, 지금껏 단 한 번도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한다고? 게다가 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뭐고?
박 비서는 룸미러를 통해 비치는 하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당사자인 그는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부회장님. 혹시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박 비서가 넌지시 물었다.
“……?”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지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른 날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아, 아니요! 그런 일 없습니다.”
하준은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끌어내렸다.
두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어제 수아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서부터였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건.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한 건데 역시 예리한 박 비서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나 보다.
박 비서는 마치 서류 안으로 들어갈 듯 고개를 파묻고 있는 하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오늘 일정에 대해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팀장단 회의가 있습니다.”
“…….”
“그리고 회장님께 보고드릴 공모전 사업 계획안은…….”
“……!”
회장님이라는 단어에 하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제 현성의 병실을 찾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준은 서둘러 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하준이냐?]
몇 번의 연결음 뒤에 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아침부터 웬 전화야?]
“아니요. 어제…….”
[너 어제 왔었다며? 지훈이한테 얘기 들었다.]
현성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준의 말을 가로챘다.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별거 아니라서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괜한 짓을 해서는.]
“아닙니다.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건 됐고. 네 엄마가 너 먹일 반찬 지훈이 편의점에 가져다 놓는다고 하더라. 그거나 잊어버리지 말고 챙겨.]
하준의 엄마 혜선은 하준에게 줄 반찬을 항상 지훈이의 편의점에 가져다 놓곤 했다.
본가에 오는 것과, 자신의 집에 혜선이 방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하준을 위한 배려였다.
지훈과는 워낙 친하니 하준이 가지러 가거나, 지훈이 하준에게 전해주거나 하는 일이 수월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네. 오늘 들러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도 수고해라.]
“네.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은 하준은 시선을 창밖에 둔 채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